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30)화 (130/306)


#130. 종료되지 않는 퀘스트
2022.12.08.


시야를 가득 메웠던 빛무리가 사라지고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새하얀 대리석 바닥이었다.

성공적으로 이동한 것이다. 문을 통하여 ‘선택의 천칭’이라는 알 수 없는 공간으로.

‘주변 몬스터를 모두 섬멸하라고?’

갑작스럽게 주어진 돌발 퀘스트는 분명 그리 말했다.

양산을 바로 쥔 은하가 시선을 들어 재빨리 주변을 확인했다. 바로 옆에는 제 손을 꼭 잡고 선 아연이, 그 너머로는 유환과 시우, 이준의 모습이 보였다.

염려했던 것처럼 뿔뿔이 흩어지지는 않은 모양. 현재까지 그들 다섯 명을 제외한 몬스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봐, 방금 퀘스트…….”

“그래. 나도 확인했어.”

유환과 이준이 날카롭게 눈매를 세우고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갑자기 어디로 이동되는가 싶었더니…… 여긴 도대체 뭐야. 신전 같은 장소로 보이는데.”

유환의 말대로, 이곳 ‘선택의 천칭’이라는 필드는 마치 고대의 신전과 같은 풍경이었다.

은하는 양산을 쥔 손에 힘을 빼지 않은 채 주변을 꼼꼼하게 살폈다.

우선 천장을 확인해 보았다. 반구형으로 곡선이 진 그것은 마치 하늘처럼 드높았다.

새까만 바탕에는 별처럼 보이는 작은 점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마치 우주의 은하수를 옮겨 놓은 듯한 광경.

알 수 없는 문양이 빼곡하게 새겨진 기둥이 중앙의 길을 따라 일렬로 배치되어 있고, 그 끝에 위치한 것은 거대한 황금빛의…… 천칭(天秤).

은하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저것은 단순한 장식, 그러니까 오브제?

아니면 혹시…… 퀘스트창에서 말하는 ‘영면의 제단’이라는 것이 설마 저 천칭을 뜻하는 걸지도 모른다.

“오, 대박.”

그때 누군가의 감탄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연이었다.

“언니, 이것 좀 봐요. 이거 내년 옥션에 출품하면 꽤 짭짤할 것 같지 않아요?”

그녀의 검지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신전 양쪽에 오와 열을 맞추어 배치되어 있는…… 은빛 갑옷이었다.

아연은 그것 중 하나를 가볍게 두드렸다.

투웅─

공허한 소리가 신전 내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갑옷의 내부가 텅 비어 있다는 뜻이었다.

“흠. 어떻게 인벤토리에 넣을 방법이 없나…….”

아연이 다시 한번 갑옷을 건드리려는 순간.

[언니.]

은하 눈앞에 번쩍 떠오르는 노란 메시지창이 떠오름과 동시에,

쿠구구구…….

신전 전체가 무겁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 마치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듯 고요하면서도 웅장한 멜로디에 모두가 척추를 곧추세웠다.

‘무언가 온다.’

그들의 예감은 곧 적중했다.

스릉─

[Lv.??? ‘제단의 수호자’가 침입자를 인식합니다.]

꼼짝도 하지 않고 그곳에 서 있던 은빛 갑옷이 검집에서 장검을 빼내 들었다.

번쩍!

비어 있던 투구 속에서 서슬 퍼런 안광이 섬뜩 비친다. 비단 한 마리뿐만이 아니었다.

척! 척! 척!

[Lv.??? ‘제단의 수호자’가 침입자를 인식합니다.]

시스템창이 연거푸 나타나고 신전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갑옷들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전파되듯 하나씩 차례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제단의 수호자’에게 완벽히 포위당한 상태였다.

그리고.

[주변 몬스터를 모두 섬멸하여 영면의 제단에 바치십시오. (0/666)│보상 : ???]

선택을 재촉하듯 다시 한번 눈앞에 떠오르는 퀘스트창.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가장 먼저 움직임을 보인 것은 제천대성 유환이었다.

“도통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이놈들을 쓰러트려야 된다는 것만은 잘 알겠군.”

콰앙─!

경고도 없이 내리꽂힌 거대 주먹.

퓌시익…….

‘제단의 수호자’의 단단한 갑옷이 일격에 박살 났다. 유리 조각처럼 깨진 갑옷 사이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주변 몬스터를 모두 섬멸하여 영면의 제단에 바치십시오. (1/666)│보상 : ???]

유환은 산산조각이 난 갑옷 파편들을 발끝으로 대충 헤집어 보았다.

역시 예상했던 것처럼 갑옷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즉 놈을 두 번 공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해제 상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환의 맨주먹에 부서진 몬스터. 비록 레벨이 ‘???’로 표시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S급인 그가 애를 먹을 만한 난이도는 아니라는 것. 아마도 많이 쳐도 레벨 30에서 40 사이 정도로 추측됐다.

즉 몬스터 수가 많은 것을 제외하면, 문제 될 것은 없을 테다. 오히려 뿌리 부근에서 재미없는 유충 녀석들을 상대할 때보다 나았다. 이제야 조금이라도 손맛을 느껴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우두둑.

손마디를 꺾은 유환이 힐끔 뒤로 돌아, 나머지 네 사람을 향해 말했다.

“이쪽은 다섯이니 대충 1인당 130마리씩 맡으면 금방일 것 같은데. 할 수 있지?”

마치 그들의 기개를 시험하듯 비스듬히 올라가는 유환의 입꼬리. 그러자,

“아니.”

이준에게서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스윽.

끼고 있던 가죽 장갑을 천천히 벗으며, 이준은 다시 한번 입술을 달싹였다.

“1인당 100마리면 충분해.”

휙!

장갑을 벗은 그가 왼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때마침 그 방향에서 이준을 덮치려던 ‘제단의 수호자’의 투구를 한 손으로 거머쥐었다.

그러나 그의 손아귀에 잡힌 것은 투구뿐. 양손이 자유로운 ‘제단의 수호자’는 이준을 반으로 갈라 버리려고 높게 검을 쳐들었다.

그대로 이준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지던 검이, 돌연 허공에서 우뚝 멈추었다.

“나머지는 내가 맡지.”

“혼자서 말이냐?”

“…….”

유환의 물음에 소리 없이 웃은 이준은 대답 대신 거머쥐고 있던 몬스터의 투구에서 천천히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스르륵…….

추락하듯 아래로 팔을 떨어트렸던 ‘제단의 수호자’가 다시 느릿하게 검을 올려 들었다.

비로소 그 검 끝이 가리킨 것은.

[Lv.??? ‘제단의 수호자’가 침입자를 새롭게 인식합니다.]

─이준이 아닌, 뒤편에 서 있던 또 다른 ‘제단의 수호자’였다.

준비는 끝이 났고, 이제 단 한 마디의 명령만이 필요했다.

“죽여라.”

채앵!

‘제단의 수호자’의 검과 검이 사납게 맞부딪쳤다.

그로부터 ‘선택의 천칭’에서의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마에스트로 백이준, 제천대성 유환, 괴도 강아연, 백랑 신시우, 그리고 흑염의 프린세스 차은하. 다섯 명은 아무런 사전 약속도 없이 적당히 흩어져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주변 몬스터를 모두 섬멸하여 영면의 제단에 바치십시오. (371/666)│보상 : ???]

눈 깜짝할 새 ‘제단의 수호자’ 절반을 해치웠다. S급들에 의해 맥없이 쓰러지는 놈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추풍낙엽이 따로 없었다.

카앙─!

날카로운 금속음에 은하가 힐끗 고개를 돌렸다. 근처에서 시우가 ‘제단의 수호자’를 강하게 내려친 것이었다.

얼핏 보면 단순히 손날을 세워 가격한 것처럼 보였으나, 은하는 정확히 포착하였다. 갑옷 표면에 닿기 직전, 시우의 손날을 재빠르게 감쌌다가 사라지는 얼음을.

대놓고 스킬을 사용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전투가 수월해질 텐데, 시우는 그러지 않았다.

얼음과 물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되도록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고, 굳이 사용하지 않더라도 ‘제단의 수호자’를 처치하는 데에 문제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오, 비겁한 놈들! 한 명씩 달려들란 말이야, 한 명씩!”

휙, 휙, 휙!

그 와중에 몬스터들의 투구를 징검다리의 돌처럼 밟아 가며 공중을 누비는 검은 그림자, 괴도 강아연.

몬스터를 향해 불만스럽게 투덜대고 있는 그녀였으나, 사실 비겁한 것은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대충 이렇게 요리조리 피하고 있으면 알아서 다른 이들이 처리해 줄 것이라 믿고 있었으니 말이다.

‘할 만큼 했잖아?’

언니가 없는 동안 지원대 대원들을 지켜 줬고, 그 후에 태동의 뿌리에 진입하여 혼자서 파수꾼을 처치했다. 이 정도면 1인분 역할은 충분히 수행하고도 남은 거 아닌가?

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이상은 수지 타산이 맞지 않다.

대충 자신에게 달려드는 몬스터만 가볍게 상대하는 척하다가, 기회를 엿봐 자연스럽게 다른 헌터에게 넘기면 되겠지. 그럼 알아서 처리해 줄 테니까.

그렇게 그들이 제각각의 방법으로 ‘제단의 수호자’를 상대하고 있을 때.

“…….”

은하는 우두커니 서서 그들의 전투 양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줄곧 이러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유환, 시우, 이준 그리고 아연이 몬스터를 상대하는 동안 은하 역시도 꽤 많은 수의 몬스터를 처치했고, 또 그러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해.’

이렇게 가만히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은하를 향해 달려드는 몬스터가 없었다. 단 한 마리도.

몬스터는 주변에 보이는 인간을 공격하게 되어 있었다. 흔히 말하는 ‘선제공격 시스템’이 그것이었다.

물론 전투를 피해 도망가거나 숨어 버리는 놈들도 드물게 존재했다. 일전에 복계산에서 마주쳤던 요정형 몬스터가 그러했듯이, 자신의 몸을 지켜야 하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경우에는 말이다.

다만 지금 은하가 처한 상황은 조금 달랐다.

은빛 갑옷을 입은 골렘형 몬스터 ‘제단의 수호자’는 복계산의 요정형 몬스터와는 달리 근처의 헌터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즉, 이렇게 판단할 수 있었다.

오직 은하만이 그들의 ‘적대적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는 것이라고.

‘……어째서?’

은하는 까만 시선을 아래로 내려 손에 쥔 양산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이 예전에도 있었던 것 같았다. 언제였던가. 생각에 잠긴 검은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다가 이내 살짝 반짝였다.

‘언노운 게이트.’

오랜 기간 갇혀 있었던 그곳에서 은하는 레벨 30 ‘붉은 눈의 흑호’와 조우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흑호를 죽였고, 심지어는 먹었다. 이유는 단 하나, 살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던가.

은하는 시우와 만나기 직전, 그러니까 언노운 게이트 탈출 직전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그때 분명…….

‘흑호는 나를 만나면 도망가기 시작했지.’

원래는 포악한 성미의 범고래가 인간에게만큼은 온화한 이유에 대해, 일각에서는 범고래가 인간에게 학살당했던 기억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언노운 게이트의 흑호가 어느 순간부터 은하에게 설설 기기 시작한 이유에 대해서도, 은하는 범고래 설과 비슷한 개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일 그런 것이라면 흑호는 그렇다 치더라도 방금 이곳에서 조우한 ‘제단의 수호자’가 은하를 공격하지 않을 이유는 없을 텐데.

휘릭─ 콰직!

사뿐히 날아오른 은하는 아연을 공격하려는 몬스터의 목덜미를 양산으로 가격했다.

[주변 몬스터를 모두 섬멸하여 영면의 제단에 바치십시오. (653/666)│보상 : ???]

“언니, 땡큐!”

이리저리 잘도 피해 다니던 아연이 저 멀리서 가볍게 손을 흔든다.

그러나 은하는 아연을 향해 시선을 돌리지 않고 발밑에 부서진 갑옷 파편을 응시했다.

‘……역시.’

방금도 그랬다. 양산으로 내려치기 직전, 몬스터는 분명 고개를 돌려 은하를 발견했다. 그러나 공격 대상을 아연에게서 은하로 바꾸지 않았다. 양산에 의해 갑옷이 박살 나기 바로 직전까지도 말이다.

방금 일로 은하는 강하게 확신했다.

어떠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이 ‘제단의 수호자’들은 은하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령 은하가 그들의 투구를 유리처럼 깨부숴 버릴지언정.

이후에도 각자의 시야에서 전투는 이어졌다.

[주변 몬스터를 모두 섬멸하여 영면의 제단에 바치십시오. (660/666)│보상 : ???]

그리고 어느덧 퀘스트 완료를 목전에 두게 되었다.

부상자는 없었다. 한 나라를 대표할 정도의 실력자들이 이렇게 여럿 모여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

“퀘스트에서 말하는 영면의 제단은 역시 저것이었군.”

풀어진 손목 붕대를 다시 동여매며, 유환이 저 앞을 바라보았다.

하얀 대리석 계단 위에 위치한 거대한 황금 천칭.

몬스터를 쓰러트릴 때마다 사체는 자동으로 천칭의 저울 위로 이동되었고 곧 하얀 불길이 일어 그것을 삼켜 버렸다. 이 장소가 신전이라는 가정하에 하얀 불길은 일종의 성화(聖火)로 보였다.

“아마 이것이 마지막인 것 같은데.”

툭.

‘제단의 수호자’가 시우에 의해 바닥으로 힘없이 내동댕이쳐졌다. 곧이어, 여태껏 그랬듯 눈부신 빛에 휘감긴 갑옷 껍데기는 눈 깜짝할 새 천칭 위로 이동되었다.

슈우욱…….

몬스터는 파편조차 남기지 않고 새하얀 성화와 함께 깨끗하게 사라졌다.

“생각보다 별것 없었군.”

마지막 한 마리가 제단에 바쳐지는 것을 응시한 유환이 몸을 휙 돌렸다.

S급끼리 모여 ‘선택의 천칭’에 진입하기로 한 것이 정답이었던 것이다. 만일 이곳에 진입했던 인원이 일반 B급 혹은 C급 정도의 헌터들이었다면 이렇게 간단히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유환은 눈앞에 선 자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우선 제대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괴도 아연을 예외로 두고, 이미 실력이 입증된 아우님도 제외하자.

그렇다면 남는 것은 이준과 시우였다.

600마리가 넘는 몬스터 중 100마리 이상을 아군으로 만들어 조작한 이준.

그리고 별다른 스킬 없이 맨손을 이용하여, 즉 신체 능력만으로 몬스터를 제압한 늑대의 청년.

유환 역시 몬스터를 상대하느라 그들의 전투를 유심히 관찰할 수는 없었지만, 두 사람 다 유환에게 지지 않을 만큼의 수를 처치한 것은 확실했다.

‘언젠가 한번 겨뤄 보고 싶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승부욕을 일단 뒤로 밀어 둔 채, 유환은 시선을 돌려 시스템창을 확인했다.

언제까지고 로제와 밀덕 꼬맹이, 늑대 놈에게 바깥을 맡기고 있을 수야 없었다. 몬스터를 모두 섬멸하였으니 이젠 보상을 받고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런데…….

“음?”

유환의 눈썹이 슬쩍 씰룩였다.

알 수 없는 눈으로 시스템창을 응시하던 그는 곧 고개를 휙 돌려 주변을 확인했다.

고요한 신전 내부.

분명 단 한 마리의 몬스터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에야, 유환은 다시 시스템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 이준도, 시우도, 아연도, 그리고 은하도 아무 말이 없었다.

아마도 그들은 모두 같은 것을 보고 있는 것이리라.

[주변 몬스터를 모두 섬멸하여 영면의 제단에 바치십시오. (665/666)│보상 : ???]

─아직도 종료되지 않은 퀘스트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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