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24)화 (124/306)


#124. 뿌리의 생흡충
2022.12.02.


“게이트 진입까지 앞으로 1분 53초.”

대병풍도 앞바다에 선 헌터들은 게이트 입구가 안정화될 때까지 대기했다. 섣불리 들어갔다가는 진입과 동시에 게이트 입구를 감싼 저 스파크에 튕겨져 나와 버리거나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는 까닭이었다.

즉 이것은 게이트의 종류나 난이도와는 상관없는 필수 과정이었다.

“1분 30초.”

협회 요원이 남은 시간을 알리는 가운데, 은하는 주변을 넓게 훑어보았다.

거센 파도에 가파르게 깎인 암벽. 그 아래로 남해안 게이트 토벌에 투입된 다섯 부대가 종횡을 일정하게 맞추고 칼같이 서 있었다.

제천대성이 이끄는 제1대 ‘선두 공격대’.

트릭스터가 이끄는 제2대 ‘소수 정예대’.

닥터 플랜트가 이끄는 제3대 ‘치료 부대’.

백랑, 표면상으로는 이하균이 이끄는 ‘특임대’.

흑염의 프린세스가 이끄는 ‘지원대’.

그리고─.

“와, 대박. 언니, 나 언노운 게이트 처음이에요.”

늘 그렇듯 부대나 길드 따위 없이 혈혈단신으로 토벌에 참석한 괴도 강아연과,

“…….”

마찬가지로 부대원 하나 없이, 대장들과 같이 가장 앞 열에 홀로 선 마에스트로 백이준.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이유로 부대 결성 혹은 소속을 거부했다. 아연의 경우 귀찮다는 이유, 이준의 경우 필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1분 전.”

어느덧 진입 예정 시간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곳에 모인 헌터들은 엄선된 자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수많은 게이트 토벌 경험이 있고, 그만큼 실력 또한 인정받은 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헌터들이 굳은 얼굴로 암벽 위 검은 균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언노운 게이트란 미지의 영역. 이곳에 모인 수백의 헌터 중, 언노운 게이트 경험이 있는 헌터는 은하를 포함하여 아주 소수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게이트 진입이 다가올수록 점차 커지는 긴장감. 주변이 급속도로 적막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진짜 언노운 게이트일까? 색만 까맣고, 막상 들어가 보니 별것 아닐지도 모르잖아.”

“살아서 돌아올 수는 있겠지……?”

“뭐가 걱정이야. 리더가 계신데.”

“그런데 대장님 옆에 저 애는 누구야?”

“몰라, 나도.”

은하가 이끄는 지원대의 경우는 특히나 더 어수선했다.

“언니, 언니.”

은하 옆에 찰싹 붙어 있던 아연이 톡톡 어깨를 건드렸다.

아연은 소속 부대가 없는 까닭에 멋대로 은하가 이끄는 지원대와 함께 서 있는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게이트에 진입할 때까지 혹은 그 이후에도 은하 옆에 달라붙어 있을 작정인 듯했다.

“저기 봐요. 마에스트로가 언니를 쳐다보고 있어요.”

살짝 엄지를 든 아연이 왼쪽을 가리켰다.

“뭐야, 왜 쳐다보는 거지?”

아연은 심각한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정작 다른 헌터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은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

도대체 쟤는 뭐길래 부대도 없이 참여한 거지? 이 철없어 보이는 소녀의 정체가 S급 헌터 괴도라는 것을 모르는 대부분의 헌터는, 그러한 의문을 가지고 아연을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언니, 마에스트로랑 아는 사이였어요?”

다만 괴도 본인은 그러한 시선보다 이준이 은하를 쳐다보고 있는 까닭이 더 신경 쓰이는 듯했다.

균열을 응시하고 있던 은하는 아연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말대로 이준은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시우와는 달리 눈이 마주쳐도 시선을 회피하지 않았다.

“20초 전…….”

시간이 조금 더디게 흐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한순간 멈춰 버린 공기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

“…….”

서로가 서로의 시선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한쪽도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아연이 무언가 눈치챘다는 듯 손뼉을 쳤다.

“저 사람도 언니 팬 아닐까요?”

“……?”

무슨 소릴 하는 거냐는 듯 은하가 아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팬이라니. 누가 누구의? 조금 기가 찬 얼굴로 눈을 깜빡이는 와중에도 시간은 기다리지 않고 흘러갔다.

“10초 전. 9, 8, 7, 6…….”

회오리처럼 회전하던 검은 균열이 점차 고요해지기 시작했다.

“아님 말고.”

아연이 혀를 내밀며 장난스레 웃는 순간,

“1초 전.”

우우우우웅─

게이트 입구가 완전히 개방되었다.

* * *

젖은 흙과 나무 냄새.

게이트에 진입하자마자 그들을 가장 먼저 반겨 준 것은, 뜬금없게도 그것이었다.

제천대성 유환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민들레 씨앗처럼 보이는 하얀 물체가 공중에 떠올라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눈송이가 떨어지는 듯 아름다운 광경.

이번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이 들어선 공간은 굵은 나무뿌리로 감싸인 넓은 평지였다. 다음 구역과 이어진 통로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천장도 뿌리, 바닥도 뿌리인 이곳은…….

“마치 거대한 나무 같군.”

유환이 작게 중얼거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거대한 나무뿌리 안의 빈 공간에 갇혀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최대 다섯이라고 했던가. 로제, 네가 예상한 게이트 숫자.”

유환은 제 곁에 선 로제를 향해 힐끗 고개를 돌렸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바로는 이게 전부인 것 같긴 한데.”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지.”

로제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방심해서는 안 돼. 우린 이제 막 이곳에 진입했을 뿐이니까. 그리고…….”

이걸 봐. 로제가 땅을 향해 부드럽게 손바닥을 펼치자 수십 갈래의 녹색 가시넝쿨이 일제히 땅에서 솟아올랐다.

사락─

반복된 손짓에 각각의 넝쿨이 그 끝을 둥글게 말았다. 마치 무언가를 강하게 압박하듯.

유환은 넝쿨이 속박하고 있는 작고 하얀 생명체를 발견했다.

‘유충?’

유환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30cm가량의 그것은 크기는 크지만 형태로는 벌레의 유충처럼 보였다.

“유환, 아래야.”

로제가 속삭이자, 넝쿨에 속박된 유충을 응시하던 유환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발아래서 꿈틀거리고 있는 흙. 그것은─.

“진형을 갖춰라.”

유환이 손에 묶은 붕대를 단단히 동여매며 말했다.

흙을 헤집고 나타난 것은 수천, 아니 수만 마리의 백색 유충들이었다.

몬스터의 등장, 그리고 유환의 말에 다섯 부대는 저마다의 위치로 흩어졌다. 넓은 게이트 내에서 효율적으로 전투를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마스터!”

“응. 장전하는 동안 놈들을 한곳에 모아 줘.”

서쪽. 트릭스터 송민주가 이끄는 제2대, 소수 정예대도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북쪽. 늑대의 부길드장 이하균을 선두로, 특임대 역시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했고,

“그들을 지원하세요.”

중앙에서는 로제의 치료 부대가 동, 서, 남, 북 각 방향에서 전투 중인 부대를 지원하는 형태였다.

은하의 부대가 맡은 곳은 남쪽. 게이트 입구와 가장 가까운 곳으로, 현재 입구는 닫혀 있는 상황이었지만 여차하는 순간에는 가장 먼저 탈출할 수 있는 위치였다.

“으악! 벌레! 벌레! 벌레!”

제자리서 펄쩍 뛰어오른 아연이 붙잡듯 은하를 껴안았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괴도 강아연이 세상에서 못 견디게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두 가지. 돈 가지고 장난치는 놈과,

“꺄아악!”

벌레였다.

저렇듯 털이 북실북실하고 다리가 많은 벌레는 특히나 더.

“…….”

법석을 떠는 아연을 무덤덤하게 응시하던 은하가 쥐고 있던 양산으로 살짝 땅을 내리찍었다.

찍.

날카로운 양산 끝에 푹 찔린 유충은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터져 버렸다.

터진 유충의 사체에서 진득한 점성을 가진 보랏빛 액체가 흘러나왔다. 이 색깔, 그리고 이 냄새. 틀림없었다. 이건 몬스터의 혈액.

즉, 방금 은하가 양산 끄트머리로 터뜨린 그것은 ‘곤충형 몬스터’라는 소리였다.

휘익, 탁!

양산을 가볍게 휘둘러 피를 털어 낸 은하가 주변을 살폈다.

꿈틀대는 흙. 토양 아래 잠들어 있던 유충들이 슬금슬금 깨어나기 시작했다. 얼추 보아도 그 수가 수십만, 혹은 그 이상은 되어 보였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유충이 흙에서 꾸물꾸물 솟아오르는 그 광경은, 평소 벌레에 대한 거부감 따위 없는 은하조차 오소소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직 겁먹을 필요는 없다.

그들은 유충. 정확하게 말하자면 제대로 된 몬스터로 ‘성장’하지 않은 상태라 할 수 있었다.

즉 지금이라면 그들의 전투력은 거의 0에 가깝다는 말.

‘하지만.’

다시 말하자면 곧 ‘성장’할 것이란 소리기도 했다. 완전한 성장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 성장에 조건이 있는 것인지, 이 수만 마리의 유충이 모두 다 성장하는 것인지, 성장하면 어떤 몬스터가 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

은하가 스르륵 아래로 시선을 떨구었다.

조금 전 양산으로 터뜨린 유충의 사체가,

‘땅으로 꺼지고 있어.’

서서히 흙 속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보통 몬스터는 사망 시 곧장 픽셀화되어 공중에 흩어진다. 갈무리 혹은 무두질할 수 있는 아이템을 가진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말이다.

이렇듯 몬스터의 사체가 통째로 땅으로 꺼져 버리는 건 흔하지 않은 현상이었다. 마치, 흡수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점차 거세게 우글거리는 흙 표면.

……그리고 약 10초 후.

“으아아악!”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Lv.30 ‘뿌리 생흡충(生吸蟲)’이 성충이 되었습니다!]

수십만에 육박하는 몬스터 무리가 땅으로부터 솟아올랐다.

약 60cm의 크기의 곤충형 몬스터는 벌처럼 은은한 황금빛이 감도는 투명한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날개와는 반대로 빨대 형태의 주둥이는 혐오스러울 만큼 길었고, 털인지 가시인지 모를 것이 송송 돋아난 다리는 촉수처럼 꿈틀거렸다.

놈의 이마 부근에 다닥다닥 붙은 12개의 눈알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것과 마주한 순간, 은하는 양산을 거머쥔 손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진짜 전투는 지금부터였다.

엄선된 헌터들로 구성된 각각의 부대. 더군다나 대략적으로나마 미리 짜 두었던 전략 덕분에 전투 자체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다만.

[Lv.30 ‘뿌리 생흡충(生吸蟲)’이 성충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처치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지난 지원자격 시험 때, 복계산에서 처치했던 스켈레톤과는 다른 경우였다.

스켈레톤의 경우 레벨도 낮았을뿐더러 단순히 ‘재생’할 뿐이었다. 그마저도 몸 중앙에 핵이라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뿌리 생흡충’의 경우 마치 분열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개체가 줄기는커녕 늘어만 가는 것 같았다.

‘젠장.’

은하는 성가시다는 듯이 인상을 구겼다. 방법을 찾지 않는 이상 놈들은 끊임없이 재생성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예측하였을 때, 지금 서 있는 이곳은 아마 게이트의 입구 부근. 앞으로 어떤 전투가 이어질지 모르는데 입구에서부터 체력을 많이 소비할 수는 없었다.

‘생각해야 해.’

빠르게 해답을 찾아야만 하는 상황.

어느 게이트든 반드시 공략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이곳이 설령 언노운 게이트라고 하더라도, 분명 어딘가에 해답의 열쇠가 있을 것.

“꺄악! 미친 XX! 더러운 X! X 같은……!”

푸욱!

은하 곁의 아연이 욕설을 뱉으며 단도를 허공에 마구 휘둘러 대고 있었다.

끼에에에…….

아연의 눈먼 공격에 적중당한 몬스터는 철퍽! 하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다시금 땅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뼈조차 남기지 않고.

‘스며들어?’

점차 흙 속으로 가라앉는 몬스터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던 은하가 돌연 눈빛을 달리했다.

[Lv.30 ‘뿌리 생흡충(生吸蟲)’이 성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땅으로부터 다시 솟아나는, 같은 형태의 다른 몬스터.

촤악!

양산을 휘둘러 몬스터를 두 동강 낸 은하가 고개를 들었다.

‘……뿌리.’

필드 천장에서 시작된 거대한 뿌리를 쫓아 시선을 움직였다. 필드 중앙을 관통하여 바닥에 닿은 뿌리는, 흙 아래 깊숙한 어딘가로 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거대한 나무 같군.’

문득 게이트에 진입하자마자 유환이 중얼거렸던 그 말이 떠올랐다.

은하는 발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나무.

그리고 뿌리…….

뿌리란 수분과 양분을 빨아들이는 기관. 그렇다면 지금 이곳에 있는 저 굵고 거대한 뿌리는 대체 어디서 수분과 양분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며, 어디로 그것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직접 확인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겠지.’

은하는 양산으로 툭, 땅을 건드려 보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단단한 지면은 고작 양산 한 자루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렇듯 견고한 바닥을 한 번에 박살 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벽의 경우에는 폭발로 뚫어 버릴 수 있지만, 지면과 벽은 두께부터가 차원이 다르니까. 뾰족하고 단단한 양산으로도 불가능할 테고.

은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게이트 남쪽 지역을 맡은 지원대. 안타깝게도 이 부대 내에는 은하 이상의 파괴력을 가진 헌터가 없었다.

‘한 번에 바닥을 뚫어 버릴 만큼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해.’

곰곰이 생각하던 은하의 머릿속에 문득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있다.’

그 정도로 강력한 한 방을 지닌 사람이. 아마 이 게이트 동쪽 어딘가에.

“잠시 이곳을 부탁해.”

“언니?”

아연을 향해 짧게 중얼거린 은하는 망설임 없이 동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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