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36)화 (136/306)


#136. 드러나는 진실
2022.12.14.


“뭐, 뭐야, 도대체?”

당황한 아연이 눈을 재빨리 깜빡였다. 자신이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인지 의심이 갔다.

그러나 몇 번이고 눈을 깜빡여도 눈앞의 광경은 변하지 않았다. 마에스트로가 당장이라도 죽여 버릴 듯 공격하고 있는 것이었다. 닥터 플랜트, 로제를 말이다.

‘왜?’

앞뒤 상황을 알 리가 없는 그녀로서는 당혹스러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진짜 미친 건가?’

아연은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언니에 이어서 닥터 플랜트마저 공격하다니. 아무리 미국인이라고는 해도 한때는 한국인이었을 텐데 왜 저러는 거야?

한편 시우 역시 눈앞의 광경이 당혹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최대한 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푸른 시선을 들어 재빨리 주변을 훑었으나, 이 주변에는 힌트가 되어 줄 만한 어떠한 흔적도 없었다.

“허억…….”

로제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꼴깍 숨이 넘어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일단은 상황 파악보다 마에스트로를 말리는 것이 우선일 듯했다.

쩌저적…….

시우의 손날 형태를 따라 얼음이 날카롭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시우가 이준을 향해 얼음 파편을 날리기 바로 직전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쿵!

갑작스레 나타난 거대한 인영이 로제와 이준 사이를 비집고 섰다.

─제천대성 유환이었다. 그도 이곳에 온 것을 보니 ‘선택의 천칭’에서 이쪽으로 순간 이동한 것이 틀림없었다.

‘역시 선배만…….’

시우는 말없이 손날을 휘둘러 가볍게 공중을 갈랐다. 그러자 그곳에 붙어 있던 얼음이 마법처럼 사라졌다. 이제는 제천대성이 왔으니 굳이 이준을 말릴 필요가 사라진 탓이었다.

“대답해라, 마에스트로.”

차갑게 가라앉은 유환의 목소리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분노가 느껴졌다. 시우는 힐끔 눈을 돌려 그의 옆모습을 확인했다.

그가 닥터 플랜트와 가까운 사이라는 것은 한국 헌터계에 몸을 담고 있는 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붉은 눈으로 이준을 응시하던 유환은 짐승의 그것처럼 거대한 주먹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우직─

그러자 그가 손아귀에 쥐고 있던 무언가가 풍선처럼 터졌다.

팍!

유환이 그것을 바닥을 향해 거칠게 패대기쳤다. 그것은 터진 뱀의 사체. 방금 전까지 로제의 목을 조르고 있던 바로 그 뱀이었다.

이준의 잿빛 눈동자가 땅 위 뱀의 사체에 닿았다가, 이내 서서히 올라가 유환에게 닿았다. 유환의 물음에 대답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인지, 이준은 단지 짧은 한마디만을 뱉었다.

“방해하지 마라.”

검은 슈트 자락을 펄럭이며 이준이 로제를 향해 한 발자국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유환은 그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 로제 앞에 척! 팔을 뻗었다.

유환에게서 이렇다 할 표정 변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콰직, 쿠구구구……!

그의 발을 중심으로 바닥에 굵은 금이 거미줄 형태로 번져 갔다.

투두두둑…….

부서진 자갈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댔다.

붉은 눈동자가 매서운 안광을 머금고 번뜩이는 순간, 피부를 감싸던 공기가 사뭇 변했다.

유환과 그가 감싸고 있는 로제를 차례로 바라보던 이준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렇게 다가서지도 물러나지도 않고 그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것은 유환이 아닌, 시우와 아연 쪽을 향한 질문이었다.

“‘선택의 천칭’에서 나온 우리야 그렇다 치더라도 닥터 플랜트, 그녀 또한 이곳에 있다는 게 말이야.”

“…….”

“…….”

시우와 아연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들도 그 점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고 있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마에스트로가 그녀를 공격한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었다.

“……설마 하니 아우님만으로 모자라서 이제는 로제마저 몬스터로 몰고 갈 생각인 거냐?”

잔뜩 억누른 목소리로, 유환이 물었다.

“이미 사람 모습을 한 몬스터가 우리 중에 섞여 있었다. 그녀 역시 그렇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어.”

높낮이 없는 어조로 단조롭게 답한 이준은, 다시 한 걸음 로제를 향해 다가섰다.

“비켜라. 내가 확인하겠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유환은 한 발자국도 비키지 않았다.

“죽일 셈이 아닌가?”

“그래야 한다면.”

“…….”

“…….”

피부를 에워싼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감각.

‘어우, 무서워라.’

아연은 데구루루 눈을 굴리며 생각했다. 날카롭게 변한 공기에 피부가 따끔따끔했다.

이곳에 언니는 없는 것 같고…… 그냥 확 토껴 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다들 무슨 이야길 하고 있어?”

여태 조용하던 로제가 문득 입을 열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그녀의 목에는 아직도 밧줄로 세게 감긴 것 같은 새빨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참, 유환, 우리 나래 못 봤어?”

주변을 살피던 그녀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어머, 이상하네. 분명 방금 전까지 나랑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로제.”

유환이 나직이 로제를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들리지 않는 듯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어딜 간 거지? 얘도 참, 혼자 다니면 위험하다고 내가 그렇게 말했…….”

“로제─!”

돌연 유환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얼음처럼 굳어 버린 로제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제대로 보였다. 어딘가 멍하니 풀린 그녀의 초점이. 마치 어딘가에 단단히 홀려 버린 사람과 같았다.

몇 번이고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로제가 삐거덕삐거덕 붉은 입술을 열었다.

“유, 환…….”

멍하니 그를 응시하던 로제가 돌연 벌떡!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래! 우리 나래가 사라졌어!”

로제는 미친 듯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핏발이 선 눈으로 주변을 확인했다.

“우리 나래, 우리 나래가 날 기다리고 있어! 아직 여기에 있어. 아직…… 아직 여기에 있다고!”

초조한 듯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다가, 이번에는 머리카락을 쥐어뜯듯 헝클어뜨린 그녀가 번쩍 안광을 빛내며 유환을 노려보았다.

“유환, 너 때문이야…….”

유환에게 달려든 로제가 벌어진 도복 사이로 그의 가슴팍을 마구 쥐어뜯기 시작했다. 손톱을 세워 긁고, 할퀴고, 부서져라 두드렸다.

“그때 날 말리지 말았어야지! 너만 아니었으면…… 너만 아니었으면 나래를 찾을 수 있었어……!”

로제는 이내 제자리에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내 소중한 딸 나래, 우리 나래야…….

제 목을 감쌌다가, 이내 답답한 듯 자신의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유환은 그런 로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이내 서서히 무릎을 굽혔다.

“……로제, 다친다.”

그녀를 일으키려는 듯 유환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로제는 그런 유환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바닥에 주저앉아 끊임없이 통곡했다.

“…….”

“…….”

시우와 아연, 이준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닥터 플랜트…….’

시우는 로제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누가 보아도 지금 그녀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평소 그녀의 차분한 모습과는 전혀 합당하지 않는 모습에 당혹감마저 일었다.

그러나 그런 로제를 대하는 유환의 태도는 몹시 익숙하고 태연해 보였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러한 상태의 그녀를 봐 왔다는 듯이.

시우는 힐끔 시선을 들어 마에스트로, 이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우가 그러했듯 로제와 유환 두 사람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이준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 난 그녀에게 스킬을 사용했다.”

저벅, 걸음을 옮기며 이준이 입을 열었다.

“내 ‘지배’가 듣질 않더군.”

저벅, 또 한 걸음을 옮긴 이준은 주머니에 잠시 넣어 두었던 검은 가죽 장갑을 꺼내 들었다.

“둘 중 하나라는 소리야. 상대가 나보다 더욱 강하거나…….”

그것을 손에 낀 이준은 스르륵 잿빛 시선을 들어 꿰뚫듯 로제를 바라보았다.

“─이미 대상이 ‘지배’ 상태에 빠져 있거나.”

스스스…….

칼과 저울을 든 여신상 아래, 기분 나쁜 바람이 그들 사이를 훑고 지나쳤다. 정적 속에서 이준은 로제를 향해 천천히 손바닥을 펼쳤다.

시우는 눈치챘다. 이준은 그녀를 공격할 것이라고.

말려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짧게 주저했다.

닥터 플랜트는 S급 전력인 데다 귀중한 치료 헌터였다. 이준이 제아무리 선배를 몬스터로 몰고 갔다고는 하나,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닥터 플랜트마저 섣불리 공격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이준은, 로제를 공격해서 죽이려 한다기보다 뭔가 힌트를 얻고자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만이 가능한 방법으로 말이다.

그러나.

“마에스트로…….”

로제를 감싸고 있던 유환이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이준의 의도가 어찌 됐건, 유환은 그가 로제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할 생각인 듯했다.

파직, 파지지직…….

필드 전체에 돌연 검은 스파크가 튀기기 시작했다. 시우가 힐끗 시선을 들었다. 아무 말 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아연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이준의 공격? 아니다. 그러나 유환이 일으킨 기세나 스킬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언가 감지한 시우가 번쩍 고개를 쳐든 순간이었다.

콰아앙─!!!

귀를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뿌옇게 일어난 흙먼지가 시야 전체를 뒤덮었다.

“읏…….”

시우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눈과 코를 막았다. 아연도, 이준도 마찬가지였다. 유환은 거대한 상체로 로제를 감쌌다.

쿠구구구…….

낮게 땅이 울리기 시작한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어느 정도 진동이 잦아든 뒤, 시우는 팔 언저리에 파묻고 있던 시선을 들어 눈앞의 광경을 확인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필드를 뒤덮은, 검은 화염의 해일.

그리고…….

“……!”

뿌옇게 번진 흙먼지 속 선명히 반짝이는 한 쌍의 황금색 눈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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