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33)화
(133/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3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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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꺼져 가는 생명
2022.12.11.
남해안 언노운 게이트 뿌리 부근.
“준환이 형, 좀 더 버틸 수 있겠어?”
탄알을 장전하며 민주가 물었다.
준환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녹색 망토를 휘릭 휘날리며 답했다.
“저는 아직 괜찮습니다만…….”
말끝을 흐린 준환이 힐끗 주변을 훑어보았다.
은하를 포함한 S급 무리가 ‘선택의 천칭’으로 입장한 뒤, 군단과 늑대의 지휘 아래 다섯 부대가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괴도가 파수꾼을 처치한 덕분에 생흡충들의 레벨 상승도 멈추었다. 즉 전투 자체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진 대원의 수가 부쩍 늘어나고 있는 것.
많은 대원이 계속된 전투로 크고 작은 부상을 입거나 탈진해서 일시적으로 전장을 이탈한 상태.
그리하여 500이 넘던 헌터 수는 벌써 절반 이상 줄어 있었다. 현재 남아서 생흡충을 상대하고 있는 전투 인원은 얼핏 보아도 200도 되지 않아 보였다.
그중에서도 적지 않은 자들이 실시간으로 도미노처럼 쓰러져 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한 일부 헌터는 제 체력과 마나를 보존하기 위해 은근슬쩍 전투를 피하고 있었다.
적당히 싸우는 척만 하면서, 어느 순간 게이트 출구가 열리면 뛰쳐나갈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한 것은 제 목숨일 테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열심히 싸우고 있는 입장에서는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여간 무책임한 것들.’
민주는 나이에 맞지 않게 끌끌 혀를 찼다. 이래서 군단을 제외한 헌터는 예뻐할 수가 없다니까. 아, 누나는 빼고.
그렇게 별수 없이 전투를 이어 가고 있던 도중이었다.
“윽…….”
털썩.
푸른 날개를 이용해 공중전을 도맡고 있던 수현이 근처로 힘없이 추락했다.
“함수현!”
준환이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 어디 다쳤어?”
“제, 젠장……. 몸에 힘, 이…….”
낮게 욕설을 뱉은 수현이 상체를 일으키고자 했다. 그러나 끝내 다시금 털썩 쓰러졌다.
푸스스…….
어깨와 이어져 있던 푸른 날개가 사라졌다. 아마도 마력 소진 혹은 체력 방전.
“잠시, 거기! 이쪽 좀 봐 줘!”
준환은 근처에 보이는 치료 부대원을 향해 다급히 손짓했다. 그러나 수현은 그런 그의 손목을 힘없이 낚아챘다.
“아니, 난 아직 더 싸울 수 있─.”
“장난하냐? 지금 이 상태로 더 싸우겠다고?”
“그럼? 지금 상황에 나만 누워 있으란 소리야?”
“그래. 그 소리다.”
준환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답했다.
수현은 A급 헌터 중에서도 수준급에 달하는 실력자였다. 아니, 수현뿐만 아니라 군단의 패밀리 모두가 그랬다.
그런 그녀가 레벨 20 이하 몬스터를 상대하며 탈진 증세를 보이다니.
수현을 응시하는 준환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어찌 됐든 지금 ‘바깥’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선택의 천칭’에 진입한 나머지 S급들이 돌아오기까지 버티는 것, 그리고 그들이 게이트 공략 성공의 열쇠를 쥐고 복귀하기를 바라는 것. 그뿐이었다.
“함수현, 고집 그만 부려. 그 상태로 마스터의 등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그거야말로 발목 잡는 일이라는 걸 잘 알 텐데.”
준환은 다시 한번 치료 부대원을 부르기 위해 휙 고개를 돌렸다.
수현은 1인분 이상의 몫을 해내는 주요 전투 인원이었다. 그러니 일반 부대원 열 명이 전장을 이탈하는 것보다 그녀 한 명의 부재가 전투 전체에 있어서는 더 뼈아팠다.
얼른 치유력을 쏟아부어 그녀를 회복시켜야 했다. 특히 다른 S급들이 언제 다시 복귀할지 알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그리고 하나둘씩 부대원들이 쓰러지고 있는 현재로서는 말이다.
그런데.
“형.”
이번에는 민주가 준환을 막았다.
“치료 부대에는 보내지 마.”
“예?”
준환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민주를 바라보았다. 치료 부대에 보내지 말라니. 탈진하여 고유 능력마저 쓸 수 없는 그녀를,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두라고?
“누나는 이 근처에서, 우리 시야에 닿는 곳에서 쉬고 있어.”
단지 그 말만을 남긴 민주는 소총을 허리춤에 끼운 뒤, 등에 메고 있던 바주카포를 양손에 쥐었다.
철컹! 포탄을 장전한 그는 한쪽 눈을 질끈 감고 조준경에 초점을 맞추었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린 순간,
‘민주야, 지원대를 잘 부탁해. 아무래도 다른 부대보다는 전투력이 높지 않으니까, 내가 없는 동안에 그들을 이끌어 줄 사람이 필요할 거야.’
‘응, 걱정 마요.’
‘그리고…….’
‘선택의 천칭’에 들어가기 직전, 은하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은하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민주에게 이렇게 속닥였다.
‘패밀리를 제외하고서는 아무도 믿지 마.’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누나?’
당시에는 은하의 말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렇게 생각했다.
‘누나는…… 뭔가 눈치챈 거야.’
철컥, 퍼어어엉─!
오렌지 빛깔 화려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 사이를 툭, 하고 밟는 아담한 운동화.
폭발에 팝콘처럼 튀겨지는 생흡충 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민주가 문득 시선을 깔아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바주카를 쥔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긴장, 불안, 혹은 두려움…… 그런 것 따위가 아니었다.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민주 역시 서서히 기력이 달리고 있었던 것.
S급 헌터 트릭스터가 레벨 20 몬스터를 상대로 이만큼의 체력과 마나를 소모한다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꾹.
바주카를 쥔 손에 다시금 힘을 준 민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부쩍 줄어 버린 인원. 그에 반해 줄어들지 않는 적의 수. 한눈에 보아도 상황은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다.
치료를 위해 로제의 3부대로 옮겨진 이들은 지금껏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C급 이하 헌터야 그렇다 치더라도, B급 이상의 헌터들은 조금의 치유력만으로 충분할 텐데…….
약 30분 전 치료 부대 쪽으로 옮겨진 군단의 ‘스트라이커’ 석경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돌아와도 한참 전에 돌아왔을 녀석이, 아직까지 들것에 누워 골골대고 있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
민주는 고개를 들어 치료 부대가 있는 방향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자그마한 눈물점 위 도토리 같은 밤색 눈이 슬며시 접혔다.
이곳은 넓었다.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에서는 그쪽 상황을 확인할 수 없었다.
아직은 확실하지 않은 점투성이였다.
그러나 은하의 경고가, 그리고 자신의 동물적 감각이 말해 주고 있었다.
─어쩌면 적은, 눈앞의 이 벌레 놈들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기억이라도 돌아온다면.’
민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언노운 게이트에서 죽다 살아온 그 경험이 어쩌면 단서가 되어 줄지도 모르는데.
애석하게도 머릿속에 안개라도 낀 듯 도통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구에게 당했는지, 작은 기억의 파편 하나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답답해.’
다시 조준경 가까이 눈을 가져간 민주는 지치지도 않고 재생성되는 유충들을 향해 정확히 포구를 조준했다.
그렇게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마스터,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단순한 기력 소모라고 하기에는 함수현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요.”
문득 다가온 준환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철컥, 바주카를 아래로 내린 민주가 힐끗 고개를 돌렸다. 준환 어깨 너머로 창백한 안색의 수현이 보였다. 이미 정신을 잃은 듯했다.
잠시 무언가 생각한 민주는 곧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내가 직접 데려갈게.”
“치료 부대에, 마스터께서 직접 말씀이십니까?”
“응.”
짧게 고개를 끄덕인 민주는 손에 쥐고 있던 바주카를 찰흙처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퐁!
방금 전까지 바주카의 형태였던 것이 이번에는 마트의 쇼핑 카트 크기의 군용 트럭 장난감으로 변했다.
민주는 그곳에 수현을 싣고, 준환을 향해 말했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달칵달칵.
손에 쥔 조종기를 만지작대자 수현을 실은 미니 트럭이 위이잉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미니카처럼.
그렇게 민주는 미니 트럭 위 수현과 함께 치료 부대의 근거지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는 도중에도 의심은 잦아들기는커녕 점점 더 커졌다.
단순히 치료 부대의 인원이 부족한 까닭에 치료가 늦어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민주는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볼 심산이었다.
그리고─.
“……!”
마침내 치료 부대가 있는 중앙 지역에 도착한 민주는 두 눈을 의심했다.
‘이것밖에…… 없다고?’
척 보아도 들것에 누워 있는 인원은 50명도 되지 않아 보였다. 또한 ‘선택의 천칭’으로 진입한 인원은 은하를 포함하여 총 5명.
그럼 나머지 인원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맞다. 경호 형은?’
민주는 우선 아는 얼굴을 찾기 위해 주변을 재빨리 둘러보았다. 그러나 30분 전 치료 부대에 이송되었던 경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정말 땅으로 꺼지기라도 했단 소린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을 무렵.
톡.
누군가 어깨를 건드렸다.
“어머, 찾는 사람이라도 있니?”
닥터 플랜트, 금로제였다.
* * *
화르륵─
새하얀 불길이 은하의 온몸을 감쌌다.
은하가 가진 화염 내성 덕분일까, 전혀 뜨겁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포근했다. 마치 부드럽고 청결한 이불에 누운 듯한 감각.
‘선…… 배…….’
‘그 애는…… 너 따위 괴물이……’
‘언니…… 안…… 돼!’
소용돌이처럼 밀려오는 목소리들.
따듯하고 눈부신 심연의 나락으로 느릿하게 가라앉아 갔다.
혹시 내가 죽은 것은 아닐까, 아렴풋이 그러한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띠링!
어디선가 익숙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은하는 서서히 눈을 떴다.
아직은 눈이 부셔 주변 풍경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유일하게 시야에 선명한 것은 푸른 시스템창 하나.
[‘순환의 줄기’ 진입에 성공하였습니다.]
순환의, 줄기……?
구름 위에 붕 뜬 듯한 기분으로 은하는 눈앞에 뜬 시스템창을 응시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새까만 눈동자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왔다.
그 순간 문득 떠오르는, 이전에 팝업되었던 시스템창.
[경계의 파수꾼이 ‘괴도’에 의해 쓰러졌습니다!]
[태동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던 통로가 활성화됩니다.]
준환에 이어 아연이 진입했던 태동의 뿌리. 그리고 지금 은하가 도착한 순환의 줄기.
‘뿌리와 줄기.’
은하는 생각에 잠겼다.
GIA가 예언했던 ‘커다란 나무’라는 것은 혹시…….
‘이 게이트 전체를 말하는 거였나?’
만일 그렇다면…….
‘뿌리와 줄기가 끝은 아닐 거야.’
태동의 뿌리에 진입한 아연이 파수꾼을 쓰러트림과 동시에 다음 필드로 향하는 ‘문’이 생겨났다. 즉, 아연이 다음 필드로 향하는 출입구를 연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곳에도 어쩌면.’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연이 처치한 파수꾼처럼 다음 필드로 향하게 하는, 어떠한 ‘열쇠’가.
은하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확인했다.
시스템창이 ‘순환의 줄기’라 칭한 이곳은 나무줄기인지 뿌리인지 모를 것들이 사방을 감싼 어두운 공간이었다.
축축한 흙냄새, 정적 속에 섞여 있는 풀벌레 소리. 마치 빛 한줄기 들지 않는 지하 공간에 갇힌 듯한 기분이었다.
손으로 짚고 이동할 벽도, 시야를 의지할 촛불조차 없는 상황. 하지만 은하에게 그러한 어둠은 그다지 큰 장애물이 되진 못했다.
번쩍!
[패시브 ▶ ‘밤을 읽는 자’ 활성화. 밤눈이 밝아집니다. 어두운 공간에서 전투 시 명중률이 대폭 증가합니다.]
새까맣던 그녀의 홍채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제야 확연히 보였다. 어둠 사이로, 앞서 신전 모습의 필드에서 S급들과 함께 쓰러트렸던 은빛 갑옷의 몬스터가 바닥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말이다.
발에 치이는 모든 것이 몬스터의 사체들이었다. 개중에는 은빛 갑옷뿐만 아니라, 생흡충이나 유충의 시체도 있었다.
오직 은하만이 인간이었다.
아니, 인간의 모습이었다.
“…….”
꼼짝도 하지 않는 은빛 갑옷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은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또 앞으로.
퉁, 퉁…….
갑옷에 발이 부딪힐 때마다 텅 빈 소리가 까맣고 고요한 공간에 울려 퍼졌다.
이윽고 은하가 걸음을 멈추었다.
[히든 퀘스트! ‘모든 것은 양분이 되어 과실(果實)을 맺게 하리라’ 수행 가능 조건을 달성하였습니다!]
[보상 : 넘치는 생명의 과실]
시스템창의 등장과 함께 필드 중앙에서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 열매를 발견했다.
이 어두운 공간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물체였다.
은하는 마치 이끌리듯 그것을 향해 서서히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중 툭, 하고 발끝에 무언가 닿았다.
은빛 갑옷? 아니다.
‘이 사람은…….’
민주가 이끄는 군단의 패밀리 중 하나. 스트라이커, 석경호였다.
거대 천칭 ‘영면의 제단’을 통해 이곳에 진입한 은하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가 왜 여기에?
천천히 시선을 들어 주변을 훑어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공간. 원래라면 제대로 보이지 않았을 주변이, 찬란하게 빛나는 열매 덕분에 확연히 비쳤다.
“……!”
주변 풍경을 확인한 은하가 제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었다.
‘넘치는 생명의 과실’을 태양 삼아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것은 비단 은빛 갑옷의 몬스터뿐만이 아니었다.
헌터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뿌리 부근에서 함께 생흡충을 해치웠던─.
“대체…….”
부대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