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34)화 (134/306)


#134. 나의 대답
2022.12.12.


적막한 공간.

스윽…… 스윽…….

묵직한 무언가가 흙 위로 질질 끌리는 소리가 끊길 듯 말 듯 이어지다 어느 순간 툭 하고 멎었다.

걸음을 멈춘 은하는 서서히 시선을 들어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벽에 등을 기댄 채 꿈쩍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마치 낡은 마네킹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은하는 자신이 업고 있던 헌터를 조심스레 그곳에 앉혔다.

“……후.”

이어지는 짧은 한숨.

이로써 대충 끝이 난 듯했다.

방금 벽에 앉혀 둔 그 사람이, 은하가 이곳 ‘순환의 줄기’에서 발견한 마지막 인간이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아 낸 은하는 숙였던 상체를 천천히 일으키고 주욱 고개를 틀어 주변을 확인했다.

총 42명. 은하가 여기까지 옮긴 헌터의 수였다. 그중에는 은하가 이끌던 지원대의 부대원도, 군단 길드의 석경호도 있었다.

‘……어째서?’

그들을 바라보는 은하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원래라면 뿌리 부근에서 생흡충을 상대하고 있어야 할 그들이, 어째서 이곳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것일까.

누군가에 의해서? 아니면 ‘바깥’에 있던 그들에게도 천칭과 관련한 퀘스트가 떴던 것일까? 아니, 애초에 이곳은 몬스터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던 걸까?

스스슥…….

움직이지 않는 인영들 사이로 이름 모를 벌레가 기어가는 것이 보였다. 천장에 매달린 종유석을 따라 뚝 떨어진 물방울이 경호의 뺨에 닿았다.

그러나 그 어떠한 자극에도 경호는 눈을 뜨지 않았다. 마치 시체처럼.

상체를 숙인 은하가 경호의 코 아래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미미하게 느껴지는 숨결. 아직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등을 돌렸다.

이곳이 어디인지, 출구는 있는 것인지, 저 과실의 정체는 무엇이며 시스템이 말하는 ‘숨겨진 퀘스트’라는 것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역시 저 찬란한 황금빛을 발하는 과실이었다. 시스템창에서 말하던 ‘넘치는 생명의 과실’은 분명 저것을 말하는 듯했다.

은하는 황금빛 과실에 다가가 살짝 손을 뻗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황금빛 과실은 아주 손쉽게 손에 들어왔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게이트 핵의 역할을 하는 물체인지, 그도 아니면 이 게이트를 공략하는 열쇠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어.’

우선은 챙겨 두기만 하자. 은하는 과실을 인벤토리 구석에 넣어 두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또각, 또각…….

어둡고 축축한 이 공간에서 움직이는 물체는 오직 은하만이 유일했다.

이질적인 존재. 마치 이 공간 자체가 은하를 그렇게 치부하고 집요하게 배척하고 있는 듯했다. 그 기묘한 감각을 껴안고, 은하는 계속해서 걷고 또 걸었다.

이윽고 은하가 도달한 곳은 막다른 길이었다.

“…….”

툭.

걸음을 멈춘 은하는 양산 끝으로 살짝 벽을 두드려 보았다.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이 벽, 두께가 상당한 듯했다.

이번에는 양산을 벽을 향해 세게 휘둘러 보았다.

퍽!

견고한 양산은 그 정도로 부서지지 않았지만, 벽도 마찬가지. 미세한 실금조차 가지 않았다.

양산을 잠시 내려 둔 은하는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퍼어어엉─!

손바닥에서 일어난 거센 폭발.

그러나 내벽은 여전히 굳건했다. 이 정도 폭발에도 실금조차 가지 않다니. 단단하다기보다는 마치…….

‘보이지 않는 방벽이 씌워져 있는 것 같아.’

자신의 손과 벽을 번갈아 응시하던 은하는 바닥에 내려 두었던 양산을 다시 손에 쥐고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은하는 헌터들을 모아 둔 벽면에 다시금 도달했다. 이 공간 전체를 크게 한 번 둘러본 것이었다.

그러나 은하가 건진 수확물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이곳에 있는 것이라곤 정말 나무뿌리와, 쓰러진 몬스터와 헌터들, 그리고 저 정체 모를 황금빛 열매뿐이었던 것.

‘어쩌면 좋을까.’

근처에 대충 자리를 잡고 앉은 은하는 생각에 잠겼다.

이곳에 들어온 것으로, 시스템이 자신을 몬스터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상한 과실을 발견했고, 이 게이트에 숨겨진 퀘스트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단지 그뿐.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현재까지는 더 이상 없는 듯했다.

그러니 일단은 이곳에서 다시 ‘바깥’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은하는 그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싸늘한 정적 속에 띠링! 하고 경쾌한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당신을 걱정하듯, 살며시 곁에 다가와 당신의 발 언저리에 이마를 쓱쓱 비빕니다.]

시야에 떠오른 노란 메시지창에 은하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비록 형체가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양이가 저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고양이의 눈에는 지금 은하가 우울 혹은 절망에 젖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뒤적뒤적 털을 살펴보기 시작합니다.]

[축하합니다! ‘캣닢을 솔솔 뿌린 고등어 쿠션’을 획득하였습니다!]

포옥……!

고등어 모양의 쿠션이 무릎 위에 가뿐히 떨어졌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이것이 있으면 불안한 마음도 스트레스도 확 풀릴 것이라며, 기운이 없어 보이는 당신에게 아이템 사용을 자신 있게 권합니다.]

은하는 쿠션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도로 내려 두었다. 쿠션의 귀여운 디자인과는 상반되게, 그것을 바라보는 은하는 상당히 메마른 눈빛이었다.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었던지 고양이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언니, 혹시 이곳에서 나가고 싶어서 그러는 거냐고 조심스레 묻습니다.]

아무래도 고양이는 언노운 게이트에 갇혀 있던 시절, 기를 쓰고 그곳을 탈출하고자 했던 은하를 떠올리는 듯했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언니는 아직 정신을 잃은 상태도 기력이 다한 상태도 아니기 때문에, 지금이라면 이곳을 탈출할 방법이 있기는 하다고 덧붙입니다.]

방법이 있다고? 은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꽤 괜찮은 반응에 조금 신이 난 걸까. 고양이가 재빨리 덧붙였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본래 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해 충분한 양분이 필요한 법. 이곳에 있는 모든 생명체가 바로 그 ‘양분’이라 설명합니다.]

[하지만 언니가 원한다면…… 언니 하나쯤 이곳에서 탈출시키는 것은 제게 일도 아니라며 가슴을 팡! 두드립니다.]

그러나 은하는 고양이의 말에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나 하나쯤, 이라고…….’

그 말이 맘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은하는 자신의 주변을 느릿하게 둘러보았다.

벽에 기댄 채 미동도 없는 헌터들. 바닥과 벽에서 뻗어 나온 넝쿨 같은 뿌리가 서서히 그들의 팔다리를 옭아매는 것이 보였다. 그럼에도 정신을 잃은 그들은 작은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은하가 물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이곳에 있는 모든 인원을 꺼내려면 이 공간 자체를 파괴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언니에게 불가능할 것이라 단호하게 고개를 젓습니다.]

고양이의 말에 은하는 조금 전 기억을 떠올렸다. 양산으로 내려쳐도, 화염의 폭발력으로도 꿈쩍도 하지 않던 내벽.

“어째서?”

다시 한번 묻자 이번에는 대답까지 짧은 침묵이 흘렀다. 몇 분 같은 몇 초가 지난 후에야 고양이는 말했다.

[시스템이 언니를 ‘몬스터’로 인식하기 때문에.]

[그리고 몬스터는 게이트에 손상을 입힐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

은하가 입을 다물었다. 충격을 받았다거나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다만.

“……그건, 내가 이름을 빼앗겼기 때문이야?”

줄곧 신경이 쓰였던 ‘이름’.

혹시 지금 이 상황도 은하가 이름을 잃은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란 말인가.

“그럼 내가 이름을 되찾으면 여기 있는 벽을 부술 수 있는 거고?”

[…….]

고양이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고양아, 대답해 줘. 그런 거야?”

노란 메시지창은, 그로부터 몇 초가 흐른 후에야 슬그머니 떠올랐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고양이는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급한 기색으로 연이어 말했다.

[언니가 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은 진즉 알고 있었다며 입을 엽니다.]

[하지만 이름이 없으면 나는 게이트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며, 언니와 함께 있기 위해서는…… 내가 실재(實在)하기 위해서는 이름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쿠구구구…….

돌연 땅이 낮게 울리기 시작했다.

흙을 뚫고 나온 뿌리가 주변에 널브러진 몬스터들, 그리고 정신을 잃은 헌터들의 손과 발을 사납게 속박했다.

은하도 마찬가지였다. 땅에서 솟아오른 나무뿌리가 콱! 하고 발목을 붙들었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당신의 선택을 초조하게 기다립니다.]

마음이 급해진 듯 노란 메시지창이 다급하게 떠올랐다.

[이제 시간이 많이 없다며, 어서 빨리 이곳을 나가지 않으면 언니도 이 게이트에 흡수되고 말 것이라 경고합니다.]

[어쨌든 내가 이곳에서 꺼내 줄 수 있는 것은 나와 영혼이 결속된 계약자, 오직 언니뿐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슈우우욱……!

금빛 광채가 은하의 몸을 감싸기 시작한다.

[개체 식별. ‘흑염의 프린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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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는 지금 이것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언노운 게이트에서 고양이와 계약을 맺기 직전, 고양이가 제 힘을 사용하여 돌연변이 몬스터에게 잃었던 오른팔을 돌려주었을 때였다.

즉, 고양이는 그때처럼 ‘힘’을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눈이 부실 만큼 찬란한 황금빛이 점점 거세게 변해 갔다.

똑…….

종유석에서 방울져 떨어져 내린 물이 흙 표면을 두드리는 순간이었다.

휙─!

은하는 손에 쥐고 있던 양산을 크게 휘둘렀다.

슈르르륵…….

양산이 날카롭게 허공을 스치자 그녀를 감싸고 있던 빛이 순식간에 촛불 꺼지듯 사라졌다.

“…….”

다시금 내려앉은 어둠, 그리고 적막.

그 중심에 우두커니 선 은하는 선택의 천칭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고양이는 은하에게 물었다.

“고양아. 내게 인간이고 싶으냐고 물었지?”

은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희고 앙상한 그 손은, 이윽고 허공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이게 그 답이야.”

은하의 중심으로 치솟는 검은 불길. 마치 흑색의 해일과 같은 그것이 필드 전체로 뻗어져 나가기 시작한다.

띠링!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아무리 언니여도 시스템 방벽을 허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당신의 헛된 수고를 뜯어 말립니다.]

고양이의 말은 사실이었다.

닿는 것을 닥치는 대로 태워 버리는 검은 불길은 가히 위협적이었지만, 이 공간은 여전히 굳건하여서 도저히 무너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해야만 해.’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했을 때도, 모든 것을 잃은 채 미친 듯이 훈련에 전념할 때도, 짐승처럼 야수형 몬스터의 생살을 뜯어 먹을 때도, 그리고 이름을 빼앗겼을 때도…… 은하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만일 이곳에서 혼자 나간다면.

여기에 쓰러진 40여 명의 헌터를 모른 체하고, 고양이의 힘을 빌려 혼자서만 빠져나간다면.

──그때도, 나는 과연 스스로를 인간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화아아악!

그녀를 중심으로 다시 한번 피어나는 새까만 불길. 검은 용의 형상을 한 그것이 사방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뻗어 나갔다.

콰직─!

반쯤 타들어 간 굵은 나무뿌리가 땅으로 쿵!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여전히 게이트 내벽에는 작은 상처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마력을 모조리 쏟아 내어 분출해 버린다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곳에 정신을 잃은 헌터들이 있는 한 이 이상 위력을 올리는 것은 위험했다.

은하는 까득 어금니를 갈았다.

‘해야만 해. 내가.’

포기하지 않고 또 한 번 허공을 움켜쥐려는 순간,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당신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불현듯 눈앞에 떠오른 노란 메시지창에 은하가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신수의 요청으로 계약 내용이 일부 변경됩니다.]

[개체 식별. ‘흑염의 프린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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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지직─

굳건하던 게이트 내벽에 실금이 번지기 시작하더니 점차 가속을 더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하는 은하. 그런 그녀의 눈앞에 푸른 시스템창이 불쑥 떠올랐다.

[개체 재식별이 완료되었습니다. - 차은하.]

‘내 이름.’

그 순간 번쩍! 하고 은하의 눈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사슬에서 풀려난 듯한 해방감.

고오오오─

자아를 가진 듯 자유롭게 일렁이는 흑염은 뿌리와 가지, 땅과 천장 할 것 없이 공간 전체를 집어삼킬 듯 커다랗게 입을 벌렸다.

검은 태풍. 마치 그랬다.

이윽고…….

[경고! 시스템 손상이 감지되었습니다. 알 수 없는 충돌 현상입니다.]

채애애애앵─!

유리 조각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게이트를 강제 리셋합니다.]

꿈쩍도 하지 않던 게이트 내벽이 완전히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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