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42)화
(142/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4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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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같은 선택
2022.12.20.
은하가 뚫어 놓은 통로를 쭈욱 따라간 아연은 그녀의 말대로 그곳에서 수십 명의 부대원들을 발견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뭐야, 40명이 아닌데……?’
그 수가 얼핏 보아도 족히 100은 되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또한 은하는 부대원들 모두가 정신을 잃었다고 했지만, 아연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많은 수가 눈을 뜬 상태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 많은 인원을 어떻게 옮길지 머리를 굴리고 있던 참이었는데 아연으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개중에는 군단의 7인 중 하나라든지 어디서 본 듯한 얼굴도 더러 섞여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 여긴 어디야?”
“몸에 힘이 안 들어가는데, 윽, 머리가…….”
“뭐야, 이거?! 뿌리 때문에 발을 움직일 수가 없어!”
나무뿌리에 온몸이 얽혀 있는 그들이 패닉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우선은 그들을 속박하고 있는 뿌리부터 제거해야 이동하든 말든 할 텐데…….
아연이 휙 하고 양손을 들자 열 손가락 사이사이에 검은 표창이 생겨났다.
휘리릭!
공중을 향해 대충 던진 표창들이 공중에서 자유자재로 궤적을 바꿔 갔다. 그것들은 눈 깜짝할 새 헌터들을 속박하고 있던 나무뿌리를 파바밧 잘라 냈다.
갑작스러운 해방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뜬 헌터들을 향해, 아연은 심드렁한 얼굴로 짝짝 손뼉을 쳤다.
“어서 일어나요. 이동해야 함.”
그러자 많은 쌍의 시선이 아연을 향했다.
잠시간의 정적. 곧 그것은 누군가의 외침으로 와장창 깨져 버렸다.
“와아! 괴도다!”
“괴도가 우릴 구하러 왔어!”
돌연 아연의 미간이 불편한 듯 좁아졌다.
‘……엿 됐네.’
그 후 아연은 아직까지 기절 상태인 소수의 헌터를 체인 로프로 꽁꽁 묶고, 나머지 인원을 이끌어 통로를 지났다.
반짝이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부대원들을 통솔하는 것도, 은하가 말한 뿌리로 향하는 구멍을 찾는 것도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다만 문제는 뿌리로 이동한 이후였다.
‘뭐야, 이거.’
여기도 ‘순환의 줄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헌터가 굵은 나무줄기와 잔뿌리에 온몸이 휘감긴 채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
S급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나 보다. 아연은 군단의 주인인 트릭스터 송민주를 발견했다.
“야, 꼬맹이.”
운동화 끝을 살짝 들어 바닥의 작은 몸뚱이를 퍽퍽 쳐 대도 민주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연은 허리춤에서 단도를 빼내 민주를 휘감은 나무뿌리들을 모조리 잘라 냈다.
“일, 어, 나!”
그리고 민주의 귓가에 빽 소리를 질렀다.
결국 정신을 잃었던 민주가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약 3분 뒤, 아연이 그를 거꾸로 들어 빨랫감 널 듯 탈탈 털어 버린 이후였다.
“진짜 미친 사람인가.”
눈을 뜬 민주가 흙바닥에 처박은 이마를 쓸며 가장 먼저 한 말이 이것이다.
“어허, 이놈이! 살려 주셔서 감사하다고 돈은 주지 못할망정 말버릇 보소.”
“그건 고맙긴 한데.”
“응, 1억.”
이후 아연은 민주와 함께 부대원들을 한데 모았다.
그 과정에서 민주는 흩어져 있던 군단 패밀리와 합류했고, 이후 늑대의 부길드장 하균과 불멸의 성윤, 재민과의 합류도 성공했다.
‘어디 보자.’
아연은 도르륵 눈을 굴려 주변을 확인했다.
‘순환의 줄기’에서 구조한 40여 명의 인원, 그리고 뿌리 부근에 쓰러져 있거나 부상을 입은 나머지 인원을 모조리 모았는데도 그 수는 고작 2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게 전부야?”
아연이 물었고,
“그런 것 같은데.”
하균이 대답했다.
[게이트 리셋을 위한 준비 작업을 실행합니다.]
[ - - - Loading - - - ]
그들 앞에 푸른 시스템창이 나타난 것은 그 직후였다.
[경고! 치명적인 오류 발견.]
[원활한 작업을 위해 게이트 전체 시스템 방벽을 일시 해제합니다.]
[리셋까지 예상 잔여 시간 ▶10:00]
그에 이어서 남쪽 부근에 거대한 소용돌이 형태의 출입구가 활성화된 것이 보였다. 시스템에게 있어서 이것은 오류 현상이겠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어쩌면 유일무이한 탈출 기회였다.
이것은 보스를 해치우거나 핵을 입수하는 등의 정상적인 과정으로 오픈된 출입구가 아니었다. 따라서 다수의 인원이 한 번에 탈출하면 또 다른 오류 현상이 겹쳐서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직 10분.
하균과 아연 그리고 민주는 짧은 회의를 거쳐 전투 불능 상태인 인원부터 차례로 탈출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차근차근 200여 명 중 절반 정도를 탈출시키는 것에 성공했을 무렵, 마에스트로 이준이 홀로 뿌리로 복귀했다.
은하와 시우가 뿌리에 합류한 것은 그 이후,
[게이트 리셋을 위한 준비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리셋까지 예상 잔여 시간 ▶6:34]
잔여 인원이 50명도 남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트릭스터 그리고 괴도와 이야기를 나눈 결과, 이 작전은 여기서 종료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여 부대원들을 탈출시키고 있었습니다.”
하균은 시우에게 간략히 현 상황을 보고했다.
“언니, 저 시키는 대로 했어요! 잘했죠?”
아연은 은하에게 쪼르르 달려가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댔다. 시간이 촉박한 만큼 자세한 보고는 불가능했지만 최소한의 정보 전달은 필요했다.
“잠깐 기다려.”
그 와중에 누군가 목소리를 내었다.
“제천대성께서는? 사부가 아직 오지 않았는데.”
불멸의 2인자, 허재민이었다.
그의 물음에 대답을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은하도, 시우도, 이준 역시도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반응에서 무언가를 감지한 것일까, 재민의 눈빛에 덜컥 불안함이 깃들었다.
“젠장, 사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가 자리를 박차고 역주행을 시도하려던 때였다.
탓!
같은 불멸 길드의 3인자, 도성윤이 그를 막아섰다.
“무슨 짓이냐, 도성윤.”
“너야말로 무슨 짓이야? 남은 시간 안 보여? 이제 2분 후면 출입구가 닫힐 거다. 우선 여길 나가야 해.”
“수색하지 말라는 거냐?”
사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도? 재민이 물었다.
“그래.”
성윤은 나지막이 입을 연 순간이었다.
터억! 재민이 그의 멱살을 잡았다.
“너……!”
“…….”
멱살을 휘어 잡힌 와중에도 성윤의 굳은 얼굴은 무너지지 않았다.
언노운 게이트에 진입하기 직전, 그의 사부가 많은 부하 중 성윤만을 불러냈다.
‘도성윤, 잘 들어라. 네게 미리 해 둘 말이 있거든. 남해안 게이트 안에서 만일 내게 무슨 일이 있다면 그것은 로제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사부, 그게 무슨─.’
‘무슨 말인지 이해했을 거라 생각한다.’
유환은 긴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특히 허재민, 그놈은 네가 잘 간수해라. 너도 잘 알잖아? 그놈이면 분명 눈깔이 뒤집혀서 미친 소처럼 뛰어다닐 거다.’
다만 불멸 길드원 중에서도 성미가 불같기로 유명한 재민이 걱정이었는지, 유환은 그에 대한 당부의 말을 덧붙였다.
성윤은 묻고 싶었다. 사부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 왜죠? 무엇 때문입니까?
──사부께서는 불멸이, 우리가 소중하지 않은 겁니까?
그러나 성윤은 그 수많은 말들을 꾹 눌러 삼켰다. 그리고 답했다.
‘알겠, 습니다…….’
툭. 머리 위에 두껍고 다부진 손이 올라왔다.
‘고맙다.’
성윤이 스르륵 시선을 들어 재민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게 사부의 뜻이다.”
한편, 돌아오지 않은 것은 제천대성뿐만이 아니었다.
“매화 자매님, 닥터께서…….”
장미 길드의 치유 헌터이자 이번 3대 소속 인원 중 하나가 은매화를 향해 조심스레 다가갔다. 제천대성뿐만 아니라 닥터 플랜트 역시 아직까지 복귀하지 않았기에.
“수색조를 보낼까요? 아니면 제가.”
“그럴 필요 없다.”
은매화는 굵은 금이 번져 가는 천장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분은 돌아오지 않으실 거야.”
쿠구구구…….
지면이 주저앉기 시작했다.
[게이트 리셋을 위한 준비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리셋까지 예상 잔여 시간 ▶4:47]
어느덧 출입구가 닫히기까지 5분도 채 남지 않은 시점, 탈출하지 못한 헌터가 아직도 20명가량 남아 있었을 때였다.
무너져 내리던 게이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새, 생흡충이야!”
누군가 외쳤다.
게이트가 무너지기 시작하며 잠시 생성이 정지된 듯싶었던 몬스터가 다시 슬금슬금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으아아악! 저리 가! 안 돼, 내 폰! 녹화라도 해 둬야 하는데……!”
비명의 주인은 BJ 혀기월드, 남혁이었다. 이 와중에도 휴대전화를 꼭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은 직업 정신이 투철하다 못해 징글징글할 수준이었다.
뿌리에 휘감겼다 정신을 차린 이후, 남혁 역시 마력이 바닥나 버린 탓에 고유 능력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더는 방송을 진행할 수 없게 되었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 녹화라도 해서 너튜브에 업로드 할 생각이었다. 그걸 위해 아직까지 탈출하지 않고 버텼던 건데……!
‘부서졌나?’
남혁은 자신의 폰을 확인했다. 심하게 부서진 것 같지는 않았다. 카메라도 작동하고 있었고.
‘다행이다.’
남혁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반면,
“으윽, 이놈들 계속 오잖아?!”
“이 벌레 X끼들이……!”
출입구를 빠져나가려던 헌터 중 일부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득달같이 달라붙은 생흡충이 그들의 탈출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못 나가게 막아! 한 마리라도 유출되지 않게 해야 한다!”
“트, 틀렸어……. 스킬이 나가지 않아, 젠장!”
이미 대부분의 헌터는 체력과 마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서 있는 것이 고작인 그들에게, 달려드는 몬스터 무리를 정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마스터.”
“응.”
군단이 앞서서 전투 태세를 잡았다. 현 상태로 미루어 보았을 때 7인 중 제대로 된 전투가 가능한 것은 준환과 민주 단둘뿐일 것 같았지만─.
[게이트 리셋을 위한 준비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리셋까지 예상 잔여 시간 ▶2:33]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열린 출입구와 다시 나타난 몬스터. 이건 가장 위험한 일이었다.
비정상적으로 열린 출입구는 인간뿐만 아니라 몬스터 역시 빠져나가는 것이 가능했다. 게이트 폭주 상태가 아님에도 몬스터가 밖으로 유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소리였다.
민주가 철컥, 바주카를 장전하려던 때였다.
“……?!”
화르륵─!
시야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거센 불길이 타올랐다.
흑염. 은하의 흑염이었다.
까마득할 정도로 검은 그 불꽃은 입을 쩍 벌리더니 단숨에 몇십 마리나 되는 생흡충을 집어삼켰다.
시커멓게 타 버린 몬스터의 사체가 일제히 바닥에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민주의 눈길이 이끌리듯 그녀를 향했다. 아연과 시우, 이준도 마찬가지였다.
“…….”
검은 불길을 거둬들인 은하는 가만히 제자리에 선 채 스르륵 시선을 떨구었다.
구두코 바로 앞에 떨어진 사체가 보였다. 상체를 잃고 하체만 남은 그것은 수많은 다리를 파르르 떨어 대고 있었다. 완벽한 몰살.
그러나.
키, 키이이, 키이이이……!
놈들을 쓰러트리고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등 너머에서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끝도 없는 재생성이 다시금 시작되고 있었다.
남은 잔여 시간은 약 1분. 그 안에 몬스터를 물리치고 전원 게이트를 빠져나갈 확률은? 턱없이 낮다.
‘하지만.’
셀 수 없이 많은 몬스터를 가장 빠르게 제압할 수 있으며 마지막까지 남아 핵을, 과실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자. 그런 자가 있다면…….
꾸욱.
구두로 몬스터의 사체를 짓밟은 은하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가능해.’
남은 인원을 모두 다 탈출시키고 이 게이트를 완전히 봉쇄하는 것이.
나라면.
아니, 나만이.
‘혼자 이곳에 남으면, 선배는 죽을 겁니다.’
‘이번에는, 바깥으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다시는요.’
양산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는 순간, 자신을 응시하고 있던 푸른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시우였다.
‘선배를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어요.’
‘나도 데려가 줘요, 선배.’
이제 와 은하는 생각했다.
의외로 그 말이 꽤 기뻤던 걸지도 모른다고. 그 한마디가 몹시도 충분하다고 느껴질 만큼.
“고마워, 신시우.”
팟! 팟! 팟!
주변에서 차례로 피어난 검은 불덩이가 은하의 몸 주변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게이트 리셋을 위한 준비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리셋까지 예상 잔여 시간 ▶0:59]
사늘하게 일렁이는 검은 불길 속에서, 은하는 웃었다.
“내가 말했던가?”
화아아악!
그녀를 휘감고 있던 검은 불길이 손에 쥔 양산까지 뻗어 나가는 순간,
“차은하라고 해. 내 이름.”
“……!”
시우의 눈이 커졌다.
휘이이익!
양산을 휘감고 있던 불길이 한층 거세지고, 그에 따라 불꽃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가 점점 더 짙어졌다.
그리고.
콰지지직─!
은하는 손에 온 힘을 담아 양산의 끝으로 바닥을 강하게 찍어 눌렀다.
멀쩡한 땅이었다면 위력이 부족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금이 가 있던 땅 표면에는 이 정도로 충분했다.
지면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땅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내벽과 천장이 반죽처럼 내려앉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누나!”
“유라 씨!”
민주와 준환이 은하를 향해 불안한 듯 외쳤다. 눈치챈 것이었다. 지금 그녀가 무얼 하려는지.
“언니……!”
아연이 은하를 향해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쿠웅! 그 앞으로 두꺼운 내벽이 떨어져 내렸다.
뿌옇게 뒤덮인 흙먼지 사이 아연이, 그리고 곁에 있던 민주와 다른 이들 모두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는 순간,
우우우웅─
마치 소용돌이처럼 회전하던 게이트 출입구가 그들을 흡수하듯 이끌었다.
“아, 안 돼!”
마지막으로 아연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이윽고 최후까지 남은 것은 은하와 시우, 하균, 그리고 이준, 단 네 사람뿐이었다.
“선배!”
“도련님.”
은하를 향해 내달리려는 시우를, 하균이 붙잡았다.
“놔.”
시우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하균은 움직이지 않았다.
흑염의 프린세스…… 아니, 차은하. 과연 그녀가 남은 시간 동안 떼거리로 몰려드는 몬스터를 홀로 막아 낼 수 있을지, 그리고 이 게이트를 완전히 폐쇄할 수 있을지, 그런 것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답은 하나였다.
[게이트 리셋을 위한 준비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리셋까지 예상 잔여 시간 ▶0:12]
나가야 한다. 모두가 나가지 않더라도 시우만은 나가야 한다. 그는 늑대의 미래. 앞으로의 늑대를 만들어 갈 작은 주인이었다.
“놓으라고 했어.”
“용서하십시오, 도련님.”
하균은 끝까지 그를 놓지 않았다.
그러나 하균 혼자만의 힘으로 발악하는 시우를 압박하는 것은 무리였다. 고작해야 시우가 앞으로 내달리려는 것을 말리는 수준에 그쳤다. 있는 힘껏 반항하는 그를 출입구까지 이끄는 것은 도저히 무리였다.
“…….”
그 곁에서 한 사람은 굳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 세차게 흔들리는 눈동자.
마에스트로 백이준이었다.
방금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차은하’라고 했다.
[리셋까지 예상 잔여 시간 ▶0:10]
진짜 이름을 알고 있었던 건가?
[리셋까지 예상 잔여 시간 ▶0:09]
그렇다면 왜 그때는 대답하지 않았지?
[리셋까지 예상 잔여 시간 ▶0:08]
아니야. 아닐 거야. 늘 아니었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도 절대로…… 그럴 리 없어.
[리셋까지 예상 잔여 시간 ▶0:07]
이준은 휙 등을 돌렸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입구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선배!”
홱!
하균을 밀쳐 낸 시우가 은하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생흡충이 들이닥치는 방향을 향해 돌아서 있던 은하가 힐끗 시선을 돌렸다.
“……조금 뜨거울 거야.”
멈칫.
출입구로 향하고 있던 이준의 발이 멈추었다. 쿵.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감각이 들었다.
‘방금…… 뭐라고…….’
돌처럼 굳어 버린 목을 삐걱삐걱 꺾어, 천천히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시우를 응시하고 있던 그녀의 새까만 눈이 잠시 이곳을 바라본 것 같았다.
그리고 웃는 듯했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이준이 잘 알고 있는 그 미소로 은하는 시우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흉터는 안 질걸.”
“……!”
핏기 하나 느껴지지 않는 새하얀 손이 시우를 향한다. 곧 그 손바닥 위로 자잘한 불꽃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그녀가 뭘 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다.
이준은 알 수밖에 없었다.
[리셋까지 예상 잔여 시간 ▶0:01]
퍼어어어엉─!
[게이트 재생을 위한 리셋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일시 해제되었던 시스템 방벽이 원상 복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