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31)화 (131/306)


#131. 나침반이 가리킨 것은
2022.12.09.


“엥, 아직 한 마리가 남았음?”

침묵 끝에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아연이었다.

“뭐야, 알아서 다 처치한 줄 알았는데 실망.”

쉬리릭.

아연의 손바닥에 자그마한 표창이 생겨났다. 마지막 한 마리를 찾아 해치워 버릴 요량이었다. 남은 것이 단 한 마리뿐이라면 혼자서도 쓱싹 해치울 수 있을 테니까.

“아니, 한 마리도 빠트리지 않고 잡았다.”

그런 아연을 유환이 막았다.

무언가 생각하던 유환이 이준에게 힐끗 시선을 던졌다.

“마에스트로, 혹시 네가 조작하던 몬스터가 아군으로 계산되었을 가능성은 없는가?”

마에스트로 백이준이 페로몬을 다룬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정보였다. 실제로 고유 능력을 사용하여 ‘제단의 수호자’ 다수를 소환수처럼 부리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럴 가능성은 없어. ‘지배’ 효과가 끝나는 순간 자결하라고 주입해 두었으니까.”

벗고 있었던 장갑을 다시 쓰며 이준이 단호하게 답했다.

이준이 부리는 몬스터는 ‘지배’ 효과가 활성화된 동안 그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었다.

명령의 강도가 강할수록 이준이 소모하는 마력과 정신력이 급증하고, 반대로 ‘지배’ 효과의 지속 시간이 급감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단순히 페로몬을 주입한다고 해서 노예처럼 부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력의 소모 값을 정확히 예측하고 통제해야 하는 세심한 작업이었다.

이준이 몬스터 전체가 아닌 일부에게만 페로몬을 주입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중간에 ‘지배’ 효과가 풀려 버리면 안 되니 말이다.

그 결과 이준이 부리고 있던 ‘제단의 수호자’는 모두 저 황금 천칭에서 불타 사라졌다. 한 마리도 남김없이 말이다.

유환은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나 또한 한 마리도 놓치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눈앞의 시스템창에는 여전히 666마리 중 665마리만이 표시되어 있었다.

“어쩌면 보스 몬스터가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시우가 말했다.

“만일 그런 거라면 보스 몬스터 등장 안내창이 떴을 텐데. 적어도 로딩창이라도 말이야.”

“글쎄요. 어딘가에 숨어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죠.”

숨어 있다니? 도대체 어디에?

신전처럼 생긴 이 필드에는 숨을 만한 장소가 없었다. 은빛 갑옷의 몬스터가 모두 사라진 지금 이곳에 남은 것은 평평하게 깔린 대리석 바닥, 저 멀리 계단 위의 거대한 황금 천칭, 그리고 천장을 지탱하는 기둥만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그중 보스 몬스터가 숨을 만한 곳이라면…….

유환은 스르륵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흡!”

곁에 있던 돌기둥을 강하게 내리쳤다.

콰앙─!

백색의 돌 파편이 대리석 위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거대한 금이 번진 기둥. 유환은 오른쪽 주먹을 쓰다듬으며 그곳으로 다가갔다.

역시나 기둥 속은 비어 있지 않았다. 즉 내부에 무언가 숨어 있을 만한 구조가 아니라는 것.

“우선 흩어져서 필드에 수상한 점은 없는지, 놓친 몬스터가 있는지 꼼꼼하게 확인해 보는 것이 좋겠어. 이렇게 멍하니 서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흐를 테니 말이야.”

유환의 말에 모두가 필드 전체로 흩어졌다. 샅샅이 살펴본다고 해도 무언가 발견할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 외에 없었기 때문이다.

은하 역시 그들과 잠시 떨어져 신전을 둘러보았다.

또각, 또각…….

“…….”

그러다가 문득 제자리에 멈춰 섰다.

은하는 까만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까만 양산을 쥔 채 레이스가 주렁주렁한 드레스를 입은…… 낯선 여자.

흠 하나 없이 새하얀 대리석 바닥 위로 반사되는 자신의 모습의 모습을, 은하는 한참이나 물끄러미 응시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마음에 걸리는 것은 비단 언노운 게이트에 갇혔던 당시 흑호의 태도뿐만이 아니었다.

여태 단 한 번도 오작동 한 적이 없었던 협회의 측정기가 유일하게 은하의 랭크를 비정상적으로 판정한 일. 아무 이상 없다던 은하의 단말기가 이상하게 경험치 획득 인식을 하지 못했던 일.

그리고…….

‘흑염의 프린세스는 괴담에 등장하는 몬스터예요. 헌터들 사이에서 유명하죠.’

언젠가 제휘가 들려주었던 ‘흑염의 프린세스’에 관한 괴담.

‘오래전 복계산에서 행방불명되었던 친우이네. 살아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이런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복계산에서 만났던 ‘이름을 빼앗긴 자’.

“…….”

은하는 대리석 바닥에 비친 제 모습에서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빼꼼 고개를 들이밉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한 듯, 꼬리를 세우고 천천히 다가옵니다.]

문득 눈앞에 팝업되는 노란 메시지창.

남해안 게이트에 진입하기 전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눈 후로, 고양이가 은하에게 말을 거는 횟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은하가 저를 의심한다는 사실에 내심 토라진 것인지, 도둑이 제 발을 저리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한동안 몸을 사리고 있던 고양이가 다시금 홀연히 나타나 은하의 안색을 살피려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은하는 노란 메시지창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물체를 응시했다.

‘영면의 제단’. 하얀 계단 위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황금빛의 거대 천칭이었다.

S급들이 쓰러트린 은빛 갑옷의 몬스터들은 저 위에서 새하얀 불길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 마리를 제외하고, 나머지 665마리가 차례로.

‘혹시 그 한 마리가─.’

은하는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각성하여 인간을 뛰어넘는 신체 능력과 화염이라는 고유 능력을 얻었지만, 단 한 순간도 스스로가 인간임을 잊은 적은 없었다.

언노운 게이트에 오랜 시간 갇혀 몬스터의 고기를 뜯어 먹으며 버티던 순간에도, 고양이와 계약하며 이름을 내준 이후에도, 그녀는 언제나 인간 차은하였다.

‘……분명 그랬다.’

그러나 그 확신은, 대리석 바닥에 비친 저를 닮은 여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다시금 서서히 흐려진다.

‘분명…… 그럴 텐데.’

사실은 잘 모르겠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고양아.”

은하는 노란 메시지창을 향해 물었다.

“이름을 잃는 순간, 혹시 또 무언가를 함께 잃었어?”

이를테면…….

“정체성이라든가.”

꾸욱.

은하는 양산을 쥔 손에 슬그머니 힘을 주었다. 그리고 고양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일 초가 일 분 같았고 일 분이 십 분 같았다.

신전처럼 보이는 이 필드에서는 아직도 어디선가 희미한 오르간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윽고 그 소리가 멎었을 때,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당신을 향해 묻습니다.]

고양이가 말했다.

[──언니는, 인간이고 싶으냐고.]

* * *

‘선택의 천칭’에 입장하고 은빛 갑옷의 몬스터를 모두 섬멸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각자 주변 수색을 마친 S급들은 또다시 거대 황금 천칭 아래, 필드 중앙으로 모였다.

물론 예상대로 성과는 없었다. 이 필드에서는 그들 다섯 명을 제외하고는 개미 한 마리도 발견할 수 없었던 것.

“혹시 이런 건 아닐까? 마지막 몬스터가 등장하는 숨겨진 조건이 있다거나. 왜, 이 필드의 시스템은 그런 귀찮은 거 엄청 좋아하잖아.”

아연이 가볍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녀만이 유일하게 다섯 명 중 태평한 생각을 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음…… 그게 아니라면 그냥 단순히 오류일 수도 있고.”

그러나 천하의 아연도 험악하게 굳어 버린 분위기에 조금 목소리를 낮추었다.

“……괴도. 돈이 될 만한 게이트를 털고 다니는 너라면 이럴 때 쓸 만한 아이템 하나쯤은 갖고 있지 않나?”

유환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연에게 물었다.

이 중에서 그나마 아연을 가장 오래 봐 온 것이 유환이었다. 먹이를 저장해 두는 다람쥐처럼, 그녀가 평소 인벤토리에 차곡차곡 쓸 만한 아이템들을 모아 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매해 열리는 옥션에서 그것들을 팔아 한몫 두둑이 챙기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그런 거 없는뎅.”

“한번 살펴보기나 해 봐. 게이트 이동용 스크롤이라든가…… 뭐 아무거나 좋으니 말이야.”

“아니, 아저씨. 그런 스크롤이 한 장당 얼마나 하는 줄 알고 하는 말이야?”

또한 얄미울 정도로 계산적인 녀석인지라 웬만해서는 지갑…… 아니 인벤토리를 열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바깥’에서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버티고 있을 로제를 생각하니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유환은 아연의 눈앞에 두꺼운 손가락을 세 개 척! 들어 보였다.

“임무가 끝나고 게이트 밖으로 나가면 아이템 값을 세 배로 쳐 주지.”

“……확실히 말해 두지만 스크롤은 진짜 없어.”

잠시 기다려 봐.

아연이 허공을 가볍게 두드렸다. 인벤토리를 확인하는 모양인지 그녀의 분홍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유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 1분이 흘렀다.

“음, 이런 건 어때? 쓸모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긴 한데.”

아연의 손바닥 위가 반짝 빛났다. 이윽고 빛무리가 사라진 그곳에는 작은 크기의 나침반이 생겨났다.

[아이템 상세 ▶ ‘걸리버의 나침반’ │ 소모성 아이템 (기타) │ 희귀도 : 희귀 │ 전설 속 모험가가 항상 몸에 지니고 있던 나침반. 길을 잃었을 때에는 사용할 수 없을 것 같다. 분명 다른 사용처가 있을 텐데……? │ 남은 사용 가능 횟수 : 1회]

이것은 아연이 3년 전 광주 B급 게이트에서 훔친…… 아니 얻게 된 아이템으로, 주변에 있는 위험 요소를 알려 주는 ‘탐지형 아이템’이었다.

함정이나 숨어 있는 몬스터 찾기에 요긴하게 쓰이긴 했으나 아이템 자체가 유물급은커녕 영웅급도 아닌 데다 잔여 횟수가 한 번밖에 안 남아서 팔기에도 애매한 녀석이었다.

‘세 배로 쳐준다니까 개꿀이지.’

이 틈에 애물단지 같은 아이템을 냉큼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아연은 나침반을 유환에게 슥 내밀었다.

“만약 보이지 않는 곳에 몬스터가 숨어 있는 거라면 얘가 알려 줄 거야. 보다시피 아이템 주제에 꽤 아날로그라서 좌표까지는 알 수 없지만 방향은 정확하더라.”

“좋아. 써 보지.”

나침반을 건네받은 유환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사용했다.

다라라라락…….

나침반 바늘이 핑그르르 돌아가는 소리가 침묵 위를 걸었다. 아연과 유환은 나침반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고 은하, 이준, 시우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반응을 말없이 기다렸다.

탁!

바늘이 멈추었다.

“…….”

“…….”

그러나 유환과 아연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그들의 뒷모습이 뻣뻣하게 굳은 듯도 보였다.

근처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잠자코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시우가 스르륵 팔짱을 풀었다.

“어떻게 됐죠?”

시우가 물었다. 남은 한 마리가 숨어 있는 위치, 하다못해 방향이라도 알 수 있다면 찾아내서 해치워 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은 시우에게 아무런 답도 돌려주지 않았다. 여전히 나침반에 꼿꼿이 시선을 고정한 채 꿈쩍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시우의 미간이 오묘하게 굳어 갔다.

“설마 남은 몬스터가 없는 겁니까?”

“아니…….”

유환답지 않은 흐릿한 목소리.

말끝을 흐리는 것이 답답했던 시우가 성큼성큼 그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보겠습니다.”

휙.

시우는 유환의 손바닥 위에 있던 나침반을 들어 푸른 시선을 그곳에 고정했다.

그리고.

“…….”

유환과 아연이 그러했듯 돌처럼 쩍 굳어 버렸다.

또다시 이곳 필드 전체에 은은한 오르간 소리가 깔리기 시작했다. 침묵 속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기묘한 선율.

“……어디서 이딴 고물을 주워 왔는지.”

한참을 굳어 있던 시우는 결국 나침반을 바닥에 휙 던져 버렸다. 더는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원래라면 내 소중한 아이에게 무슨 짓이냐며 삿대질을 서슴지 않았을 아연이었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바닥을 뒹구는 나침반을 보며 눈만 깜빡이는데…….

슈욱─

무언가 시야를 빠르게 가르고 사라졌다.

“……?”

아연이 번쩍 고개를 든 순간 퍼억! 하고 둔탁한 소리가 오른쪽에서 들려왔다. 은하가 양산을 크게 휘둘러 제게 날아든 ‘그것’을 쳐 낸 것이었다.

이윽고 툭, 하고 땅에 떨어진 것은─.

‘흰 뱀……?’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뱀을 확인한 아연이 다시금 스르륵 시선을 들었다.

“왜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거지?”

저벅, 저벅…….

대리석 바닥을 밟는 구두 소리가 가까워졌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이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땅 위를 뒹굴고 있던 나침반을 주웠다.

옅은 베이지색 속눈썹 아래, 잿빛 시선이 아래로 서서히 떨어져 내린다. 나침반 바늘이 가리키고 있는 대상은…….

“역시.”

나지막이 중얼거린 이준이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나침반으로부터 스르륵 시선을 들었다.

“아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 아니지…… 처음부터 말이야.”

묘하게 요동치는 잿빛 눈동자는 정확히 한 사람을 향했다.

스윽.

가죽 장갑을 낀 이준은 느릿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손바닥을 그곳을 향해 펼쳤다.

“그 애는 그날 죽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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