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26)화 (126/306)


#126. 일대일 전투의 일인자
2022.12.04.


“사, 살려……!”

촤아악─

아연의 검은 단도가 거대한 생흡충의 배를 갈랐다.

보랏빛 혈액이 사방으로 튀는 가운데, 아연은 또다시 탓! 하고 뛰어올라 근처의 다른 헌터에게로 이동했다.

‘끝이 없어.’

레벨이 오른 생흡충은 그만큼 공격력과 방어력이 상승했을 뿐만 아니라 눈알을 빨갛게 물들이며 급격히 흉포해졌다. 마치 누군가 보이지 않는 스위치를 누른 듯 급격한 변화였다.

지원대 인원은 약 60명. 그중 A급 헌터는 아무도 없고, 그나마 B급 헌터마저 5명이 넘지 않았다. 몬스터의 레벨이 상승한 이상 지원대만으로 남쪽 지역 전체의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은 힘에 겨웠다.

게이트 중앙에서 치유 헌터들이 지원해 주고는 있었지만, 헌터의 체력과 마력에는 바닥이라는 것이 있는 법.

‘이래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수준인데.’

단도를 바로잡은 아연이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우, 우왁!”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비명에 아연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패시브 ▶ ‘그림자 베기’ 활성화. 적의 시야 밖에서 첫 공격에 성공할 경우 100% 치명타를 가합니다.]

[급소 적중 시 일정 확률로 ‘일격 필살’ 효과가 적용됩니다.]

촤악! 툭.

생흡충의 머리가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눈 깜짝할 새 깔끔하게 절단된 목과 머리. 절단 부위는 마치 자를 대고 자른 듯 반듯했다.

아연은 얼굴에 튄 진득한 혈액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 뒤로 돌았다. 그리고 제 등 뒤에 숨어 벌벌 떨고 있는 한심한 헌터를 보며 쯧 혀를 찼다.

아까 휴대전화를 만지작대며 방송을 켠 것 같던 놈이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지금에도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꼭 쥐고 있는 모습이 한심하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었다.

[??????]

[뭐임? 방금 뭐임????]

[와 저 여자애 ㅈㄴ 쎈데 누구지]

[저 정도면 최소 A급인 것 같은데]

[아 잠만ㅡㅡ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누구였뜨라]

헌터 BJ 혀기월드. 그의 휴대전화 속 시청자들은 갑작스레 등장하여 일격에 생흡충을 반으로 갈라 버린 소녀에게 이목을 집중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연이 알 바가 아니었다. 아연은 성큼성큼 걸어가 남자, 남혁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저기요, 아저씨.”

“네, 네……?”

남혁은 저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소녀를 향해 저도 모르게 존대를 했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이놈들 레벨 높아진 거 안 보임? 단독 행동 노노.”

“죄, 죄송…… 아니 미안합니다.”

털썩.

아연은 쥐고 있던 남혁의 멱살을 생각보다 빨리 놓아 주었다.

“나도 뭐, 먹고살자고 하는 일을 방해할 생각은 없는데요─.”

그녀의 분홍색 눈동자가 삐딱하게 남혁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가 소중히 쥐고 있는 휴대전화에 닿았다.

“사람이 때와 장소를 구분할 줄도 알아야지.”

“…….”

“응? 여기서 벌레 새끼한테 뒤져 버리면 그땐 방송이고 돈이고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요.”

언더스탠? 아연은 팔짱을 낀 채 남혁을 올려다보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팩폭오지고요]

[맞말ㅇㅈ]

[혀기월드 한마디도못하쥬?ㅋㅋㅋㅋㅋㅋㅋ]

[아니 누가 얘 정체좀알려주실분?? 어디서 본것같은데 기억이 안남ㅠㅠ]

남혁은 휴대전화를 슬그머니 등 뒤로 숨겼다.

“네, 죄송…… 아니 감사합니다. 구해 주셔서…….”

다만 기어코 방송은 끄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시청자 수를 올릴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간신히 구명받은 지금도 남혁의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이 가득했다.

“저, 혹시 이명이 어떻게 되시나요?”

“그건 알아서 뭐 하게요.”

“구해 주셨으니 그, 보답이라도……,”

“보답? 돈이라도 주려고요?”

“네?”

“아님 됐고.”

아연은 도약을 위해 뒷발에 힘을 주며 덧붙였다.

“어쨌든 내 말 잘 알아들었으면 여기 있지 말고 저어기, 동료들한테 가요.”

타앗!

그리고 팝콘 튀듯 가볍고 빠르게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소녀.

<시청자 수 : 2,986명>

어느덧 BJ 혀기월드의 시청자 수가 3천에 가까워지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런 것을 알 리가 없는, 알 생각도 없는 아연은 재빨리 다음 헌터를 구출했다.

그러나 몇 번을 반복하더라도 쏟아지는 몬스터 떼 앞에서는 의미 없는 일일 뿐이었다.

‘미치겠네. 역시 괜히 왔나…….’

지금 이 순간에도 전투력이 낮은 헌터들은 레벨 35 이상의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에 목숨을 걸고 있는 상황.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놈들의 레벨이 상승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어느 시점에서 또 한 번 성장하게 될지 몰라 불안했다. 그러니까 놈들의 천정이 레벨 40일지, 혹은 그 이상일지 지금으로서는 예측할 수 없단 소리였다.

현재 눈앞에 보이는 생흡충의 수만 하더라도 최소 수백.

‘진짜 노답 상황이다.’

이 많은 개체를 상대로 아연 혼자서 지원대 전원을 지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 제아무리 S급이라고는 하지만 일대일 전투에 특화된 그녀에게는 이렇듯 많은 수를 한 번에 쓰러트릴 만한 스킬이 없었으므로.

아연은 한숨을 푹 내쉬며 생각했다.

‘대규모 공격 스킬이 있는 허재민이라면 이럴 때 파밧! 하고 슈숙! 해서 한 방에 쓸어 버리지 않을까?’

그래! 왜 진즉 그 생각을 못 했지? 아연은 한 발짝 늦게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불멸 길드의 2인자 허재민. 그는 동시에 수십 개의 칼날을 소환하여 제 팔다리처럼 부릴 수 있었다. 아연과는 달리 많은 몬스터를 상대하기 좋은 전투 방식을 가진 것.

불멸은 동쪽 구역을 담당하고 있지만…… 뭐, 가서 부탁하면 잠깐은 도와주지 않을까. 아연은 단순하게 그리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언니가 사라진 방향도 아마 동쪽이었지.’

이김에 화염으로 확 진압해 버릴 수 있는 언니도 데려오는 것이다.

슈욱─!

땅을 거세게 박찬 아연은 동쪽을 향해 속력을 높였다.

비로소 도착한 게이트 동쪽 부근에서는 도복 차림의 불멸 길드원들이 벌레 몬스터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아연이 있던 남쪽과 별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어라.”

문득 무언가를 발견한 아연이 걸음을 멈춰 세웠다.

구멍. 바닥에 난 거대한 구멍이었다.

마치 그곳에만 운석이 떨어진 듯한 모습. 다른 데는 이런 구멍 따위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아까 굉음이 들렸던 것 같기도 한데…… 이게 원인이었던 걸까? 아연은 빼꼼 고개를 내밀어 구멍 아래를 바라보았다.

“언니!”

그리고 그곳에서 그토록 찾던 은하를 발견했다. 그 주변에 제천대성과…… 음,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튼 불멸의 3인자 오빠도 보였다.

“뭐야,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요?”

타앗!

아래로 내려간 아연은 우선 은하에게로 뛰어갔다. 드레스 이상 무. 양산 이상 무. 미모 이상 무.

‘별일 없었나 보네.’

내심 안심하고 다른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는데.

“…….”

“…….”

뒤늦게 이곳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황한 아연이 데굴데굴 시선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바닥의 이상한 문양.

그리고…….

“……허재민?”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재민을 발견했다.

재민은 피를 흘리고 있다거나 큰 부상을 입은 것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도복 여기저기가 찢어져 있었고 숨이 가빴으며 안색 또한 창백했다.

“야! 오빠, 너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순간 그를 향해 득달처럼 달려들려는 아연을, 유환이 한쪽 팔로 막았다.

“허재민, 계속 말해 봐.”

“……안에, 순록 형상을 한 거대한 몬스터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았지?”

“한 마리였습니다.”

“한 마리?”

유환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은하도, 재민을 부축하고 있는 성윤도 마찬가지였다.

고작 몬스터 한 마리를 상대로 불멸의 2인자인 허재민이 이렇게 되었다?

“……레벨은.”

유환이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물음표로 나와서……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정보는?”

“모르…… 겠습니다.”

재민은 분한 얼굴로 시선을 떨구었다.

“어느 순간 ‘퀘스트 실패’ 시스템창이 뜨더니 밖으로 이동되었습니다. 아마…… 바깥 몬스터의 레벨이 상승한 것도 그 영향이 아닐…… 큭.”

“허재민!”

성윤이 다급하게 외쳤다.

‘중독’ 상태가 심각했다. 이대로 두면 독이 몸 전체에 번지고 말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번졌을지도 몰랐다.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은하가 느슨하게 쥐고 있던 양산을 단단히 바로잡으며 말했다.

“내가 들어가서 확인해 보죠.”

유환과 성윤 그리고 아연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그대로 문양을 향해 다가서려는 은하를, 유환이 팔을 뻗어 막았다.

“아니. 내가 가겠다.”

“안 돼.”

은하는 탁, 하고 그의 팔을 쳐 냈다.

“이곳 동쪽 구역은 이 해괴한 문양과 가장 가까운 곳이야. 만일 내부에서 무슨 일이 생기거든 그만큼 다른 구역보다 먼저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커.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 당신마저 이렇게 다치게 되면 그때는?”

새까만 눈동자가 똑바로 유환에게 향했다.

“누가 이곳을 지키고 통솔하지?”

“그럴 일은 없을 거다. 그새 내가 누구인 줄 잊었나?”

“내가 할 말이군.”

은하가 옅게 웃자 유환의 눈매가 살짝 좁아졌다. 은하는 오른손에 쥔 양산을 가볍게 들었다.

“당신이 강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리고 그 끝으로 유환을 척! 가리켰다.

“나 역시 당신에게 진 적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는데.”

“…….”

유환과 차은하.

그 사이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우님, 나는.”

“스톱.”

유환이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이었다.

여태 침묵하고 있던 아연이 저벅저벅 걸어와 은하 앞을 막아섰다.

“내가 볼 때 언니 말이 맞음. 털보 아저씨는 딴 데 가지 말고 여길 지켜야죠. 그리고…….”

휙.

아연이 은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는 언니도 대장이잖아요. 지금 지원대 난리 났거든요? 벌레 놈들이 성장해서 웬만한 에프킬라로는 턱도 없음. 완전 초 비상사태라고요.”

“……부대원들이 비상사태라고?”

은하의 눈빛이 변했다.

“네.” 하고 고개를 끄덕인 아연은 작은 손을 들어 허공을 살짝 움켜쥐었다.

“난 벌레는 질색이기도 하고…… 언니라면 파방! 하고 짜잔! 해서 정리해 줄 수 있죠?”

그러자 비전투 상태가 유지되는 동안 사라졌던 검은 단도가 다시금 손바닥 위로 생겨났다.

휘리릭, 탁!

그것을 화려하게 던졌다가 잡은 아연이 생긋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여긴 내가 감.”

……응?

예상치 못한 아연의 지원에 은하는 물론 유환과 성윤, 심지어 창백한 낯빛의 재민마저 번쩍 고개를 돌렸다.

“강아연, 너……!”

특히 재민은 마치 딸의 자취 선언을 들은 아버지와 같은 얼굴. 중독 상태고 뭐고, 그는 태동의 뿌리에 진입하겠다는 아연의 의견에 결사반대의 뜻을 보였다.

다만 아연 본인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뭐. 왜. 내가 너보다 세거든?”

“…….”

재민은 입을 닫았다.

재수 없지만 맞는 말이었다. 철없어 보이는 언행과는 별개로 그녀는 명실상부 대한민국의 S급 중의 하나이니까.

“한 마리라고 했지? 안에 몬스터.”

문양 위에 올라서기 직전, 아연이 힐끗 뒤로 돌아보았다.

“일대일 전투에 나보다 자신 있는 사람, 없을걸?”

야구 모자를 비스듬히 들어 올린 아연의 눈이 장난스럽게 휘었다.

“언니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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