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28)화
(128/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28)화
(128/306)
#128. 통로
2022.12.06.
남해안 게이트 내부, 북쪽 구역.
[‘경계의 파수꾼’이 ‘괴도’에 의해 쓰러졌습니다!]
[생명의 가호 효과가 해제됩니다.]
[태동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던 통로가 활성화됩니다.]
[ - - - Loading - - - ]
그곳에 모여 있던 특임대 대원들 앞에도 푸른 시스템창이 나타났다. 물론 시우에게도.
담당 구역이 달랐던 만큼 상황 파악을 쉽게 할 수는 없었으나 대충 짐작할 수는 있었다.
시스템창에서 말하는 ‘통로’가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괴도, 그러니까 그 건방진 소녀가 무언가 ‘열쇠’를 찾은 것이다.
시스템창이 떠오른 후부터 생흡충들의 레벨 업이 멈춘 것이 그 증거. 여전히 개체 수는 많지만 재생성 주기도 확연히 줄어든 듯했다.
‘슬슬 끝이 보이는 건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홀로 선 시우는 주변을 유심히 둘러보았다.
특임대 기준으로, 지금까지 큰 부상자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특임대는 늑대 길드 고유의 고강도 훈련을 받아 온 헌터로만 구성되어 있다. 개개인의 랭크로만 따지면 트릭스터가 이끄는 7인 부대에 견줄 수 없겠으나, 협동력과 판단력 그리고 위기 대처 능력으로 따지자면 프로 중의 프로라는 소리였다.
심지어 시우를 대신하여 표면적으로 특임대를 이끌고 있는 것은 늑대의 부마스터 이하균이었으니, 30레벨 정도 몬스터를 상대로 큰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후드 아래에 슬쩍 비친 푸른 눈동자가 일순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생흡충의 수가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다고는 하나, 반대로 줄어들지도 않았다. 해치우고 또 해치워도 일정 수만큼 또다시 리스폰되는 것이다.
마치 신체에 필요한 만큼의 혈액을 공급하는 심장처럼 이 땅은, 이 공간은 그렇게 몬스터를 ‘생성’해 내고 있었다.
A급 이상의 헌터 혹은 S급 헌터가 직접 나서서 한 번에 많은 수의 몬스터를 몰살하더라도, 단순히 잠깐의 시간을 벌 뿐이었다.
“도련님.”
탓.
검은 가면의 남자, 하균이 시우 곁에 가볍게 착지했다.
“어떻게 됐지?”
“분부대로 통찰 스킬을 가진 헌터들을 시켜 확인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도련님의 예상이 맞는 듯합니다.”
하균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 거대한 뿌리가 기력을 흡수하고 있는 것 같다더군요.”
“그래서.”
“뿌리를 파괴하려 시도해 보았지만 불가능했습니다. 시스템이 허용하지 않는 듯합니다.”
“…….”
시우는 이 공간 전체를 감싸고 있는 뿌리를 응시했다. 그것은 마치 전설에나 나오는 ‘세계수’의 뿌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대하고 굵었다.
“뿌리가 기력을 흡수하는 방향은 확인했나?”
“위쪽입니다.”
하균의 대답에 시우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만일 그들의 예상이 맞다면 지금 그들이 있는 이곳은 ‘제1관문’.
……즉.
‘이 위에 ‘제2관문’이 기다리고 있다.’
시우는 뿌리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아마 다른 부대에도 눈치챈 자가 있을 거야. 곧 전보가 오겠지. 몬스터 수가 줄어들지 않는 이상 전원이 이동할 수는 없어. 이곳에 남을 인원을 선별하고, 쓸 만한 자들만 골라 이동한다.”
“예.”
“그리고─.”
뿌리에 고정되어 있던 푸른 시선이 힐끗 하균에게로 향했다. 무언가 이야기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시우가 짧은 순간 주춤했다.
“분부하시죠.”
하균은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시우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버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가 봐.”
……남쪽 구역을 맡은 지원대의 상황을 알아보고 오라, 그렇게 명하려고 했다.
게이트에 진입한 다섯 부대 중, 치료 부대를 제외하고 가장 전투력이 낮은 부대였으니까. 그리고, 선배가 이끄는 부대였으니까.
‘……괜찮을까.’
괜찮겠지. 괜찮을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선배잖아. 무슨 일이 있을 리가 없다.
마치 주문처럼 그렇게 되뇌면서도, 시우는 어느새 남쪽 방향으로 걸음을 딛고 있었다.
‘……그냥 모른 척, 지나가듯이 확인만 해 보고 올까?’
그래. 더군다나 이곳에는 트릭스터와 괴도, 심지어는 마에스트로까지 있지 않은가. 그들이 선배에게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다.
아주 잠시만, 멀리서 짧게 그녀의 상태만 확인하고 오는 거야.
그렇게 결심한 것처럼 다리를 앞으로 휘적거리다가도, 얼마 가지 않아 우뚝 제자리서 굳어 버렸다.
‘아니야.’
시우는 잘근 손톱을 깨물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이 아직도 생생했다.
협회에서 간이 출정식을 열어 준 그날 밤. 답지 않게 술에 취해 어떤 헛소리를 했는지, 지금도 너무나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당장 은하와 마주치면 어떤 표정으로, 어떤 목소리로, 어떤 내용으로 대화를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쿵 내려앉고 얼굴이 화끈거려서, 시우는 습관처럼 마른세수를 했다.
“…….”
그러다가 툭, 손을 아래로 떨구었다.
그래…… 물론 선배의 성격에 그런 것을 신경 쓸 것 같지는 않았다. 벌써 까맣게 잊고 있을 가능성도 높았다.
이렇게 무안하고 창피하고 어색한 건 자신뿐일지도 몰랐다.
우스운 것은, 나만 이럴지도 모른다는 그 생각마저 무안하고 창피하고 어색하다는 것이었다.
──정말, 미치겠다.
시우는 커다란 손을 들어 철퍼덕 눈을 덮었다. 가슴을 가득 채운 영문 모를 답답한 감각. 그것을 견디지 못해 결국 느릿한 한숨을 내뱉는데.
“도련님?”
“……!”
소스라치게 놀란 시우가 눈을 덮고 있던 손을 내리고 홱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 분부를 받고 사라졌던 하균이 다시 돌아와 있었다.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혼자 마른세수를 했다가 이번에는
긴 한숨마저 뱉은 시우가 무척이나 이상하게 보였던지, 가면 너머 하균의 눈빛이 묘했다.
“……문제가 있나?”
시우는 태연을 가장하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동쪽 구역, 제천대성의 제1대가 전보를 보냈습니다.”
전보.
그 단어에 시우가 살짝 벌어져 있던 입술을 다물었다.
* * *
동쪽 구역.
“아저씨, ‘통로’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전보를 듣고 도착한 민주는 유환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통로’ 언급을 하는 것을 보니, 서쪽 구역을 담당하던 트릭스터에게도 그들과 같은 시스템창이 팝업된 모양이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불렀다.”
유환은 이곳에 모인 인원들의 면면을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지금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태동의 뿌리’로 향하는 마법진을 발견한 일, 그리고 괴도가 내부에서 파수꾼을 해치운 순간 ‘통로’가 열린 일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한 유환은,
“시스템창이 말하는 통로는 아무래도 이것인 듯해.”
자신의 뒤를 힐끗 가리켰다.
그곳에는 찬란한 황금빛의 문이 있었다.
이 문은 파수꾼을 처리한 아연이 ‘바깥’으로 되돌아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생성되었다. 위치는 게이트 동쪽 지역의 지하. 그러니까, 마법진을 발견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벽이나 바닥, 하물며 천장에 붙어 있는 것도 아닌, 그저 공중에 떠 있는 거대한 문. 표면에는 칼과 천칭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태동의 뿌리에 진입했던 괴도의 말에 따르면 ‘통로’에 대한 정보는 따로 얻은 것이 없다는군.”
유환이 아연을 향해 힐끗 시선은 던졌다.
제멋대로인 데다 무책임한 녀석이라고만 생각했다. 지금도 그 평가 자체가 달라지진 않았지만, 이 소녀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S급이란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겠다.
파수꾼을 무찌르고 돌아온 아연은 상처는커녕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인벤토리를 확인하며 입꼬리를 씰룩대고 있었다. 뭔가 괜찮은 아이템이라도 획득한 걸까. 어쨌든 독 안개가 깔린 필드에서 전투를 마치고 돌아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아연에게서 시선을 거둔 유환은 다시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 태동의 뿌리 필드와 파수꾼이라는 몬스터가 있었던 장소처럼 이 ‘통로’ 역시 다른 이공간으로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다. 앞서는 다행히 클리어 후에 괴도가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글쎄, 이번에는 어떨지.”
유환은 붉은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뜨며 정체불명의 문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문 표면에는 칼과 천칭 문양이 똑같이 새겨져 있었다. 물론 그 문양의 의미를 아는 자는 이곳에 없었다. 이것이 어디로 연결되는 ‘통로’인지도, 이 너머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쩌면 통로 안에 또 다른 통로가 있을 수도 있고, 아주 다른 공간으로 이동해 버릴지도 몰라. 한마디로 더럽게 답답한 상황이다. 그래도 한 가지만은 확실하지. 부딪혀 확인해 보지 않는 이상, 이대로는 답이 없다는 것.”
유환은 자신의 주변에 모인 면면들을 향해 차례로 시선을 던졌다.
로제, 민주, 은하, 아연, 하균, 출정식 때 대화를 나누었던 늑대의 훤칠한 청년,
그리고─.
“…….”
마에스트로 백이준까지.
모두의 얼굴을 확인한 유환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참고로 나는 갈 생각이다.”
태동의 뿌리에서 충분히 확인했다. 이 너머에 무엇이 있든, 웬만한 실력파 헌터 정도로는 턱도 없을 것이다.
재민에게는 불가했던 일이 S급 괴도가 나선 후에야 정리되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 정도, 혹은 그 이상의 난이도를 예상해야만 할 것이다.
“아무래도 대가리가 나서야 할 때인 것 같거든.”
유환의 말에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모두가 생각에 잠긴 듯해 보였다.
물론 이곳에 모인 ‘대가리’ 중 겁을 먹은 자는 없었다. 다만 그들은 자신이 통솔하는 부대를 뒤로한 채 정보 하나 없는 ‘통로’에 뛰어드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아닌지 고심해야만 했다.
“그냥 다 같이 가면 안 돼?”
팽그르르 머리를 굴리던 민주가 단순 명료한 답을 내놓았다. 소수 정예인 군단 길드만이 도달할 수 있는 답이었다.
“그건 불가능해.”
로제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은 따지자면 게이트의 출입구 부근이야. 생흡충을 완전히 박멸하지 못하는 이상 이곳을 몽땅 비워 버리는 건 무모한 짓이야.”
그 주장에도 일리가 있었다.
로제는 지금 게이트 폭주 현상으로 민간인이 피해를 입을 일을 염려하고 있는 듯했다.
게이트 폭주 현상이란, 쉽게 말하자면 게이트 내부의 몬스터 수가 불어난 끝에 결국 출구를 뚫고 외부로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현상을 일컬었다.
해당 현상은 오랫동안 방치된 게이트, 혹은 토벌에 실패하거나 공략에 긴 시간이 소요될 경우 주로 발생했다.
“생흡충이 더는 불어나지 않게 수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전력은 이곳에 남겨 두어야 해. 최소한 말이야.”
“음……. 이모 말대로라면 S급 전부가 이동할 수도 없잖아. 우리가 다 통로를 넘어가 버리면 남은 찌꺼기들끼리 여길 맡아야 할 텐데.”
찌, 찌꺼기…….
거침없는 마스터의 발언에 곁에 있던 준환이 크게 헛기침했다.
민주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는 잘 알겠다. S급 전원이 자리를 비우는 순간, 이곳은 이곳대로 위기가 찾아올 것을 염려하는 것일 테다.
“두 쪽 다 맞는 말이야.”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은 자유다. ‘통로’에 진입할지, 이곳에 남아 부대원들과 함께 생흡충을 상대할지 그건 본인들이 알아서 해.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가겠다.”
그리 말한 유환은 수수께끼의 거대한 문, ‘통로’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의 뒤를 아연이 가볍게 밟았다.
“나도 감.”
태동의 뿌리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였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 문 너머가 어떻게 되어 있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벌레가 득실대는 이곳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 확신이 아연을 움직이게 했다.
“저도 가죠.”
늑대의 하균 역시 그들 곁에 섰다.
늑대에게 후퇴만큼 어울리지 않는 단어는 없다. 출입구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바에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것.
“……난 이곳에 남겠어.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전투인 만큼 치료 부대의 역할이 중요할 테니까.”
로제는 남기를 결정했고,
“저희 군단도 남겠습니다.”
민주…… 정확하게는 준환도 남기를 결정했다. 일전에 언노운 게이트에서 중상을 입었던 민주가 여전히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응? 왜? 난 갈 건데.”
통로 너머에 대한 호기심에 두 눈을 반짝이고 있던 민주가 김이 샌 듯한 얼굴로 준환을 바라보았다.
준환은 평소답지 않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소리십니까, 마스터? 남해안 게이트 토벌 작전에 참여하겠다는 고집을 들어주는 대신 절대 무리하지 않기로 저희와 약속했지 않습니까.”
“…….”
문 너머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는 이상, 무턱대고 그곳에 마스터를 보낼 수는 없었다. 두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로.
게다가 민주, 트릭스터의 스킬은 대부분 수류탄이나 바주카를 이용한 광역 공격기. 그만큼, 생흡충을 상대로 한 물량전에서 엄청난 힘이 되어 주었다.
“더 없나?”
문 앞에 선 유환이 물었다.
결국 ‘통로’에 진입하기로 한 것은 유환과 아연 그리고 하균, 세 사람뿐이었다.
“……나도 가겠어.”
또각─
맑은 구두 소리와 함께 은하가 입을 열었다.
‘이곳이 정말 언노운 게이트라면.’
그날 은하가 그곳에 갇혔던 이유도, 12신수에 포함되지 않는 고양이에 대한 정보도, 어쩌면 그 밖의 무엇이든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곳 뿌리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지원대가 조금 걱정이긴 하지만…….’
고레벨 몬스터가 정리된 지금, 여기 다른 S급들이 남아서 헌터들을 묶어서 통솔해 준다면 괜찮을 것이다. 그보다 게이트 중추로 진입할 통로를 확보하는 것이 우선일 것.
“왜 나서지 않나 했다.”
은하의 지원에 유환이 만족스레 웃었다.
한편 구석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시우가 남들 눈에 보이지 않게 눈썹을 들어 올렸다.
‘……선배?’
통로에 진입할 생각인 건가?
‘그렇다면 나도─.’
멈칫.
저도 모르게 은하를 따라 걸음을 옮기려던 시우가 가까스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 중 시우의 정체를 아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장급의 헌터가 통로 진입을 자원하는 가운데, 정체불명의 남자가 따라서 그에 합류한다면 의심을 살 것이 뻔했다.
그러니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옳았다. 굳이 나서지 않아도 돼. 그래, 생각해 보면 나설 필요 따위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우의 결심은 곧 터무니없을 정도로 와르르 무너져 내리게 되었다.
“나도 가지.”
은하 곁에 성큼 다가선 남자.
마에스트로 백이준.
그를 본 순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