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37)화 (137/306)


#137. 그녀가 원하는 것
2022.12.15.


“언, 니……?”

아연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대치하고 있던 유환과 이준 역시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또각─

구두 소리가 가까워졌다.

가라앉기 시작하는 흙먼지 너머로 검은 머리카락이 공중에 부드럽게 흩날리는 것이 보였다. 아연은 이전보다 조금 더 확신을 담아 외쳤다.

“언니!”

마치 그에 대답하기라도 하듯, 자욱한 연기 속 감춰져 있던 검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차은하. 흑염의 프린세스였다.

양산을 손에 쥔 은하는 재회의 기쁨을 나누기보다는 우선 주변을 확인하듯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탈출한 것이 맞는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넓게 주변을 훑던 검은 눈동자가 이번에는 자신의 손바닥을 향했다.

[신수의 요청으로 계약 내용이 일부 변경됩니다.]

[개체 재식별이 완료되었습니다. - 차은하]

“…….”

손을 쥐락펴락하던 은하가 이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달라진 감각은 없었다.

고양이는 계약 내용을 임의로 변경하여 은하에게 이름을 돌려주었다.

그것이 일시적인 것인지 영구적인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런 것보다 숨겨진 필드 ‘순환의 줄기’를 감싸고 있던 시스템 방벽을 박살 내는 일이 우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은하는 탈출하는 것에 성공했다.

손바닥에서 시선을 든 은하는 다시 한번 주변을 확인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저를 향해 눈물을 흩뿌리며 달려오는 아연, 그리고 이곳을 멍하니 응시하는 시우였다.

조금 더 시선을 들자 압도적일 만큼 거대한 여신상이 보였다. 은하의 시선에 마지막으로 닿은 것은 그 여신상 아래 마주 보고 선 유환과 이준…… 그리고 로제였다.

짧은 순간 은하는 이준과 눈이 마주친 듯했다.

“……너.”

여간해서는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던 이준이 지금만큼은 조금…… 아니 꽤 많이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를 향해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려던 은하는 돌연 코앞까지 다가온 아연에 의해 저지됐다.

“언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난 진짜 언니가 죽었을 줄 알고…… 아니, 그럴 리가 없다는 건 알지마안……!”

아연은 콧물을 킁, 들이켜며 투정하듯 은하의 어깨를 투닥투닥 두드렸다.

“언니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어떡하나 얼마나 걱정했는……!”

“아연아, 저 너머에 사람들이 있어. 40명 정도. 다들 정신을 잃은 상태야. 우선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해.”

은하는 아연의 말을 끊고 자신이 나타난 방향을 가리켰다. 시스템 방벽을 부숴 버리긴 했지만 언제 다시 초기화될지 모르는 일.

은하에게 반쯤 매달려 있던 아연은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시선을 던지며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사람들이라뇨?”

“뿌리 부근에서 생흡충을 상대하고 있던 부대원들. 그들은 그냥 저대로 내버려 두면 안 돼. 내가 뚫어 놓은 통로도 언제 닫힐지 모르거든.”

은하는 아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부탁해도 될까.”

은하의 부탁은 막연했다. 또한 비겁했다.

그런 눈빛을 하고 부탁을 하면 상대가 거절하기 쉽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직 상봉의 감동을 다 나누지도 못했는데.’

아연은 삐죽 입을 내밀었다.

‘그래도…….’

그러다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뭐, 부탁이 막연하면 어떻고 비겁하면 어떤가. 우리 언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진정한 파트너라 할 수 있을 것.

“돌아가면 닭발 10단계 맵기에 디즈니 정주행 콜?”

그녀의 물음에 은하의 입꼬리 역시 희미하게 올라갔다.

“콜.”

차라랑…….

아연의 주변으로 사슬이 부딪치는 금속음이 옅게 들려왔다. 그녀의 몸을 둘러싸고 구불구불하게 솟아오르는 그것은 체인 로프(Chain rope). 말 그대로 쇠사슬로 된 밧줄이었다.

보통은 몬스터를 속박하거나 크기가 큰 전리품을 옮기는 데 주로 사용했지만…… 용도라는 것은 쓰기 나름 아니겠는가.

‘빨리 다녀와야지.’

속력을 내야겠다. 아연은 혹시나 바람에 날아갈 일이 없도록 야구 모자를 꾹 깊게 눌러썼다.

“여기로 데리고 오면 돼요?”

“아니. 이곳의 여파가 닿지 않도록 최대한 아래로. 처음 우리가 있었던 뿌리 부근.”

……이곳의 여파?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뭐 어쨌든 아래로 데리고 가란 거지?

아연은 가볍게 스트레칭 하여 다리를 풀기 시작했다. 은하는 그런 아연을 보며 덧붙였다.

“아래로 향하는 통로는 내가 만들어 뒀어. 조금만 가면 보일 거야. ……할 수 있지?”

끙차.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오른 아연이 씨익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당빠죠.”

휘이이익─!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연은 마치 연기처럼 사라졌다. 남은 것은 사슬이 맞부딪히는 희미한 금속음뿐.

“……선배.”

아연이 사라진 뒤 시우가 다가왔다. 푸른 눈이 그녀를 재빨리 훑었다. 외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시우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저 너머에 부대원들이 있다는 말이요.”

“그래.”

은하의 대답에 시우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뻥 뚫려 버린 내벽이 보였다. 방금 은하가 나타난 곳이었다.

고오오오…….

벽의 커다란 구멍은 미약하게 이곳 공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 너머의 어두컴컴한 통로는, 아마도 은하가 갇혀 있던 ‘순환의 줄기’로 연결되어 있는 듯했다. 새까만 어둠이 가라앉은 것을 보아하니 통로의 길이는 상당해 보였다.

통로를 살피던 시우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은하의 말에 따르면, 저 너머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부대원의 수는 약 40명이라 했다.

그렇다면 트릭스터와 하균을 포함한 나머지 부대원은 여전히 뿌리 근처에서 생흡충을 상대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혹시…….

“자세한 것은 나도 몰라. 하지만…….”

머릿속으로 최악을 가정하는 시우 앞에서, 은하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곳에 갇힌 덕분에 이곳이 거대한 나무고, 이 나무가 몬스터뿐만 아니라 헌터들까지 양분으로 삼고자 한다는 것은 알아냈어.”

또각─

시우를 지나쳐 한 걸음 나아간 은하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 싸움을 빨리 끝내야만 하는 이유지.”

싸움을 빨리 끝내야만 한다는 것은 시우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비단 이번 남해안 게이트뿐만 아니라 여느 게이트가 그러했다. 전투가 길어지면 지치는 것은 시스템에 의해 기계적으로 생성되는 몬스터 쪽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인 헌터 쪽이란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으니까.

“어떻게요?”

시우가 물었다.

잡배를 쓰러트리다 일정 위치 혹은 일정 타이밍에 등장하는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면 클리어가 되는 일반 게이트와는 달리, 언노운 게이트는 공략 방법이 획일화되어 있지 않았다.

만일 그것을 알았더라면 이 싸움은 끝이 나도 진즉 났을 것이다. 귀훈을 제외한 한국의 S급 헌터들을 망라한 대전투였으니까.
──하지만, 혹시 선배라면.

“방법이 있는 겁니까?”

시우는 다시 한번 물었다.

은하의 대답은 늘 그러했듯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선뜻 돌아왔다.

“방법이랄 것까지는 아니고. 말했잖아. 이 게이트는 나무라고.”

은하는 서서히 시선을 들었다. 이름 모를 거대한 여신상과 눈이 마주친 듯했다.

“그냥 태워 버리면 돼.”

지금까지의 일로 유추해 보았을 때 이 나무는 높은 확률로 ‘생명’을 원동력으로 삼고 있었다. 그것이 재생을 위한 것인지 소생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든 답은 하나.

그 원천마저 통째로 태워 버리는 것.

다행히도 은하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 또한 헌터들의 구조는 아연에게 부탁해 두었다. 이곳에 있는 것은 유환, 이준, 시우, 로제, 그리고 은하까지 총 다섯 명.

──즉, 사정을 살필 필요는 없다는 소리.

파앗! 은하의 양어깨로 검은 불꽃이 피어났다. 누군가가 말릴 새도 없었다. 그것은 거침없이 앞으로, 사방으로 뻗어져 나갔다.

콰과광─!

사방으로 작렬하는 흑염에 필드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세고 맹렬한 그녀의 흑염은 나무 구조로 된 이 필드뿐만 아니라 그곳의 거대 여신상마저 집어삼켰다.

쩌적쩌적…….

흑염에 집어삼켜진 여신상에 선명하게 금이 일기 시작했다. 이마에서 시작된 빗금이 여신의 얼굴을 갈라 목에 닿았다. 이윽고.

투두둑…… 콰아앙!

여신의 목이 바닥을 향해 굉음을 내며 떨어져 내렸다.

누군가가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 안 돼!”

슈우우우욱─!

찰나의 순간이었다.

금이 간 여신상 주변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양의 나뭇가지가 마치 거미 다리처럼 뻗어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송곳처럼 필드의 벽, 천정, 그리고 바닥을 뚫었다.

콰직! 콰지지직!

쿠구구구…….

필드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선배!”

천정이 부서지기 직전, 시우는 흑염을 쏘아 대고 있던 은하를 향해 팔을 뻗었다.

* * *

“…….”

은하는 서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신상의 파편으로 추정되는 돌덩이들이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고, 아직도 검은 불길이 묻어 있는 나무 조각들이 이곳저곳에서 타닥타닥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들이 서 있던 필드 전체가 무너져 내린 것이다. 무차별적으로 필드를 파괴하던 흑염, 그리고 여신상 주변에서 뻗어 나온 알 수 없는 나뭇가지 탓에 내벽이 더는 버티지 못한 듯했다.

‘상관없어.’

어차피 박살 낼 생각이었다. 공간이 무너져 내린 것은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무덤덤한 눈빛을 한 은하 곁에 또다시 팟! 검은 불덩이가 나타났다. 그 순간.

“선배, 다친 곳은 없습니까?”

곁에서 들리는 목소리. 시우였다.

그들이 있던 필드가 무너져 내리면서 다들 뿔뿔이 흩어진 줄로만 알았는데……. 흑염을 쏘아 올리려던 은하가 움직임을 멈추고 힐끗 그를 돌아보았다.

시우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은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고도 없이 게이트 전체를 박살 내 버리다니 무모하다고 할지,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그나마 이 게이트가 목조 형식이어서 다행이었다. 만일 콘크리트였다면 그들 모두 삶은 감자처럼 으깨지고도 남았을 테지만.

같은 자리에 있었던 제천대성이나 마에스트로, 그리고 닥터 플랜트도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것이다. 그들 역시 S급이니 충분히 피할 수 있는 반사 신경 정도는 가지고 있다.

“난 괜찮아. 그런데─.”

은하의 새까만 눈이 시우의 왼쪽 어깨를 향했다. 그의 후드티 위로 검붉은 피가 서서히 퍼져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방금 전, 필드가 무너져 내리면서 어깨를 세게 부딪힌 모양이었다.

시우는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슬쩍 누르며 말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사실 은하 뒤로 떨어지던 여신상의 파편을 막아 내느라 입은 부상이었지만, 굳이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선배라면 그쯤 쉽게 회피할 수 있으리란 것을. 그런데도 불구하고 멋대로 몸이 움직였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서 고생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스스로도 신기했다. 굳이 몸을 던져 막아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으면서 멋대로 움직여 버린 팔과 다리가. 다친 곳 하나 없는 은하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거짓말처럼 차분히 가라앉는 가슴이.

시우는 괜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조금 놀랐습니다. 나무를 태워 버린다고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필드 전체를 통째로 날려 버릴 줄은 몰랐거든요.”

“통째로 날릴 생각은 없었어.”

은하가 담담한 어조로 덧붙였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을 뿐이야.”

확인? 시우가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은하는 주변에 무너져 내린 내벽을 양산 끝으로 가볍게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너도 봤을 거야. 필드가 무너져 내리기 직전, 여신상에서 나뭇가지가 뻗어져 나오는 거. 이것 봐. 단순히 물리적인 힘으로 파괴된 것치고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은하의 물음에 시우는 그제야 찬찬히 주변을 훑어보았다. 겨를이 없어 눈치채지 못했지만, 지금 와서 둘러보면 무너진 형태가 꽤 체계적이었다. 마치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단순히 필드가 파괴되었다고 하기보다는…….

“마치 일부러 시야를 차단하고 우리를 분산시키려는 것 같지 않아?”

“……어째서.”

은하가 하고자 하는 말을 어느 정도 파악한 시우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은하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럴 필요가 있었던 거지.”

그럴 필요가 있었다니? 시우의 푸른 두 눈에 번졌던 의문이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선배, 무언가 눈치챈 것이 있다면 알려 주세요.”

“우리가 지금 들어온 언노운 게이트, 그러니까 이 거대한 나무는 ‘생명’을 원동력으로 삼고 있어. 내가 제단을 통해 진입했던 ‘순환의 줄기’라는 필드는, 생명체를 양분으로 흡수하고 있던 일종의 소화 기관이었고.”

‘순환의 줄기’에서 보았던 풍경을 떠올리는 듯, 은하는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어 갔다.

“그곳에는 몬스터뿐만이 아니라 헌터들도 함께 쓰러져 있었어. 아마, 이 거대한 나무를 유지하는 데에 몬스터가 가진 ‘생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거겠지. 하지만 그곳에 있었던 모든 헌터가 나처럼 몬스터로 인식되지는 않았을 거야.”

은하의 말에 시우는 생각에 잠겼다.

이 게이트 자체가 살아 있는 거목이라면, 양분이 필요해진 나무가 헌터들을 줄기 부근으로 끌어들였을 가능성은 없나?

‘……아니.’

뿌리 부근에서 꽤 오랫동안 생흡충을 상대하며 시우는 그런 광경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또한 관련한 보고 역시 들어오지 않았다. 만일 그런 현상이 목격되었다면 진즉 각 부대에서 화두에 올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헌터들 역시 거대 천칭 ‘영면의 제단’을 통해 줄기 부근으로 이동한 것일까?

그것도 가능성이 낮다. 애초에 신전에 진입한 것은 은하와 시우를 포함한 S급 5명뿐. 그중 시스템이 몬스터로 지목한 은하만이 천칭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줄기로 통하는 출입구가 그 천칭 말고도 어딘가에 또 존재할 가능성이 높았다. 헌터들은 그 출입구를 통해 은하처럼 줄기로 떨어진 것.

줄기로 향하는 출입구가 함정처럼 곳곳에 숨겨져 있지 않는 이상…… 답은 두 가지.

헌터들이 스스로 그곳으로 향했거나,

혹은 누군가가 그들을 그곳으로 내몰았거나.

‘설마 선배가 확인하고 싶다고 했던 건─.’

눈빛을 바꾼 시우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

“…….”

돌연 주변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은 듯한 감각이 들었다.

그녀의 말이 진실이라면…… 도대체 누가?

시우는 돌처럼 가만히 굳은 채 이곳에 함께 진입했던 이들의 면면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몇백이나 되는 부대원들을 모조리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 그자가 이 게이트의 보스인 겁니까?”

혹시 인간 모습을 한 ‘진짜’ 몬스터가 우리 중에 섞여 있었다는 소리일까.

“그건 알 수 없어. 정체도, 목적도 지금으로서는 불확실해. 하지만…….”

말끝을 흐린 은하는 어딘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시우의 푸른 시선이 은하를 쫓아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

풀어 헤친 와인빛 머리카락, 너덜너덜한 차림새의 로제를 발견했다. 그녀 역시 게이트가 무너지며 제천대성과 떨어진 모양이었다.

시우와 은하와는 달리, 로제의 꼴은 처참했다. 평소 주름 하나 져 있지 않던 백색의 가운은 이곳저곳에 불똥이 튀어 구멍이 나 있었고, 재에 새까맣게 뒤덮인 얼굴은 물론이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양손에는 화상 자국이 선명했다.

‘설마, 선배의 흑염에……?’

시우가 힐끗 은하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선배는 흑염의 자신의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었다.

마치 자신의 손발처럼 자유자재로 흑염을 다루는 그녀가, 사람을 공격하지 않게끔 조절하는 일에 실수를 범했을 리는 없었다. 물과 얼음을 다루는 시우도 가장 먼저 배웠던 것이 바로 ‘통제’였다.

즉 로제가 직접 흑염에 몸을 던지지 않는 이상, 흑염이 먼저 그녀를 덮쳤을 리는 없다는 소리였다.

‘……아니.’

머릿속으로 가정을 이어 가던 시우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타오르는 검은 불길을 향해 스스로 뛰어들었을 리가 없을 테니까.

만일 그랬다고 한들, 로제는 한국 최정상의 치료 헌터였다. 스스로의 몸을 치유하지 않고 저 지경이 될 때까지 이 폐허를 헤매고 있을 이유가 없을 것.

하지만 그러한 추측은 곧 빗나가게 되었다.

또각─

은하는 로제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혹시.”

쉬이익…….

은하가 손바닥을 펼치자 그 위로 밝은 빛무리가 작게 소용돌이쳤다. 이윽고 은하의 손바닥 위에 나타난 것은,

“이걸 찾고 있어?”

찬란한 황금빛을 머금은 과실이었다.

그 과실이 어떤 아이템인지, 어디서 난 것인지 알 리가 없는 시우는 의아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발견했다.

“……!”

찢어질 듯 커진 로제의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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