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35)화
(135/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35)화
(135/306)
#135. 숨어 있던 적(敵)
2022.12.13.
서울특별시에 위치한 어느 호텔.
세계 헌터 비밀 연합 GIA 소속 멤버 안드레아, 통칭 포츈텔러는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서울의 하늘은 그저 평화롭기만 했다. 저 남쪽 어딘가에서 대규모 언노운 게이트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청명한 하늘이었다.
창문에서 시선을 거둔 그는 다시금 테이블 위 태블릿 PC에 시선을 두었다.
「《LIVE》 협회의 비밀 작전?! 남해안 언노운 게이트 직접 참여해 봤습니다. │ BJ : 혀기월드 │ 시청자 수 : 50만」
액정 가장자리를 살짝 건드리자 접혀 있던 채팅창이 주르륵 펼쳐졌다.
눈으로 좇기도 힘들 만큼 빠른 속도로 갱신되는 채팅창은 문자 그대로 아비규환의 장이었다.
[이건 그냥 국가랑 협회가 미친거임; 저런 대규모 언노운게이트가 있는데 국민들한테 알리지도 않았다는 것부터가 노답]
[만약에 저 게이트 토벌 실패하면 해류를 타고 남해안 지역부터 내륙 지방까지 영향 미치는 것은 시간문제다. 국가와 협회는 이 사태에 대해 미리 예측하고 대비해야 한다.]
[실시간 기차표 올매진ㅋㅋ 중고나라에서 표값 가격 미쳐날뛰는 중ㅋㅋㅋㅋ]
[킹수 밤바다 이제 몬스터 떼로 뒤덮이는거냐]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처음보다 헌터 수가 많이 준 것 같은데요??ㄷㄷ]
[저기 S급들 총 집합한 거 아님? 다들 어디감?]
[X 된거 느끼고 탈출했거나 혀기처럼 몰래 숨어서 간만 보거나 아니면 걍 죽은 거지~]
[지금이라도 이민 가야하나;;;;;;; 무서운데;;;]
[정부와 협회는 해명하라 정부와 협회는 해명하라 정부와 협회는 해명하라 정부와 협회는 해명하라 정부와 협회는 해명하라]
‘인터넷 용어는 아직 잘 모르겠어…….’
한국어에는 꽤 자신이 있는 안드레아지만 이렇게나 빨리 갱신되는 채팅은 아직 따라가기 벅찼다.
안드레아는 액정 가장자리를 다시 한번 건드렸다. 그러자 화면을 가리던 채팅창이 사라지고 혀기월드의 방송 화면이 다시금 액정 전체에 온전히 드러났다.
「지, 지금 늑대의 부마스터가 현장을 통솔하고 있어요. 보이세요? 저기 저 가면을 쓴 남자입니다. 아, 트릭스터요? 그분은 군단의 길드원을 데리고 치료 부대로 이동한 것 같은데. 우선 저는…… 으, 으악! 벌레! 벌레!」
화면 속 혀기월드가 꽥 소리를 지르며 방방 뛰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카메라.
안드레아는 곁에 두었던 커피 잔을 우아하게 들며 그의 방송을 조용히 감상했다.
협회가 비밀스럽게 진행한 남해안 게이트 토벌 작전은, 이 ‘혀기월드’라는 헌터의 고유 능력을 통하여 한국 전역…… 아니 온 세상에 드러났다.
현재 그의 방송을 시청하고 있는 인원은 약 50만 명. 중개 방까지 포함하면 아마도 그 이상. 이대로라면 100만 명을 넘기는 것도 시간문제일 테다.
이 게이트 토벌의 성공 여부를, 이제 전 세계가 지켜보게 될 거란 소리였다.
일각에서는 불안과 동요를 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생성되는 몬스터도 그러했지만, 영상을 통해 짐작되는 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분화된 게이트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낯선 것이었다.
GIA의 멤버인 안드레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알고 겪은 한 대부분의 게이트는 한 필드로 구성되어 있었다. 영상 속 괴도가 입장했던 ‘태동의 뿌리’처럼, 따로 숨겨진 공간이 존재하는 경우는 처음 봤다.
그들이 입장한 것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언노운 게이트이기 때문일까. 아니, 그렇다고 하기에는 지금까지의 언노운 게이트와 차원이 달라 보였다.
……하지만.
“어디 보자.”
정작 지금 이 순간 안드레아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다른 지점이었다.
방송을 잠시 최소화한 안드레아는 그 대신 너튜브 어플을 켰다.
<괴도의 귀환에 가슴이 웅장해진다 - 킹한민국 S급 헌터>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약 4분 길이의 짧은 영상이었다.
남해안 언노운 게이트에서 몇 년 만에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괴도. 그녀가 단검으로 생흡충을 깔끔하게 두 동강 내 버리는 모습은, 이미 너튜브에 편집본 영상이 업로드 되어 엄청난 속도로 조회수 급상승 중이었다.
그러나 안드레아가 클릭한 것은 괴도의 영상이 아니었다. 바로 아래의, 실시간 인기 동영상 TOP 3 중 하나.
섬네일을 통해 힐끗 보이는 검은 드레스의 여자는, 세간에 F급 헌터로 알려진 흑염의 프린세스였다.
영상 속 그녀는 3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레벨 30 몬스터를 문자 그대로 ‘도륙’하고 있었다.
화려한 차림새에 카메라가 쫓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 게다가 양산을 이용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공격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 것. 대한민국 국민뿐만 아니라 외국 네티즌들도 그녀의 정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큰일 났네, 요한은.】”
안드레아는 손을 뻗어 창가에 놓여 있던 새장을 살짝 열었다.
새하얀 전서구는 기다렸다는 듯 안드레아의 검지 위에 안착했다.
“【이번만큼은 요한이 솔직해졌으면 좋겠는데. 더 늦기 전에 말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윌리엄?
안드레아는 새의 깃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 * *
“윽…….”
아연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떴다. 팽글팽글 시야가 회전하는 감각에 미간을 꾹꾹 눌러 대던 그녀는 주변을 멍하니 훑어보았다.
‘……어떻게 된 거지?’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풍경을 보아하니 신전은 아니고…… 원래 그들이 있었던 뿌리 부근도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여긴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의문을 느낀 아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다.
홱!
“앗!” 하고 소리를 낸 아연이 몸을 휘청거렸다. 한 박자 뒤, 제 발목을 붙잡고 있는 나무뿌리를 발견했다.
“뭐야, 이거?”
짜증스레 눈살을 찌푸린 그녀는 단검을 빼내어 발목에 거추장스럽게 감겨 있는 나무뿌리를 단번에 잘라 냈다.
우선은, 당연하다는 듯이 은하의 그림자를 찾았다. 아연은 주변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언니!”
언니─ 언니─ 니─……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제 목소리를 흉내 낸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아연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영면의 제단’에 오른 은하는 아무래도 ‘바깥’으로 나오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 미친X이.’
이준을 떠올린 아연이 으득 이를 갈았다. 어찌 됐든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언니를 몬스터로 몰고 간 그 노란 대가리를 찾아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일. 만일 우리 언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때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테다.
“가만 안 둬, 그 양놈의 새X.”
아연은 살벌한 욕설을 뱉으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한편 같은 시각 시우는─
‘이곳도 텅 비어 있군.’
아연과 마찬가지로 알 수 없는 이 기묘한 공간을 걷는 중이었다. 돌발 퀘스트를 완료하고 ‘바깥’으로 돌아오게 된 상황인 것은 파악하였으나…….
‘여긴 어디지? 다른 S급들은?’
마치 별개의 공간에 뚝 떨어진 듯한 감각이었다. 시우는 무릎을 굽혀 손으로 흙을 매만졌다. 그리고 그것을 코에 살짝 가져갔다.
‘……미약한 몬스터의 냄새.’
흙에 묻어난 냄새를 확인한 시우는 이내 후드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었다.
현 상황으로 짐작컨대 뿌리 부근에 남아 있던 본대에 무슨 일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균에게 뒷일을 맡겨 두었으니 말이다. 그는 귀훈의 오른팔 역할을 긴 시간 수행해 낸 사내였다.
그것보다 걱정이 되는 것은…….
‘선배!’
‘괜찮아, 신시우.’
거대 천칭, 영면의 제단에 뛰어들던 그녀의 뒷모습이었다.
‘……괜찮은 걸까, 선배는.’
시우는 ‘선택의 천칭’에 진입한 순간 떠올랐던 돌발 퀘스트창을 떠올렸다. 비록 물음표로 표기되어 있긴 했으나, 퀘스트창에는 분명 완료 보상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그러나 그곳을 빠져나온 시우에게는 이렇다 할 보상이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어쩌면 은하가 건너간 그 거대 천칭 너머에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시우는 생각했다.
분명 돌아올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
후드 주머니에서 꼼지락꼼지락 손가락을 움직이던 시우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손가락 끝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닿은 까닭이었다.
‘단말기…….’
손바닥 위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푸른 눈이 깊게 가라앉아 갔다.
이전에 은하는 시우에게 자신의 단말기를 맡긴 적이 있었다. 몬스터를 해치워도 획득 경험치가 표시가 안 된다며 말이다.
당시 은하의 단말기는 어딘가 부서지거나 침수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실제로 사람을 시켜 그것을 낱낱이 해체하여 내부까지 꼼꼼히 살펴보게 한 시우였다. 그러나 그 결과, 단말기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시우는 그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자 기기인 만큼 그저 알 수 없는 오류가 발생했을 거라 치부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단말기 오류 현상도, 협회에서의 랭크 측정 결과도, 그리고 그녀에게서 지독한 몬스터의 혈향이 풍겼던 것도…… 어쩌면.
‘아니.’
시우는 곧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분명 무언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언노운 게이트에 너무 오랫동안 갇혀 있었기 때문이라든가…… 아무튼 그런 종류의 문제일 것이다.
선배가 몬스터일 리가 없다. 그녀는 그가 봐 왔던 누구보다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헌터였다. 그렇기에 존경했고, 그렇기에 눈이 갔다.
그녀를 가까이서 지켜본 자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해할 수 없었다.
‘감히, 몬스터 주제에.’
오랜 동료임에도 불구하고 망설임 없이 선배를 공격하던 마에스트로, 그 자식이 말이다.
그 순간 선배는 어떤 얼굴을 했던가. 시우는 몰랐다. 차마 그녀의 표정을 확인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없었다. 선배는 사람이니까.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다.
“…….”
단말기를 부서질 듯 꾸욱 움켜쥔 순간이었다.
“꺄아악!”
시우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어디선가 들려온 비명. 여성의 목소리였다. 아마도 이곳으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곳.
혹시 선배? 아니면…… 괴도? 우선 확인해 보는 것이 좋겠다. 후드를 꾹 눌러쓴 시우는 땅을 걷어차고 빠르게 이동했다.
타앗!
“……어라?”
그렇게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이동하던 중 야구 모자를 눌러쓴 소녀와 조우했다.
괴도. 그녀도 이곳에 있는 것을 보아하니 시우처럼 ‘선택의 천칭’에서 순간 이동된 모양이었다.
그 말은 즉…… 제천대성과 마에스트로도 높은 확률로 이 공간 어딘가로 이동되었을 거란 소리였다.
“그쪽도 방금 그거 들었음?”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며 아연이 물었다. 시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연은 콧잔등을 슬쩍 찌푸렸다.
“절대 아니겠지만…… 혹시 울 언니는 아니겠지?”
잘근 손톱을 깨무는 아연 앞에서 이번에는 시우가 미간을 좁혔다.
“선배는 그런 식으로 비명을 지르진 않아.”
“그렇긴 한데…… 아니, 잠깐.”
말끝을 흐리던 아연이 홱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우를 들여다보는 분홍색 눈동자가 어쩐지 언짢은 기색이었다.
“님, 언니에 대해서 잘 아는 척하는 게 좀 역하네요?”
시우는 새파란 눈으로 아연을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이내 휙 고개를 돌렸다. 상대하기 피곤한 스타일. 그렇게 판단한 것.
결코 일전의 회의에서 자신을 밀쳤던 것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시우는 작게 한숨을 쉬고 후드를 다시 눌러썼다. 이곳에서 알맹이 없는 입씨름을 하기보다 아까 그 비명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시우의 한숨에 기분이 상한 걸까. 아연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저기요? 사람 말을 들었으면 뭐라고 대꾸라도 좀 하지?”
쫑알대는 아연을 무시한 채 시우는 앞으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아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의 전속력에 따라붙었다.
“아니, 울 언니가 어떤 식으로 비명을 지르는지 그쪽이 어떻게 아냐고요, 응? 아니, 너 이 새…… 설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아연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붉으락푸르락 얼굴빛을 바꾸는 아연을 향해, 시우가 휙 하고 저지하듯 손을 뻗었다.
“…….”
그에 무어라 말을 꺼내려던 아연이 도로 입을 닫았다. 날카롭게 눈매를 세운 시우를 따라, 아연 역시 서서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확인했다.
곧 무언가를 발견한 아연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저거?’
아파트 5층…… 아니 10층 높이?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목을 꺾어야 그 끝이 보일 정도로 거대한 그것은,
‘여신상?’
모자챙을 살짝 들어 올린 아연이 턱을 쳐들고 그것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곳곳에 부서지거나 마모된 흔적이 있는 것을 보니 상당히 오래된 여신상인 듯했다. 정성스레 깎아 내린 듯한 얼굴에는 푸른 이끼가 반쯤 뒤덮여 있었고 금이 간 팔과 다리 부근에는 이름 모를 꽃이 피어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칼과 저울.’
여신이 양손에 쥐고 있는 칼과 저울이었다.
왜 이런 곳에 저런 여신상이……? 그런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쉬이익─!
무언가 날렵하게 바람을 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여신상에 시선을 빼앗겼던 시우와 아연이 동시에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발견했다.
“컥……!”
──뱀에 목이 칭칭 감긴 로제와,
“…….”
그 앞에서 무표정하게 그녀를 응시하는 이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