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41)화 (141/306)


#141. 당신 곁에
2022.12.19.


스르륵…… 스르륵…….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로제의 가운이 힘없이 바닥을 쓸었다.

집게 핀으로 늘 반듯하게 정돈되어 있던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있었고, 화상을 입은 온몸이 따끔거리다 못해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쓰라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하아, 하아…….”

투욱.

바닥에 주저앉은 로제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축축한 흙바닥 위에 두 손을 가져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주르륵 아래로 떨어져 시야를 가렸지만 로제는 개의치 않고 흙을 파기 시작했다.

‘딸을 살리고 싶── 과실을 이용─.’

전갈 꼬리를 가진 사내.

그를 만난 것이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로제는 그때부터 스스로를 반절쯤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말했다. ‘황금빛 과실’은 죽은 사람도 되살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그의 신빙성을 의심하기도 전에 로제는 이미 맹목적으로 변해 있었다.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너무도 많은 이가 양분이 되어 뿌리 아래로 사라진 뒤였던 것.

멈추고자 했던 적도 있었다. 정신을 오염당했다고는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시간이 지나며 로제는 그녀만의 제어 방법을 터득했고, 어느 정도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멈추려면 멈출 수 있었다. 그럴 수 있는 기회는 충분히 많았다.

하지만 로제는 결국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 이 결말에 이르는 동안 자신의 의지가 전혀 없지는 않다고 인정했다. 용서를 받을 자격도, 생각도 없다는 것도 말이다.
이것은 그저 그녀의 선택이 빚은 결과일 뿐이었다.

“나래야…… 나래야…….”

딱딱한 흙과 자갈로 이루어진 땅은 맨손으로 파고 또 파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사실 로제는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이 땅 아래, 어디에도 나래는 없을 거라는 것을.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을. 다시는 딸을 만나지 못할 것을.

그러나 로제는 멈출 수 없었다.

멈추기에는 너무 멀리까지 와 버렸고, 이제는 어떻게 멈춰야 할지도 잘 몰랐다.

그러니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여태 해 왔던 일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릴 것 같아서.

도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양심과 책임에서 눈을 돌리고 스스로를 절벽으로 내몰았던 것인가. 무엇을 위해서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묵시해 왔던 것인가.

로제에게 답은 언제나 하나였다. 딸.

그러나 지금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스스로가 벌인 짓에 과연 의미가 있었을까.

“…….”

문득 땅을 파내던 손이 멈추었다.

─사실 아무 의미도 없던 것이 아니었을까.

붉은 이채를 띤 그녀의 홍채 위로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눈물방울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손등 위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다. 그럴 수는 없다. 온 뺨을 눈물로 적신 로제는 다시 땅을 더듬었다.

사가각, 사가각.

자갈에 살이 깊게 파이고 심한 화상을 입은 피부 위에 더러운 흙이 묻었다. 손톱이 빠지고 손가락 감각이 없어진 와중에도 끝까지, 끝까지 매달리듯 땅을 파냈다.

로제의 눈이 점점 더 선명한 붉은빛을 띨수록 흙을 파내는 그녀의 손길은 악착같이 변해 갔다.

* * *

툭, 투둑……!

갈라진 천장으로부터 돌 파편이 우박처럼 떨어져 내렸다. 유환은 그 사이를 정신없이 내달렸다.

‘그럼에도 넌, 그녀를 구할 건가.’

갈라지는 공기 사이로 마에스트로의 목소리가 훅 다가왔다.

‘어리석구나, 제천대성.’

위쪽에서 떨어진 돌 파편들이 유환의 머리를, 어깨를, 등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그러나 그따위 것들은 단단한 그의 신체에 일말의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유환은 달렸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위태한 게이트 내부를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이윽고 발견했다.

“…….”

우뚝.

유환이 걸음을 멈추었다. 사나운 기색으로 오르락내리락하던 그의 가슴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나래야, 엄마야. 엄마가 왔어…….”

로제는 걸레짝이 된 손으로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머리는 산발에 초점이 없는 눈으로 중얼중얼 혼잣말을 해 대는 모습은 멀리서 보아도 비정상적이었다. 그러나 유환에게는 아니었다.

“로제.”

유환은 로제에게 다가갔다.

로제의 붉은 눈이 힐끗 이쪽을 향했다.

“유환, 왔구나. 나래가 여기 있어.”

로제는 초점이 없는 눈을 곱게 휘며 말했다. 이윽고 그녀는 땅에 철퍼덕 귀를 갖다 대며 몹시도 기쁜 듯 입을 길게 찢어 웃었다.

“안 들려? 여기야, 여기. 나래가 날 부르고 있잖아.”

들어 봐, 응?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로제가 유환을 올려다보았다. 초점을 잃어버린 그녀의 눈은 선명한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응, 그래. 엄마가 여기 있어.”

로제는 유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아가, 춥지? 추웠지? 어서 집으로 가자.”

사가각, 사가각…….

화상으로 너덜너덜해진 손. 흙과 피가 뒤섞여 질척하고 지저분한 그 손으로 로제는 계속하여 땅을 파내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주시하던 유환이 복부에 흡 하고 힘을 주었다.

“로제─!!”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필드 내벽 위로 실금이 후드득 번졌다. 화들짝 놀란 로제가 유환을 돌아보았다.

“유, 환……?”

조금은 효과가 있었던 걸까, 그녀의 눈에 맺혀 있던 붉은 기가 조금은 옅어졌다.

유환은 굳은 얼굴로 불끈 주먹을 쥐었다. 로제가 숨을 삼키며 눈을 질끈 감은 순간,

[12신수 ‘하늘을 짊어진 원숭이’의 권능 ▶ ‘긴고아’를 일시 해제하시겠습니까?]

“해제한다.”

채앵!

금속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그를 중심으로 거센 돌풍이 일었다.

[12신수 ‘하늘을 짊어진 원숭이’의 권능 ▶ ‘긴고아’ 해제 시, 수련도에 따른 추가 버프가 주어집니다.]

[공격력이 추가로 93.89% 상승합니다.]

‘최대 출력.’

[일시적으로 수련도를 무시하고 출력치를 최대로 높입니다.]

[경고! 지속 시간이 지나면 당신은 ‘탈진’ 상태에 빠집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확인되었습니다.]

[3초간 공격력이 120% 상승합니다.]

우두둑!

뼈마디가 살벌하게 꺾이며 꽉 쥔 주먹 위로 혈관이 솟아올랐다. 힘껏 팽창한 온몸의 근육 위로 파지직, 붉은 전류가 튀는 순간 그의 눈이 번뜩 매섭게 빛났다.

“……아.”

로제가 짧은 신음을 흘림과 동시에,

콰과과과광─!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 그곳을 덮쳤다.

그렇지 않아도 손상된 게이트 상태를 따졌을 때 이것은 치명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딴 것은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눈앞을 덮쳤던 흙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로제는 발견했다. 그들 앞에 뻥 뚫려 버린 거대한 구멍을. 그것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나락이었다.

그 나락 앞에서 유환은 로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로제는 서서히 시선을 위로 옮겼다.

그의 손을 타고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흙과 돌 조각.

해어져 버린 도복 사이 훤히 드러난 복부.

피에 전 붕대.

그리고 저를 똑바로 응시하는 눈동자가 보였다.

로제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어디, 로……?”

“어디든. 네가 가고자 하는 곳.”

삐죽삐죽 아무렇게나 자란 턱수염 위, 유환의 입술이 씩 곡선을 그렸다.

멍하니 그를 응시하던 로제는 천천히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휘리릭─

두 사람은 함께 나락으로 몸을 던졌다.

아래로, 또 아래로 끊임없이 추락하며 두 사람은 같은 어둠을 보았다.

쿠웅!

그들은 비로소 나락의 끝에 함께 다다랐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곳에 나래는 없었다. 찬란히 빛나는 황금빛 과실도 없었다. 그러나 그 대신,

“……정말, 바보 같은 사람.”

유환은 그 어둠 속에서 겨우 새하얀 미소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이제 알았나.”

유환이 픽 웃으며 받아쳤다.

뜨끈한 액체가 전신을 뒤덮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바닥에 몸이 처박히는 순간, 가시처럼 솟은 나무줄기가 배를 뚫어 버린 듯했다.

잔인하고 포근한 혈향이 코에 닿았다. 그것은 이 짙은 어둠 속 두 사람을 고요히 품었다.

땅에서 뻗어 나온 굵은 나무줄기는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의 팔처럼 두 사람을 옭아맸다.

그들을 휘감은 뿌리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두 사람을 검고 축축한 땅 밑으로 이끌었다.

‘사부.’

유환은 자신이 뒤로하고 왔던 존재들에 대해 이제야 하나둘씩 떠올려 보았다.

불멸 녀석들을 보며 늘 책임감 없는 놈들이라 혀를 찼지만 정작 그런 놈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유환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주먹이 그려진 빨간 깃발이 눈앞에서 희미하게 펄럭이는 듯했다. 응접실…… 아니, 술 창고에 꼭꼭 숨겨 두었던 값비싼 술들도 떠올랐다.

우우웅─

문득 시야 한구석에서 옅은 빛이 아슴푸레 어둠을 밝혔다. 로제가 손을 뻗어 유환을 치유하고 있었다.

“……술이 마시고 싶군.”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린 유환은, 자신을 치유하는 로제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나래를 찾고 집으로 돌아가면, 같이 한잔할까. 예전처럼.”

스르륵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있던 보랏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살짝 입술을 벌린 채 유환을 빤히 응시하던 로제가 이내 살포시 웃었다.

“응, 와인이 좋겠어. 97년산.”

네 술 창고 가장 아래에 숨겨 둔 그거 말이야.

슈우욱…….

어둠을 가까스로 밝히고 있던 빛이 잦아들었다. 이후 무언가 차갑고 부드러운 감촉이 뺨에 닿은 듯했다. 그녀의 손이었다.

“그래, 그걸 잊고 있었군.”

유환은 웃었다.

천천히, 천천히 눈이 감겨 왔다.

어둠이 뒤덮인 그곳은 하나도 춥지 않았다.

그녀가, 그녀만이 그에게는 봄이었으니.

* * *

은하는 시우와 함께 통로를 지나며 뿌리 부근으로 향하고 있었다.

‘돌아갈 곳이 왜 없습니까.’

“…….”

새까만 눈을 들어 앞서 걸어가는 시우의 등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시우는 은하를 따라 이곳에 남겠다고 했고, 은하는 결국 그와 함께 뿌리로 이동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정말로 이곳에 남을 작정인 듯 보였으니까.

‘하지만.’

문득 은하가 걸음을 멈춘 순간이었다.

쿠르르르…….

지면이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게이트가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는 것일까? 시우 역시 걸음을 멈추고 눈매를 세워 주변을 확인했다.

아직 모든 과실을 파괴하기 전이었다. 그러니 이건 게이트의 소멸 혹은 봉쇄 현상이라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누군가 게이트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혔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꽤 엄청난 위력으로.

“선배,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시우가 말했다.

은하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힐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지나쳐 왔던 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휘오오─

통로 저편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미약한 혈향을 품고 있었다.

사람의 것이었다.

‘닥터 플랜트……?’

은하의 눈매가 좁아졌다.

“선배.”

앞서 걸어가던 시우가 재촉하듯 다시 입을 열었다. 은하보다 후각에 예민한 그였다. 분명 그 역시 이 혈향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시우는 굳이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어서 이 통로를 빠져나가 뿌리에 도달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

한동안 통로 너머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은하는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또각─

그리고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그로부터 약 3분 뒤.

이윽고 그들은 뿌리 부근에서 아연과 합류하는 것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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