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32)화 (132/306)


#132. 내부 분열
2022.12.10.


……그날 죽었다니?

이준의 말에 유환과 아연의 표정이 묘해졌다. 도대체 지금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방금 이준이 은하를 공격하려고 했다는 것만큼은 잘 알겠다.

쉬익…….

이준의 손목 소매 안쪽에서 하얀 뱀이 미끄러지듯 느릿하게 뻗어 나왔다.

아무래도 상황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고 있는 것 같다.

“자, 잠시만!”

아연이 빽 소리쳤다.

“이, 이건…… 아이템 때문임! 아무래도 고장이 난 게 확실해. 이 미친 나침반이 어떻게 언니를…… 안 그래요?”

아연은 조금 전 시우가 바닥에 팽개쳤던 나침반을 발로 퍽퍽 밟아 댔다.

쓸모없는 아이템 때문에 우리 언니가 괜한 오해를 받아 버린 것이다. 이런 똥 아이템은 얼른 깨부숴 버려야만 했다.

‘아니, 언니는 왜 아무 반론도 안 하는 거야? 무슨 헛소리냐고 양산으로 싸다구를 후려 버리지 않고……!’

나침반을 박살 내 버린 아연은 씩씩대며 은하를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은하는 제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 끝은…… 바닥. 대리석 바닥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닿아 있었다.

원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기 힘든 유형이었으나 지금은 더 그랬다.

“언니,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언니가 가만히 있으니까 괜히 의심만 더 사는 거라고요.”

은하를 향해 속닥거리던 아연은 나머지 인원을 향해 양팔을 크게 교차하여 X 자를 만들어 보였다.

“아무튼 아님! 절대 아님! 취소! 기각! 반려! 퉤!”

제천대성 유환 역시 그녀의 의견에는 동의했다.

‘아우님이 몬스터라니.’

그래,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자갈치 시장에 출현했던 언노운 게이트에서 성윤을 포함한 불멸의 길드원을 여럿 구출해 준 은인이었다. 알 수 없는 저주로 죽을 위기에 처했던 트릭스터를 위해 유물급 아이템 ‘픽시 파우더’를 구해 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이곳 남해안 게이트에서 첫 번째 통로 ‘태동의 뿌리’를 발견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은하였다. 유환을 시켜 바닥 아래를 확인하라고 이른 것이 그녀였으니까.

그뿐인가. 괴도가 ‘태동의 뿌리’에서 파수꾼을 상대하는 동안, 레벨이 눈에 띄게 상승한 몬스터로부터 지원대를 지켜 낸 것도 다름 아닌 그녀, 흑염의 프린세스였다.

‘물론 인간과 똑 닮은 모습을 한 몬스터는 존재해.’

유환 역시 그런 몬스터를 본 적이 있었고, 상대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잠시 진정하도록 하지, 마에스트로. 아직 확실하지 않은 일이 아닌가.”

유환은 이준 앞을 척 하니 막아섰다.

“확실하지 않다고?”

이준은 자신의 손목을 휘감은 흰 뱀을 거두지 않은 채 비웃듯 물었다.

“그래. 저 나침반 하나만을 믿고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아. 자네는 몬스터가 저토록 유창하게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걸 본 적이 있나? 몬스터가 게이트 밖에서 인간들과 섞여 생활한다는 이야기는?”

“…….”

유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준은 스르륵 시선을 돌려 은하를 응시했다. 여전히 금방이라도 그녀를 공격할 기세였다.

유환은 설득하듯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해 봐. 그녀가 몬스터였다면 진즉에 우릴 공격했을 거다. 아니, 적어도 우리와 함께 ‘제단의 수호자’를 처치하지는 않았을 테지.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나야말로 묻고 싶군. 신전의 몬스터가 저기 ‘흑염의 프린세스’만 공격하지 않는 것을, 제천대성 넌 보지 못했나?”

“…….”

“그렇담 실망이군. 너라면 눈치챌 거라 생각했는데.”

유환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붉은 시선이 은하를 향해 소리 없이 굴러갔다.

‘신전의 몬스터가 아우님만 공격하지 않았다……?’

만일 유환이 전투 내내 은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더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 정도 눈썰미조차 없이 오랫동안 길드를 이끌지 못했을 테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것을 관찰할 겨를이 없었다. 유환뿐만이 아니라 시우도, 아연도, 제각각 몬스터를 사냥하는 동안 주변의 전투 양상을 살피지는 않았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지 않은가.

이미 서로의 실력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사이였다. 무엇을 걱정하여 남을 살피고 있겠는가.

‘달리 말하자면…….’

마에스트로, 그는 전투 내내 은하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처음부터 그녀를 의심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걸까. 알 수 없다.

“비켜.”

확실한 것은, 그가 당장이라도 은하를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마에스트로, 그녀는 우리의 동료다. 우선은 그녀의 이야기를─.”

“이야기? 그렇다면 묻겠다.”

이준이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그리고 은하 방향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진짜’ 이름은 무엇이지?”

“…….”

은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것 보라. 저 괴물은 그녀의 이름조차 제대로 대지 못했다.

이준은 자조했다.

“‘제단의 수호자’는 어째서 너만 공격하지 않았고?”

“…….”

“……하.”

일관된 침묵에 이준이 짧게 웃음을 흘렸다. 조금은 허탈하고 조금은 절망한, 그런 웃음소리였다.

그날 은하가 언노운 게이트에 갇히고 지금까지, 이준도 그저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그녀를 구출 또는 추적하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찾지 못했다.

10년째, 아직은 살아 있을 거라 믿었다.

20년째, 어쩌면 조금 늦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30년째, 은하는 죽은 것이라고, 그렇게 치부했다. 겨우 그렇게 마침표를 찍어 낼 수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가까스로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와 똑 닮은 여자가 나타났다.

이준이 기억하던 은하와는 사뭇 달랐다.

‘이유라’라는 가명을 대는 것도, 어울리지도 않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까닭도, 유일하게 과거를 공유하는 그를 찾지 않았다는 점도…… 이상한 구석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설픈 흉내에 잠시나마 흔들렸던 때가 있었다. 혹시나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진짜 그녀일지도 모른다고, 진짜 그녀가 살아 돌아온 것이라고.

하지만.

“감히.”

콱……!

이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거칠게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웃음기 하나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감히, 몬스터 주제에.”

하필이면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애의 이름을, 내 앞에서.

초라한 촛불에 은은하게 밝혀진 그녀의 옆얼굴이 아직도 이토록이나 눈앞에 선연한데.

‘나는 국밥이 먹고 싶어. 엄마랑 자주 먹었던 국밥. 거기 김치 만두도 맛있거든.’

‘언젠가 함께 갈 수 있을까?’

‘……당연하지.’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그 미소를,

‘나보다는 네가 사는 것이 나을 테니까.’

그녀의 마지막을 지난 30년간, 단 한 순간도 말이다. 어찌 그럴 수 있을까.

──내가, 너를, 어떻게.

“그 애는.”

쉬이이익.

흰 뱀이 갈라진 혀를 날름거렸다.

그 애가 내게 얼마나……. 얼마만큼의 존재였는지, 감히 너 따위가 상상이나 할까.

아니,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애는 너 따위 괴물이 흉내 낼 만한 애가 아니야.”

이 세상 그 누구도.

고오오…….

진홍색을 띤 수상한 기운이 이준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이채를 머금은 잿빛 눈동자, 그 속의 새까만 동공이 뱀의 그것처럼 살벌하게 찢어졌다.

몸 전체에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불길한 감각이 피부를 덮쳤다. 이준을 제외한 이곳의 모든 이가 반사적으로 그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윽고…….

“그만둬, 마에스트로!”

유환이 외쳤다.

쉬이이익─!

뱀의 형상을 한 붉은 기운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은하를 향해 나아갔다.

저것이 물질적인 타격을 주는 공격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다만 직격으로 부딪히는 것은 피해야만 한다고, 피부가 말해 주고 있었다.

“언니, 물러서요!”

채앵! 촥!

아연이 단검을 빼내 들었다. 짧고 날카로운 칼날이 단번에 공중을 갈랐다. 뱀의 형상을 하고 있던 붉은 기운은 연기처럼 사라졌지만.

‘젠장, 한 마리가 아니었어……?!’

뒤를 돌아본 아연이 뒤늦게 혀를 찼다. 어느새 은하의 눈앞까지 다가간 거대한 뱀이 또 하나. 저것은 뱀의 형상이 아닌, 진짜 하얗고 거대한 뱀이었다.

“아우님, 뒤!”

녀석이 쩍 아가리를 벌리는 순간이었다.

콰직!

뱀의 두개골 위로 정확하게 떨어져 내린,

‘……얼음?’

유환의 눈빛이 바뀌었다.

콰직! 콰직!

날아온 것인지, 공중에서 생겨난 것인지 모를 얼음은 은하를 향해 돌진하던 뱀을 제각기 명중한 뒤 살벌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눈앞에서 잘게 바스러져 눈처럼 흩날리는 새하얀 그것.

유환이 공중으로 손을 뻗었다. 단단한 손바닥 위로 차가운 감촉이 내려앉았다.

분명하다. 이것은 얼음이었다.

‘어디서?’

손바닥 위를 응시하던 유환이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이준과 은하의 대치, 그리고 그 사이를 비집고 선─.

“더 이상 잠자코 보고 있을 수가 없군.”

후드티의 청년.

그가 입을 열자 가지런한 잇새로 하얀 입김이 느릿하게 뿜어져 나왔다.

‘설마 저자는…….’

시우의 옆모습을 응시하던 유환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마에스트로의 공격을 단번에 막아 낸, 얼음을 다루는 자연계열 헌터.

그렇다면 짐작할 수 있는 답은 단 하나.

단 한 번도 세간에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는, 이름뿐이었던 S급.

‘……백랑?’

깊게 눌러쓴 후드 아래, 푸른 안광이 살벌한 빛을 머금었다.

콰직.

바닥에 축 늘어진 뱀의 사체를 으스러트리듯 짓밟은 시우는 이준을 향해 낮게 으르렁댔다.

“무슨 생각으로 지금 이딴 짓을 저지르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

“네 이해를 바란 적 없다.”

이준이 짧게 답했다. 그의 신체를 둘러싼 붉은 기운이 한층 더 선연한 빛을 머금었다.

“비켜라. 마지막 경고야.”

“싫은데?”

후드 아래로 살짝 보이는 검푸른 머리카락이 백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네 멋대로 선배의 존재를 판단하지 마.”

그리고.

“선배는 몬스터 따위가 아니다.”

붉은 기운과 백색 한기가 허공에서 요란하게 부딪히는 순간이었다.

콰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자욱하게 솟아난 연기.

뿌옇게 번진 시야 가운데,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일어났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제천대성 유환이었다.

“마에스트로, 자네가 협회 소속 헌터라는 것도, 세계가 인정한 프라임 헌터라는 것도 알지만…….”

성이 난 붉은 눈이 이준을 집어삼킬 듯 바라본다. 그의 신체 주변으로 파지직 튀는 여러 개의 붉은 스파크.

‘해제 상태’의 그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우님에게 칼을 겨누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곁에, 아연이 다가서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

휘리릭. 아연은 손에 쥐고 있는 단검을 던졌다 쥐며 이준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살벌하게 가라앉은 공기.

파아아앗!

망설임 없이 날아드는 단검. 이준은 고개만 까딱 움직여 아주 손쉽게 그것을 피했다. 그러나 공격은 지금부터였다.

콰지지직…….

근처 기둥을 뿌리째 뽑아 버린 유환이 마치 투호 던지듯 그것을 이준을 향해 투척했다.

콰앙─!!!

바닥과 천장이 극심하게 흔들렸다.

그야말로 대격전.

휘몰아치는 거센 공격에 누구 하나 팔이 잘려도 이상하지 않을 광경이었다.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멈춰.”

화르륵!

새까만 불길이 격돌하던 그들의 사이를 갈라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검은 화염 방벽을 눈앞에 두고 우뚝 멈춰 선 그들 사이로, 또각또각 차분한 구두 소리가 짧게 이어졌다.

여태 침묵을 지키던 흑염의 프린세스였다.

“여기서 내부 분열을 하고 있을 겨를이 없다는 것은 다들 잘 알고 있잖아.”

아직 이 게이트는 끝이 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바깥에서는 트릭스터를 포함한 대원들이 몬스터와 혈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시간을 끌어 봤자 좋을 것이 없다는 소리.

은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제단 위 거대 천칭을 바라보았다.

“시스템이 마지막 몬스터가 한 마리 남았다고 주장하는 것도, 나침반이 나를 가리킨 것도,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은하 역시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황금색 거대 천칭 ‘영면의 제단’에 바쳐진 몬스터들은 새하얀 불길에 휩싸여 어디론가 사라졌다.

대부분의 몬스터가 처치 직후 픽셀화가 되어 사라지는 점을 생각해 보면, 평소와는 다른 형태.

어째서 시스템은 몬스터의 사체를 굳이 제단에 바치라고 했을까. 마치 ‘회수’라도 하려는 듯이.

‘그 답은 저 너머에 있을 거야.’

은하는 그리 확신했다. 그리고 그 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중에 자신뿐이었다. 시스템이 몬스터로 지정한 자도, 천칭이 뿜어내는 불길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내성을 지닌 자도 자신밖에 없으니까.

물론 천칭에 올라서는 순간 그대로 소멸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은하는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정말 두려운 것은.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당신을 향해 묻습니다.]

[──언니는, 인간이고 싶으냐고.]

내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그러한 생각이었다.

“어찌 됐든 우리는 여기서 ‘선택’해야 해.”

은하는 선택을 망설일 생각이 없었다.

늘 그래 왔듯, 그녀는 움직였다. 앞으로.

또각─

“선배!”

은하를 뒤따르는 다급한 목소리.

제단 위를 오르던 은하가 잠시 멈추었다.

“괜찮아, 신시우.”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덧붙였다.

“언니!”

아연이 제단을 향해 튀어 올랐다. 천칭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보이지 않는 막이 형성되어 있어서 그대로 튕겨 나가 버렸다.

“언니! 언니!”

쾅! 쾅! 주먹으로 막을 부술 듯 두드려 보아도 소용없었다.

마치 ‘인간’은 그곳에 설 수 없다는 듯, 보이지 않는 막은 끝내 아연을 막아 냈다.

화르륵─

바로 눈앞에서, 새하얀 불길이 그녀를 집어삼키는 것이 보였다. 아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은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 띠링! 하고 경쾌한 알림음이 귀를 때렸다.

[주변 몬스터를 모두 섬멸하여 영면의 제단에 바치십시오. (666/666)│보상 : ???]

[축하합니다! 돌발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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