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44)화 (144/306)


#144. 그녀가 없는 겨울
2022.12.22.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늦은 오후.

주홍빛 하늘을 올려다보는 제림의 입가에 새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해가 바뀌었으나 여전히 추위는 가실 생각이 없는 듯했다.

패딩 주머니 깊숙이 손을 찔러 넣어 꽁꽁 숨어 있던 휴대전화를 꺼내려던 제림은 문득 저 멀리 낯익은 인영을 발견했다.

양손 한가득 짐을 든 채 호화로운 오피스텔 입구에 우두커니 선 그림자.

제림의 친오빠, 제휘였다.

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하려는 듯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장바구니와 박스 따위를 잠시 땅에 내려 두려던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제, 제림아.”

네가 어떻게 여기에? 제휘가 흠칫 놀라는 것이 보였다. 마치 들으란 듯 크게 한숨을 쉰 제림은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오빠, 여기 또 왔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이 섞인 목소리에 제휘는 목뒤를 긁으며 멋쩍게 웃었다. 다른 답은 없었다.

제휘가 소중하게 안고 있는 박스에는 마른 헝겊, 먼지 제거 스프레이, 살균 소독액 등 각종 청소 도구들이 담겨 있었다. 어깨에는 그보다 큰 장바구니를 멘 상태. 그 안에 무엇이 들었을지, 제림은 대충 알 것 같았다.

“이리 줘.”

퉁명스럽게 손을 뻗는 제림. 제휘가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

“으, 응?”

“손 없잖아. 비밀번호, 입력 안 할 거야?”

“아.”

다그치듯 눈짓하자 그제야 제휘는 들고 있던 짐의 절반을 제림에게 건넸다.

“고맙다.”

“…….”

제휘의 짧은 인사에 제림은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삑, 삑, 삑…….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자동문이 열렸다. 화려한 로비를 지난 두 남매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7층으로 올라갔다. 대화는 없었다.

티를 내지 않으려는 듯하지만 어두운 안색의 제휘. 그리고 그런 제휘를 모른 척 살피는 제림.

그런 두 사람이 비로소 도착한 곳은 사람 사는 냄새 따위 전혀 나지 않는 빈집, 1702호였다.

“실례합니다.”

아무도 없는 실내를 향해 제휘가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신발을 벗고 실내로 들어서는 그와는 달리, 제림은 우두커니 그곳에 선 채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먼지 한 톨 없는 신발장.

현관 거울은 번쩍번쩍했고 새하얀 대리석 바닥도 마찬가지로 얼룩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라기에는 너무도 잘 관리되고 있는 듯했다.

당연했다. 이렇듯 며칠에 한 번씩 꼬박꼬박 방문해 청소를 하는 이가 있는데, 먼지가 앉을 틈이 어디 있겠는가.

다시 시선을 들자 냉장고 문을 열고 차곡차곡 음식들을 쌓아 두는 제휘가 보였다. 제림은 그제야 운동화를 벗고 느릿느릿 그에게 다가갔다.

“집이 깨끗하네.”

그러자 냉장고 속 비엔나소시지의 유통 기한을 확인하던 제휘는 얼굴을 긁적이며 대꾸했다.

“그래?”

“응. 냉장고도 꽉 차 있고.”

냉장고에는 캔 맥주부터 시작해 우유, 주스, 심지어는 요구르트까지 음료가 가득했다. 그뿐인가. 싱싱한 채소에 트레이 가득 자리 잡은 달걀, 직접 만든 반찬, 즉석요리까지. 누가 보면 마트에서 종류별로 쓸어 온 줄 알겠다.

착잡한 동생의 마음을 알기는 하는지, 제휘는 나지막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냉장고 서랍에서 사과를 꺼냈다.

아직까지 아슬아슬 괜찮아 보이지만 군데군데 거무튀튀한 것이 꽤 오래 보관해 둔 듯했다.

사과 표면을 살피던 제휘는 그것을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사과를 예쁘게 썰어 그릇 위에 보기 좋게 올려 두었다.

“먹게?”

제림이 물었다.

“아니. 나 사과 별로 안 좋아하잖아.”

제휘는 선반에서 비닐 랩을 꺼내며 덧붙였다.

“헌터님이 좋아하시거든.”

“…….”

빙긋 웃는 그의 앞에서, 무어라 말하려던 제림의 입술이 소리 없이 다물렸다.

이유라. 아니, 차은하.

수많은 사람이 그녀를 찾기 위해 시간과 노동력을 투자했다. 그러나 지금껏 아무런 행방도, 조그마한 단서도 찾지 못했다. 1년이 넘도록 말이다.

다가오는 봄, 협회는 그녀의 추모식을 예정하고 있었다. 거의 기정사실화된 것이다.

─그녀는 죽은 것이라고.

‘그런데.’

제림은 시선을 들어 제휘를 바라보았다.

오빠는 아직도 헌터님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 물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비닐 랩으로 사과가 담긴 그릇을 꼼꼼하게 감싸는 그를 앞에 두고서는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림은 이곳에 오기 전, 휴대전화로 확인했던 한 인터넷 기사를 떠올렸다.

<또다시 ‘흑염의 프린세스’ 목격담. 이번에는 경기도 과천시? 목격자 A씨 인터뷰 단독 보도.>

얼마 전, 흑염의 프린세스를 목격했다는 사람이 또 나타났다. 아마도 이번이 일곱 번째…… 아니, 여덟 번째였던가.

언노운 게이트에 은하가 갇히고 아마 3개월쯤 지난 무렵. 인터넷 모 커뮤니티 사이트에 흑염의 프린세스 목격담이 올라왔다.

‘언노운 게이트에 남겨진 그녀가 귀환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일부 네티즌들은 환호했고, 그 소식은 한국 헌터 협회까지 전달되었다.

그런데 목격자의 진술이 이상했다.

새벽 5시경, 인적이 드문 버스 정류장에서 흑염의 프린세스와 조우했다고 전한 그는, 그녀가 이유 없이 자신을 공격하려 들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약 2개월 뒤. 또 다른 목격자가 나타났다.

그는 골목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다 검은 드레스의 여자, 그러니까 흑염의 프린세스와 마주쳤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비에 젖은 비둘기 사체를 맨손으로 뜯어 먹고 있었다며, 도저히 사람이라 여길 수 있는 몰골이 아니었다고.

그렇다. 그들이 마주친 것은 남해안 게이트의 영웅이 아닌, 괴담 속 ‘흑염의 프린세스’였던 것.

어쩌면 흑염의 프린세스의 위상이 높아진 지금, 일부는 그저 관심을 끌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찌 되었든 그들이 말하는 ‘흑염의 프린세스’는 제휘가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죽은 것이다.

역대급 규모의 언노운 게이트였다. 그 제천대성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정도로 참담한 전투였다고 했다. 그곳에 혼자 남은 그녀가, 1년이 넘도록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데도 제 오빠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 집에 찾아와 소파 먼지를 털어 내고, 마룻바닥을 번쩍번쩍 윤이 나게 닦고, 또 냉장고를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바보같이.’

하지만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믿고 싶은 거겠지. 아직 살아 있다고. 언젠간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설령 그녀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 죽음을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이상 제휘는 또 이곳에 찾아와 집안일을 할 것이다. 이 텅 빈 집에 돌아와, 갈색으로 변해 버린 사과를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고 그릇을 씻을 것이다.

그녀는 남매의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맞다고, 제휘는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제림은 비닐 랩으로 정성스레 사과를 싸고 있는 제휘로부터 휙 시선을 돌렸다. 하고자 했던 말 대신, 다른 말이 퉁명스럽게 튀어 나갔다.

“……금방 안 먹으면 상할걸.”

“괜찮아.”

그러나 제휘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다시 또 깎으면 되니까.”

* * *

2031년 11월.

역사상 가장 거대한 언노운 게이트가 대한민국 남해안에 위치한 작은 섬, 대병풍도에 출현하였다. 무수한 사상자를 낳은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또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그동안 수많은 변화가 있었다.

셀 수 없는 변화 중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것은, 어느 날 세계 각국에 등장한 정체불명의 탑이었다.

검은 벼락과 함께 등장한 11개의 탑.

하늘을 뚫어 버릴 듯 높게 솟아오른 그것을 바라보며, 인류는 1997년, 그들의 역사를 바꾸었던 날을 떠올렸다. 붉은 벼락과 함께 나타난 수상한 균열. 게이트가 등장한 그날을 말이다.

그러나 탑에서는 아무런 현상도 찾아볼 수 없었다. 탑 내부로 들어서는 입구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바깥으로 몬스터가 쏟아지는 일도 없었다.

도대체 저것은 무엇일까.

각국의 게이트 연구자들, 헌터 협회, 탐험 헌터들이 탑에 대해 조사하였지만 이렇다 할 수확 없이 시간이 흐른 지도 어언 5개월.

인류는 그것의 진짜 명칭을 알게 되었다.

[지구와 네뷸러의 동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곧 국가별 채널이 생성됩니다.]

전 세계 각성자 앞에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른 시스템창은, 저 거대한 탑을 ‘네뷸러(Nebula)’라 칭하는 것처럼 보였다.

시스템창은 이어서 떠올랐다.

[시스템에 등록된 개체 중, 글로벌 랭킹 상위 12인을 판별합니다. 이 작업에는 다소 시간이 소요됩니다.]

[남은 시간 48:00:00]

──그리고 현재.

“오빠, 3분 남았어.”

소파에 앉아 있던 제림이 제휘를 향해 말했다. 은하의 오피스텔에서 돌아온 뒤, 저녁 식사 준비를 하던 제휘가 앞치마를 입은 채 소파로 다가왔다.

TV 스피커로부터 방송 MC와 게스트의 격양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남은 시간 2분대에 접어들었는데요. 시스템이 말한 글로벌 랭킹 판별. 교수님은 이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아마 거기에 포함된 12인이 탑에 공식적으로 입장할 수 있는 자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들을 선두로 탑 공략을 시작할 수 있게 될 가능성이 높겠죠.」

「그럼 게이트처럼 내부로 진입해 클리어 할 수 있게 되리라는 말씀이실까요?」

시스템이 말한 글로벌 랭킹 상위 12인의 개체 판별. 사상 최초, 시스템 공인 랭킹 시스템에 대한민국 국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지구인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상황.

물론 현대에 활동 중인 헌터들에게 랭킹은 이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측정기가 부여한 등급과 헌터 기구가 판단한 근거로 정해지는 임의적인 숫자일 뿐이었다. 각성은 했지만 헌터로 활동하지는 않는 이, 재측정을 받지 않은 이, 힘을 숨기고 살아가는 이는 기존 랭킹에 포함될 수가 없었던 것.

“열두 명 중에 한국인은 몇 명이나 올라갈라나?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귤을 입 안에 쏙 넣으며 TV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제림은 힐끗 고개를 돌렸다.

잠시 소파 곁에 서 있던 제휘가 다시 싱크대를 향해 돌아가고 있었다.

“오빠, 이거 안 볼 거야? 이제 1분 남았어.”

“난 됐어.”

제휘는 짧게 답했다. 시스템 공인 랭커가 누구인가보다, 지금 당장 넘칠 듯 부글대는 냄비가 더 신경 쓰이는 모습이다.

“너도 얼른 와서 밥 먹어. 다 됐다.”

“잠깐만, 이것만 보고.”

「3초! 2초! 1초! 시간이 됐습니다! 시스템이 판별한 글로벌 랭킹권 상위 12인의 헌터! 가장 먼저 12위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자, 누구죠?」

MC의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화면 전체에 커다랗게 떠오르는 문자.

[12위 │ 《심안》]

……심안? 이명으로 보아서는 한국인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적어도 동양권 헌터인 것만은 분명했다.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이명인 것 같기도 하고.’

정말 한국 헌터인가? 하지만 번쩍 떠오르는 얼굴은 없었다. 긴가민가한 기분으로 제림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그것은 화면에 보이는 MC와 게스트도 마찬가지였다.

「심안? 심안이라 하면…….」

「아! 바로 이어서 11위가 발표되는 모양이군요.」

‘심안’이라는 헌터에 대해 코멘트를 하기도 전에, 시스템창은 착실히 랭킹을 띄워 나갔다.

11위. 10위. 9위. 8위…….

기다려 주지도 않고 차례로 낯선 이명들이 화면 가득 떠오른다.

[7위 │ 《스페이스러너》]

[6위 │ 《니키타》]

[5위 │ 《뮤턴트》]

[4위 │ 《발키리》]

제림은 손에 쥐고 있는 귤도 까맣게 잊은 채 흥미진진한 얼굴로 TV 시청에 집중했다.

저 멀리서 제휘의 목소리가 들렸다.

“박제림, 와서 밥 먹으라니까.”

“아, 이것만 보고 갈게.”

제림은 제휘를 향해 휘휘 손을 내저으며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3위 │ 《백랑》]

[2위 │ 《엘리멘탈 마스터》]

“헉!”

다시 귤을 먹던 손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백랑! 한국인이다! 그것도 저 사람…….

“오빠! 오빠아!”

싱크대를 향해 휙 고개를 돌린 제림이 소리를 지르는데.

“와서 밥 먹어.”

제휘는 달그락달그락 그릇과 수저를 식탁 위에 나열할 뿐, TV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아니, 잠깐만 와 보래도? 지금 TV에 누가 나온 줄 알아?”

“관심 없다니까. 그것보다도 박제림, 그거 그만 보고 얼른 와서 밥 먹으라고 했어. 세 번 말했다.”

“아, 잠깐만. 이제 1위만 남았는데.”

“나중에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되잖아.”

“이런 건 생방으로 봐야 한다고. 그리고 나 지금 별로 배 안 고프단 말이야.”

제림의 말에 제휘는 결국 성큼성큼 걸어와 소파 앞에 척! 하니 섰다. 잔뜩 뿔이 난 얼굴로 제휘가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너 귤 까먹을 때부터 알아봤어. 내가 밥 먹기 전에 쓸데없는 거 먹지 말랬지?”

“아니, 귤 때문이 아니라…….”

“됐고, 리모컨 이리 내놔.”

“아, 오빠! 방금 오빠가 진짜 깜짝 놀랄 만한 게 나왔다니까!”

“미안하지만 뭐가 나와도 안 놀래.”

빽 소리를 지르는 여동생을 뒤로하고, 제휘가 리모컨을 들었다. 화면을 꺼 버리기 위해 휙, TV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자, 잠깐만요. 좀 이상한데요? 이거 뭔가 잘못된 것 아닙니까?」

당황한 듯한 MC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화면 가득 떠오르는 문자.

시스템 공식 글로벌 헌터 랭킹, 대망의 1위가 발표되었다.

[1위 │ 《흑염의 프린세스》]

“……!”

툭.

제휘가 손에 들고 있던 리모컨이 바닥 위 두툼한 러그 위로 낙엽처럼 떨어져 내렸다.

거실은 침묵에 잠겼다.

「그녀는 분명 1년 전에…….」

들려오는 것이라곤 스피커를 통한 MC의 얼떨떨한 목소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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