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25)화 (125/306)


#125. 형의 품격
2022.12.03.


퍼어어억─!

거대한 주먹 한 방에 수십여 마리의 몬스터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역시 사부이십니다!”

“사부우우!”

불멸의 주인, 제천대성 유환.

‘찾았다.’

그를 발견한 은하는 망설이지 않고 그에게 다가갔다.

“음? 아우님이 왜 여기 있어? 남쪽은 어쩌고.”

다음 공격을 준비하던 유환이 갑작스레 제게 접근해 온 은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땅 아래를 확인해야 해.”

“땅?”

유환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다시 은하를 바라보았다.

“이 아래에 뭔가가 있다는 소린가?”

“그걸 확인해 보자는 소리야. 아마도 당신이 하는 것이 가장 빠르겠지.”

은하가 유환을 똑바로 응시했다.

“……불가능해?”

그녀의 물음에 유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불가능? 내게 묻는 것인가? 육체강화계열 헌터의 최정상에 선 제천대성에게 ‘불가능’을 묻는다고?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손으로 눈을 덮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우님, 날 그렇게 과소평가하는 이는 대한민국…… 아니 아시아를 통틀어도 아우님밖에 없어.”

한껏 웃어 젖힌 그가 스르륵 손을 아래로 내렸다.

“정말, 가끔 서운하군.”

“무슨 소리야.”

은하가 높낮이 없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을 과소평가하지 않아. 오히려 그 반대지.”

그리고 새까만 눈동자를 똑바로 들어 유환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모인 수백의 헌터 중, 내가 이걸 부탁할 만한 헌터는 당신뿐이야. 제천대성.”

“…….”

유환이 입을 닫았다.

잠시간의 침묵.

이후 유환은 멈추었던 웃음을 다시 크게 터뜨렸다.

‘알 것 같군.’

그 파란 눈 꼬맹이가 왜 그런 눈으로 아우님을 바라보았는지 말이야.

‘의도한 것인지, 무의식인지.’

……참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군.

느릿하게 턱을 쓴 유환은 단단한 지면을 향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12신수, ‘하늘을 짊어진 원숭이’의 권능 ▶ ‘긴고아’를 일시 해제하시겠습니까?]

제천대성이 한국을 넘어 중국에서까지 유명한 이유는, 비단 그가 육체강화계열 최정상에 선 헌터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화신’이 아님에도 신수로부터 권능을 부여받은 유일한 계약자.

“해제한다.”

채앵!

금속이 부서지는 소리와 동시에 붉은 스파크가 휘몰아치는 듯한 기세로 그를 감쌌다.

“잘 봐, 아우님.”

유환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게 ‘형’이다.”

쿠구구구…….

그가 서 있던 곳을 중심으로 지면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

근처에서 전투 중이던 재민과 성윤이 동시에 뒤로 돌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둘만의 시선 교환.

그들은 동시에 주변을 향해 크게 외쳤다.

“다들 물러서십시오! 이곳은 위험합니다!”

“퇴각하라!”

그리고 다음 순간.

[태세① ▶ 침팬지 │ 변환 완료. 공격력이 30% 상승합니다. 현재 누적 수련도 938,969/999,999.]

[12신수, ‘하늘을 짊어진 원숭이’의 권능 ▶ ‘긴고아’ 해제 시, 수련도에 따른 추가 버프가 주어집니다.]

[공격력이 추가로 93.89% 상승합니다.]

콰아아아아앙─!!!

땅이 박살 났다.

마치 대규모의 싱크홀 현장처럼 거대한 구멍이 뻥 뚫려 버린 지면.

“뭐, 뭐야…….”

엄청난 굉음에 동쪽 헌터뿐만 아니라 인접해 있던 북쪽 헌터 일부까지 몰려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보스? 설마 보스가 나타난 건가?”

어수선한 분위기 가운데, 은하가 서서히 걸음을 내디뎠다.

또각─

‘……이건.’

[태동의 뿌리로 향하는 입구를 발견하였습니다!]

바닥에 뚫린 구멍. 그리고 그 구멍 아래에 위치한 또 하나의 바닥. 그곳에는 마법진 형태의 커다란 문양이 찬란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스스스…….

태풍 속에 서 있는 것처럼 흔들리던 유환의 머리카락이 다시 얌전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흠. 입구라고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저곳이 어떠한 통로인 것 같은데.”

그러더니 돌연 탓! 하고 자리를 박차고 단숨에 저 아래로 뛰어내렸다.

“사부?”

근처에 있던 허재민이 식겁한 얼굴로 뛰어왔다. 또 자신의 사부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상상만 해도 아찔한 모양이었다.

“사부, 뭐 하십니까? 어서 올라오십시오! 그 문양이 무엇인 줄 알고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직접 들어가야겠지. 이 안에 뭐가 있는지,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해 보겠다.”

유환이 문양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안 됩니다, 사부!”

타앗!

재민은 유환이 그랬던 것처럼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뛰어내렸다.

“내 앞길을 막아?”

유환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재민을 보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원래라면 단지 그것만으로도 깨갱거리며 물러났을 재민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 안이 어떤 식인지,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는 있는지 지금 상황에선 아무것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확인해 봐야지.”

“안 됩니다. 만일 사부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저희 부대는 누가 통솔하겠습니까.”

“허재민.”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좁힌 유환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미묘한 억양의 변화에 재민은 살짝 어깨를 떨었지만 기어코 그 앞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제가 가겠습니다.”

“뭐?”

재민의 말에 유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자신은 있고?”

“사부께서 믿어 주신다면.”

“…….”

유환이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씨익 입꼬리를 올린 그가 짓궂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는 나를 믿지 못하면서, 내가 널 믿어 주길 바라나? 이기적인 놈.”

“사, 사부…….”

“하여간 넌 내 나쁜 점만 닮았어.”

유환은 재민의 어깨에 툭 손을 올렸다.

“갈 거면 도성윤도 데리고 가라.”

“네?”

재민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니, 그 녀석은 왜…….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사부.”

“네 문제가 아냐. 저렇게 불안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지 않냐.”

유환은 검지를 들어 위쪽을 가리켰다.

지면 위에서 기린처럼 쭉 목을 빼내어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성윤이 보였다.

“네 말대로 이 안이 어떤 식인지 아는 게 없어. 하나보다는 둘이 낫겠지.”

“…….”

재민은 조금 자존심이 상한 얼굴을 했지만 끝까지 거절하지는 않았다.

“사부 말씀이 옳아.”

탓!

성윤이 아래로 내려왔다.

“둘이서 나눠서 수색 작업을 끝내고 얼른 본대에 다시 합류하자고.”

성윤의 말에 재민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하여간 걱정도 팔자다. 부산 언노운 게이트 때 있는 걱정 없는 걱정 다 시켰던 놈이 누구였더라.

홱 고개를 돌린 재민은 황금빛 문양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며 툭 던지듯 말했다.

“……맘대로 해.”

피식 웃음을 터뜨린 성윤이 그의 뒤를 따랐다. 화난 척하기는.

‘사실은 기쁘면서.’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불같이 화를 낼 것이 분명했기에.

“뭐야, 이거 왜 이래.”

그런데.

[제한된 인원을 초과하였습니다. 태동의 뿌리로 이동할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문양에는 인원이 제한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단 한 사람만이 ‘태동의 뿌리’로 향할 수 있는 듯했다.

“아니, 그런…….”

당황한 성윤이 멍하니 중얼거리는데,

퍽!

재민이 성윤의 등을 다소 거칠게 밀어냈다.

“엉아 올 때까지 위에서 애들 똥이나 치워 주고 있어라.”

성윤의 두 발이 문양에서 떨어지자 파아앗! 하고 다시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문양.

“그럼, 다녀온다.”

손을 슥 들어 올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문양을 밟고 서 있던 재민이 빛무리와 함께 연기처럼 사라졌다.

* * *

“으으음.”

우남혁. 27세, 본업 헌터, 부업 BJ.

이명은 서버 매니저(Server Manager). BJ 명 혀기월드.

어쩌다 파티원을 잘 만난 덕분에 복계산 지원 자격시험에서 합격할 수 있었던 그는 현재 흑염의 프린세스가 이끄는 지원대에 속해 있었다.

[Lv.30 ‘뿌리 생흡충(生吸蟲)’이 성충이 되었습니다!]

“야! 뒤! 뒤!”

“또?! 젠장, 벌써 몇 마리째야……!”

생흡충과의 끝이 나지 않는 전투로 주변이 산란한 가운데, 남혁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없습니다.>

<네트워크 연결 상태를 확인해 주세요.>

……역시.

세간에 알려진 대로 특수 게이트가 그러하듯, 이곳에서도 휴대전화는 먹통인 모양이었다.

현대 통신사들은 게이트에서 휴대전화를 이용할 수 있는 ‘특별 데이터 플랜’을 만들어 냈지만, 그마저도 이런 언노운 게이트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우남혁, 그가 누구던가. 서버 매니저라는 이명은 장식이 아니었다.

[스킬 ▶‘ 프라이빗 서버 활성화’를 발동합니다.]

치지직─

그의 손에서 작은 스파크가 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네트워크 접속 성공!>

먹통이었던 휴대전화가 띠링! 하고 울렸다.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장소, 원하는 시간에 데이터를 터뜨릴 수 있는 그만의 편리한 고유 능력.

비록 이 능력 때문에 학창 시절에는 핫스팟 셔틀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고는 하나, 헌터 BJ로 활동 중인 현재에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 주고 있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LIVE》 협회의 비밀 작전?! 남해안 언노운 게이트 직접 참여해 봤습니다.」

“아아. 안녕하세요, 여러분.”

남혁은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현재 시청자 수 7명. 시작하자마자 들어온 인원이 평소보다 2~3명가량 많은 것을 보니 방 제목에 이끌려 새로운 시청자가 유입된 것이 틀림없었다.

[혁하~]

[ㅎㅇㅎㅇ]

[뭐임? 갑자기 웬 언노운게이트????]

[신종 어그로인가ㅋㅋ]

“에이, 어그로라니요. 보세요.”

남혁은 휴대전화를 들어 주변을 보란 듯이 비추었다.

“보이죠? 저 몬스터들. 자그마치 30레벨이에요. 여러분, 30레벨 이상 몬스터는 C급 헌터도 잡기 힘든 거 잘 아시죠?”

[ㄷㄷㄷㄷㄷ;;;;;; 방금 내가 뭘본거지]

[ㄹㅇ임?]

[헐 방금 뒤에 있던거 샤인 J랑 건슬링어 아닌가???]

조금 달라진 시청자들의 반응이 만족스러웠던 것인지 남혁이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이곳에서 라이브 방송을 진행할 수 있는 헌터 BJ는 세상에 자신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게이트 입장 전 작성했던 비밀 유지 각서가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만일 그가 이곳에서 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적지 않은 위약금을 물게 될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헌터 자격증을 박탈당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 어떠랴.

이곳은 그냥 게이트도 아니고 무려 언노운 게이트. 그것도 한국 최정상 S급 헌터가 다수 모인 엄청난 현장이었다.

이 방송만 잘된다면 긴 무명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파프리카 TV 대통령 자리도 꿈이 아니리라. 그렇게 되면 지금껏 그랬듯 실전에서 목숨 걸고 뛰어다니지 않아도 충분히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남혁은 부푼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에 지금 제천대성이랑 닥터 플랜트에…… S급 헌터들 싹 다 모였다고요. 어? 안 믿어? 진짜라니까요?”

[‘☆찬양해킹갓수☆’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꽃개랑’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아니…… 그냥 게이트가 아니라 언노운 게이트라고요, 언노운 게이트!”

[‘천하제일검’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신촌트월킹머신’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샤대29학번’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내가 이거 보여 주려고 지금 얼마나 고생해서 방송 켠 줄 알아요, 여러분? 자꾸 그러면 방송 끕니다.”

사실 그건 거짓말이었다.

시청자 수는 실시간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가히 폭발적인 반응.

여기서 라이브 방송을 진행한 후에, 게이트를 나가고 나면 그걸 클립으로 잘라 너튜브에 업로드 해야겠다. 최소 500만 이상 조회수는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 혹시 알아? 해외 뉴스까지 탈지?!’

신이 난 남혁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시청자들과 열심히 소통을 하던 도중이었다.

“야!”

누군가 뒤에서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거기 너 제정신이야? 지금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그럴 시간에 몬스터 한 마리라도 더 죽이지 않고.”

분홍색 야구 모자를 쓴 소녀가 삐딱한 자세로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앳된 인상의 그녀는 딱 봐도 고등학생, 아주 많이 쳐 줘도 갓 스무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남혁은 설마 눈앞의 소녀가 그 유명한 얼굴 없는 S급, 괴도 강아연일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아연이 S급으로 발표되고 구설수에 시달린 때에서 꽤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지도 몰랐지만, 그것보다도 평상시에 그녀의 특성 ‘교란’ 효과로 안면 인식을 방해하고 있는 까닭이 컸다.

‘하여간 정신머리하고는.’

살짝 비뚤어진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아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협회가 직접 뽑은 인원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지원대에 쓸 만한 헌터가 이리도 없을 줄이야.

가뜩이나 징그러운 벌레 놈들을 상대하느라 짜증 나 죽겠는데 눈앞에서 휴대전화를 들고 희희낙락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울컥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우리 언니가 이끄는 부대에 이런 놈들만 모여 있다는 사실이 믿을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언니는 대체 어딜 간 거야.’

아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깐 이곳을 부탁한다던 은하는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도대체 어딜 간 건지.

주변에는 수많은 헌터가 아직도 벌레…… ‘뿌리 생흡충’을 상대하고 있었다. 여전히 수는 줄어들지 않은 듯했다. 아니, 오히려 눈에 띄게 늘었다.

심지어 처음에는 약 60cm 정도였던 몬스터가 지금은 더 커졌다. 믿을 수 없게도.

“악! X발, 깜짝이야!”

거대한 벌레가 웨에엥 소리를 내며 다가오자 아연은 창백해진 얼굴로 펄쩍 뛰었다.

[12신수 ‘그늘을 지배하는 쥐’가 S급 헌터라는 애가 참 자알하는 짓이라며 당신의 나약한 모습을 보고 쯧쯧 혀를 찹니다.]

빈정거림이 가득한 쥐의 메시지에 아연의 두 눈이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다.

“뭐야, 쥐. 너는 이 세상에 무서운 것 하나 없나 봐?”

[12신수 ‘그늘을 지배하는 쥐’가 자신은 위대한 12신수 중에서도 가장 선두에 선 존재니 무서운 게 있을 리 없다며 당신을 비웃습니다.]

“X랄하네.”

아연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너 울 언니 무서워하잖아. 언니랑 있을 때는 나타나지도 않더만.”

[12신수 ‘그늘을 지배하는 쥐’가 그, 그건……! 하고 당황한 기색으로 할 말을 찾습니다.]

[그 여자한테서는 고양이 냄새가 나니까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변명합니다.]

그놈의 고양이 냄새.

아연은 은하의 집을 방문한 적도 있었지만, 그녀는 고양이 따위 키우지 않았다. 물론 우리 언니의 길게 뻗은 눈매라든지 도도한 표정이 고양이를 닮긴 했지만…….

“아무튼 너도 무서운 게 있단 소리잖아. 이 간사한 거짓말쟁이 쥐 새끼 같으니라고.”

[12신수 ‘그늘을 지배하는 쥐’가 뭐, 뭣……! 이 싹수가 노란 계약자를 보았나! 하고 몸을 부르르 떱니다.]

[내가 지금껏 맺어 왔던 계약자를 통틀어도 그중 가장 최악은 너라며 앞니를 뿌득뿌득 갑니다.]

“가장 최강은 아니고?”

아연이 씩 웃었다.

그로부터 쥐는 대답이 없었다. 아마 삐졌거나, 다른 계약자를 살피러 갔거나 했겠지.

뭐 상관없다. 아연은 신수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신수는 계약자인 아연의 눈과 귀를 통해 세상을 염탐하며 유흥거리를 받고, 신수로서의 명예를 얻는다.

계약자인 아연은 신수를 통해 능력치를 향상하고 때로 아이템이나 코인을 후원받는다. 그것도 아주 가뭄에 콩 나듯.

그렇다. 신수 쥐와 아연은 철저한 비즈니스 파트너. 단지 그뿐인 관계라 할 수 있었다.

‘기왕이면 쥐보다는 용이나 호랑이 같은 게 좋았는데.’

쥐가 뭐야, 쥐가. 아연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순간이었다.

띠링!

[태동의 뿌리로 향하는 입구를 발견하였습니다!]

아연의 눈앞에 푸른 시스템창이 팝업되었다. 갑자기 뭐야? 태동의 뿌리로 가는 입구? 숨겨져 있던 통로 같은 걸까?

아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 뭐야?”

“태동의 뿌리?”

“누군가 길을 발견했나 봐!”

“역시! 아까 저쪽으로 간 흑프가 틀림없어! 역시 우리 대장!”

“제천대성 아닐까? 아까 그 굉음, 그가 틀림없는 것 같은데.”

아연뿐만 아니라 생흡충과 한창 사투를 벌이고 있던 헌터 전원에게도 해당 시스템창이 뜬 모양이었다.

누가 어디서 태동의 뿌리인지 뭔지를 발견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변화’하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게이트 공략의 열쇠를 찾은 것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방금 전 사라진 우리 언니가……?

어쨌든 시스템창이 승리의 전보 역할을 톡톡히 해내 주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듯 했다.

해일처럼 밀어닥치는 생흡충 기세에 밀리고 있던 지원대 헌터들도 확연히 사기가 올랐으며 망연자실하게 있던 자들마저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나 생흡충과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Lv.35 ‘뿌리 생흡충(生吸蟲)’이 성충이 되었습니다!]

“……응?”

힐끔 시선을 돌린 아연이 가만히 굳었다.

레벨 35라고? 벌레 놈, 아까까지만 해도 레벨 30이 아니었나?

잘못 본 걸까. 아연이 눈을 깜빡이는데,

“으아아아악!”

“……!”

누군가의 비명에 재빨리 뒤로 도는 순간, 주인을 알 수 없는 붉은 피가 시야에 짙게 흩어졌다.

[Lv.40 ‘뿌리 생흡충(生吸蟲)’이 성충이 되었습니다!]

아연은 눈앞의 거대한 벌레를 보고 돌처럼 굳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상황은 오히려 더 악화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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