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29)화
(129/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29)화
(129/306)
#129. 선택의 천칭
2022.12.07.
게이트 남쪽 지역.
헌터 BJ ‘혀기월드’ 남혁은 즐거운 얼굴로 휴대전화를 응시하고 있었다. 액정 속 시청자들의 채팅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갱신되는 중이었다.
“여러분, 방금 스테이지 클리어 시스템창이 떴어요. 저도 몰랐던 사실인데 이곳에 괴도가 있나 봅니다.”
S급 헌터 괴도. 그녀의 등장만으로도 방송을 시청하고 있던 이들의 관심이 배로 뛰었다.
각종 논란에 휩싸여 몇 년 전부터 자취를 감춘 그녀가 돌연 이번 남해안 언노운 게이트 작전에 나타난 것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서? 괴도는 어딨음?]
[엥ㅋㅋㅋㅋㅋㅋ 은퇴한줄알았는데]
[S급 개꿀인생 보장 꽃길인데 은퇴를 왜 함? 나같아도 절대 안한닼ㅋㅋㅋㅋㅋ]
[외국에서 스카웃받아서 날랐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나봄ㄷㄷ]
[제ㅔㅔㅔ엔장 괴도 눈나 믿고 있었다구ㅠㅠㅠㅠ]
[아니 괴도어딧냐고…… 말만하지말고 직접 보여줘야알지 또 구라치는거아니냐]
[낚시임]
시청자들은 괴도의 얼굴을 보여 달라 아우성이었다.
남혁도 자신의 방송에 괴도의 얼굴을 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괴도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아…… 우선은 방송 끄지 말고 기다려 보세요, 여러분. 차근차근 보여 드릴 테니까.”
남혁은 어떻게든 시간을 벌었다.
원래라면 방송 시간이 길어질수록 시청자 수가 뚝뚝 떨어져야 정상이었다. 늘 그래 왔으니까.
그러나 오늘은 정말이지 역대급이었다.
시청자 수는 벌써 100만 명을 훌쩍 넘어 있었다. 심지어 거기서 멈추지 않고 실시간으로 쭉쭉 오르는 중.
내 방송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남혁은 그 숫자를 보고서도 믿기지 않아 뺨을 꼬집어도 보고 눈을 비벼도 봤다.
─그러나 벅찬 감정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지금 혀기월드 뒤에 헌터 죽은거 아냐??ㄷㄷㄷ 시체같은데…… 소름……]
[아니 S급 다 어디갔어? 지금 어케되고 있는거야?]
[아 ㅅㅂ 나 여수사는데 어캄]
시청자들이 점차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인터넷 방송 특성상 전투 장면이나 부상을 입는 모습 따위가 있는 그대로 송출될 수밖에 없었다.
카메라를 든 남혁이 주변을 활보할수록, 시청자들은 게이트 내부 상황을 적나라하게 목격했다.
네임드 헌터, 그리고 대장급 헌터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주변이 한시적으로 정리된 것은 사실이었으나 대규모 전투의 폐해까지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
중상을 입고 치료 헌터에게 맡겨진 대원, 벽에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대원, 들것에 실린 채 치료 부대가 있는 중앙으로 옮겨지는 대원 등 딱 봐도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
더 이상 고레벨 몬스터는 나타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발밑에는 여전히 유충들이 꾸물꾸물 기어 다녔고 그중 일부는 성충이 되어 헌터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즉, 각 부대 대장들이 동쪽에 나타났다는 ‘통로’에 모여 있는 지금도 전투가 완전히 끝나지는 않은 상태였다.
지금도 크고 작은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었으며 많은 헌터들이 언제 끝날지 모를 전투에 대해 슬슬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그 불안이 방송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 것이다.
[ㅠㅠㅠㅠ우리 부모님 전남사시는데…… 방금 전화해보니까 아직 암것도 모르고 계셔ㅠㅠ 지금 당장 서울 올라오라고 했는데ㅠㅠ 표 벌써 없음 어떠캐ㅠㅠㅠㅠㅠㅠ]
[저기 섬이라고햇잖아 갠찮음 못나옴]
[뭐가 못나와?;;; 보니까 몬스터들 날개붙어있던데? 게이트 폭주하고 몹들 유출되면 바다건너 반도땅 밟는것도 시간문제임]
[이러다가 한국도 ㄹㅇ 패망루트 타는거아님? 걍 아이슬란드처럼 무인국가되는거아니냐고;]
[─부적절한 단어가 섞인 문장입니다. 깨끗한 채팅 문화에 힘써 주세요!─]
“아, 아니…… 여러분 왜 그러세요. 여기에 모인 S급만 해도 몇 명인데……. 아까 보셨잖아요. 우리 대장도 엄청 세다니까요. 아! 그리고 괴도도…….”
[아니 그래서 S급들 지금 어딨냐고 안보이잖아 ㅋㅋㅋㅋㅋㅋㅋㅋ]
[혀기월드 이 새X 걍 어그로임ㅋㅋ 2년 전인가 괴도도 마에스트로 루트 밟아서 일본에 팔려갔는거 알 사람 다 아는 기정사실인데 무슨ㅋ]
[뭘 다 어그로야 그러면서 방송은 잘도 보고있쥬? 님도 똑같쥬?]
[와 실화냐 괴도가 일본에 팔려갓다는 개소리 믿는 놈이 아직있네ㅋㅋㅋㅋㅋㅋ]
[대장님 데려와 대장님 데려와 대장님 데려와 대장님 데려와 대장님 데려와 대장님 데려와 대장님 데려와]
“여, 여러분. 우선 진정하시고…….”
남혁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어떻게든 그들의 열기를 가라앉혀 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평균 시청자 수 10명 안팎이었던 무명 BJ 혀기월드에게 벅찬 일일 수밖에.
그는 자신만의 고유 스킬을 이용하여 본인이 원한다면 언제 어디서라도 방송을 켤 수 있었다. 타 헌터 BJ에 비해 훨씬 유리한 스킬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방송을 튼 후가 문제였다.
남혁의 스킬은 방송을 틀기에 편리할 뿐이었던 것. 전투에 적합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보기에 화려한 스킬도 아니었다.
복계산 전투에서 합격한 것도 순전히 운이 좋았던 까닭이었다. 그마저도 파티원을 잘 만나지 못했더라면, 흑염의 프린세스가 나서서 보스를 무찌르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즉 남혁은 성공에 대한 집착과 열정만이 앞설 뿐, 본인이 가지고 있는 소스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스스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화면을 도배하다시피 올라오는 채팅의 엄청난 기세에 문득 겁이 나는 것은.
‘……그냥 지금이라도 방송 닫아야 하나?’
가슴 한구석에서 그런 고민이 드는 순간,
[지금 인터넷이랑 tv에서 난리났음 해외방송도 탄 것 같은데]
[헐 링크좀]
[https://news.never.com/main/read.never?mode=LSD&mid=shm&sid1=179&aid]
[ㅋㅋㅋㅋ혀기월드 떡상 각?]
“…….”
남혁은 휴대전화를 쥔 손에 꾹 힘을 주었다.
그래, 이게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그는 게이트 입장 전에 작성했던 비밀 유지 각서를 무시하고 방송을 틀었다. 이것이 일종의 위법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헌터 자격증을 반납할 만큼의 각오를 다진 것이다.
그는 액정 가장자리에 떠오른 숫자를 확인했다. 시청자 수 100만을 넘긴 지가 언제라고, 그새 120만을 돌파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200만, 어쩌면 300만도 꿈이 아닐 것이다.
‘역시 여기서 물러날 순 없어.’
남혁은 밝은 미소를 입에 걸고 카메라를 응시했다.
“자, 여러분. 후원 많이 부탁드리고요! 잠시 광고 보시고 다시 방송 진행하겠습니다.”
* * *
“이제 확실히 정해졌군.”
유환이 천천히 팔짱을 끼며 말했다.
뿌리에 남기로 한 닥터 플랜트와 트릭스터는 부대원들이 있는 위쪽으로 돌아갔고, 이곳 구멍 아래에 남은 것은 제천대성, 괴도, 흑염의 프린세스, 마에스트로, 그리고 늑대 소속의 청년까지 총 다섯 명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함정일 수도 있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지. 들어가자마자 뿔뿔이 흩어지게 될 가능성도 있어.”
그러니, 이것만큼은 미리 전해 두지.
황금빛 문을 응시하고 있던 유환은 그리 덧붙이며 고개를 돌렸다.
“우선 사항은 승리가 아니라 생존이다. 무사히 통로를 확보하여 다시 본대에 합류해 대원들을 이끄는 것. 그 책임에 대해서만 생각…….”
말을 끝맺기도 전에 유환이 입을 닫았다.
“언니, 우리 손잡고 들어가요.”
“왜?”
“털보 아저씨가 뿔뿔이 흩어질 수도 있다잖아요. 요니는 울 언니랑 떨어지기 싫단 말이양.”
“…….”
은하에게 매달려 콧소리를 내는 아연과,
“게이트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뒤에 숨어서 구경만 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더니.”
“국가급 위기에 외국인도 나서는데 한국인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살벌한 눈빛을 교환하는 이준과 시우.
유환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는 자는 은하를 제외하고는 없는 것 같았다.
턱을 긁적이며 눈앞의 광경을 응시하던 유환은 마저 남은 말들을 삼키기로 했다.
그래, 어차피 이곳에 모인 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세간에 실력을 증명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경각심을 부여하고 이끌 인물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미 정상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단, 저 늑대의 청년만은 제외하고.
후드를 뒤집어쓴 저 남자.
유환이 그를 만나는 것은 오늘로 두 번째였다. 지난번 협회에서의 출정식 때 함께 술잔을 나눈 결과, 유환은 자신만의 기준으로 그를 괜찮은 사내라 판단했다.
하지만 사람의 됨됨이를 떠나, 그의 실력에 대해서는 미지수였다.
랭크를 물어볼까 했지만 금방 관뒀다. F급인 흑염의 프린세스가 이곳에서 S급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와중에, 더 이상 그깟 랭크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게다가…….
“…….”
유환은 이준과 살벌하게 눈싸움을 벌이는 시우의 옆모습을 가만히 관찰했다.
처음 문으로 진입하기로 했던 것은 이 남자가 아니라 이하균, 특임대의 대장을 맡고 있는 늑대 놈이었다.
그런데 돌연, 뒤에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 남자가 하균을 저지한 것이다.
‘아니, 내가 가지.’
하균은 그 말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물러날 뿐이었다. 늑대의 2인자가 랭크도 이명도 불명인 저 남자에게서, 순한 양처럼 말이다.
그를 바라보며 유환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답은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하균이 인정할 만큼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거나 혹은─.
‘신귀훈의 아들.’
태어날 때부터 몸이 병약해서 헌터로서 각성은커녕 저택에서조차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다던…….
하지만 눈앞의 이 사내는 아주 멀쩡히도 걸어 다녔다. 유환과 함께 늑대를 신나게 까기도 했고.
“시간이 지체됐습니다. 진입하죠.”
이준에게서 시선을 거둔 시우가 문을 향해 다가섰다. 유환의 붉은 시선이 그의 뒷모습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나.’
어차피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곧 알게 될 것이다.
유환은 아무 말 없이 시우를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나머지 인원도 마찬가지였다.
황금색 문 앞에 차례로 선 다섯 명의 인원. 그들은 세로 길이만 따져 보아도 성인 남성의 두 배가 넘는 크기의 문을 결연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내가 열겠다.”
유환이 문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커다란 손이 문고리에 닿기 바로 직전, 은하는 왼쪽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힐끗 고개를 돌렸다.
“…….”
“…….”
그리고 소리 없이 마주치는 시선.
할 말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준의 잿빛 눈동자는 은하를 집요하게 담아 내고 있었다.
문득 어머니의 묘 앞에서 이준을 발견했던 일이 떠올랐다.
‘왜?’
그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달칵.
문이 열린다.
문 사이로 새어 나온 눈부신 황금색 빛줄기가 두 사람의 시선을 잘라 내듯 가로질렀다.
[‘선택의 천칭’으로 진입합니다.]
빛무리가 번진 각자의 시야에는 더 이상 서로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은하는 왼쪽을 향한 시선을 끝까지 거두지 않았다. 이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야를 가득 채운 빛무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선택의 천칭’ 진입에 성공하였습니다.]
[돌발 퀘스트! 주변 몬스터를 모두 섬멸하여 영면의 제단에 바치십시오. (0/666)│보상 : ???]
새로운 시스템창이 눈앞에 뜰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