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23)화
(123/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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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대병풍도(大屛風島)
2022.12.01.
「오늘의 날씨입니다.」
「대기 불안정이나 저기압의 영향으로 새벽부터 아침 사이에 일부 내륙 지방에는 다소 많은 비가 내릴 때가 있겠습니다. 아침 최저 기온은 3도에서 10도로 어제보다 조금 낮겠고 낮 최고 기온은─.」
달칵.
살짝 열려 있던 창문을 닫은 은하가 털썩 소리를 내며 소파에 앉았다. 테이블 위 머그잔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코코아를 마시며 일기 예보를 시청하고 있자니, 추운 겨울이 성큼 다가온 것이 슬슬 실감되었다.
불이 꺼진 거실.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은하는 출정식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당신은 보스에게 이름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던 거죠?
닥터 플랜트 금로제.
어째선지 그녀는 복계산의 보스가 은하의 이름을 빼앗길 시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은하는 그 사실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자격시험 내내 함께 파티 플레이를 했던 광대저씨에게조차 말이다.
그렇다면 로제는 도대체 무슨 수로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일까. 게이트 연구자인 만큼, 지금까지 쌓인 수많은 연구 기록과 데이터에 기인하여 추측한 것일까.
만일 그런 거라면 그녀는 어째서 ‘보고를 받았다’는 거짓말을 한 것일까.
아니,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점은 달리 있었다.
해당 보스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이라면 장미는, 로제는 어째서 복계산을 자격시험장으로 선택한 것일까.
“…….”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깊어져만 갔다. 물론 명확한 해답은 내릴 수 없었다.
로제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 가장 빠르겠지만, 발코니에서 대화를 나눈 이후 홀연히 사라져 버린 탓에 그럴 기회가 없었다. 이후 은하는 유환에게 잡히다시피 하여 술 대작을 벌였고 말이다.
머그잔을 손에 쥔 채 꿈쩍도 하지 않던 은하가 스르륵 고개를 들었다.
생각해 보면 신경이 쓰이는 존재는 로제 말고도 또 있었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언니, 재미없는 뉴스 말고 다른 채널! 하고 리모컨을 가리킵니다.]
[얼마 전에 보았던 동요 채널이 좋겠다 하고 은근슬쩍 당신의 옆구리를 콕 찌릅니다.]
‘고양이.’
은하는 리모콘을 손에 쥐며 복계산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망자의 군락에서 ‘이름을 빼앗긴 자’와 조우했을 당시, 고양이는 메시지창으로도 전해질 만큼 동요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소나기 같은 식은땀을 흘립니다. 이름을 잃었다고 해서 모두가 저렇듯 몬스터로 변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언니와 난 정당하게 계약을 맺은 것이고, 저자는 요정에게 홀려 이름을 빼앗긴 것이다. 그러니 같은 선상에 둘 수 없는, 아예 다른 상황이라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마치 도둑이 제 발을 저리듯 말이다.
은하는 이전부터, 아니 어쩌면 언노운 게이트에서 고양이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렴풋한 의심을 품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이를테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12지신에 포함되지 않는 고양이가 어째서 ‘신수’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인지. 언제부터 그랬으며,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지.
그뿐만이 아니다. 고양이가 그날 은하에게 계약을 제안한 의도도, 이후 은하를 언니라 부르며 잘 따르는 이유도, 그리고…….
‘언노운 게이트에 대해 그토록 빠삭한 것조차도.’
의문이 드는 점을 나열해 보자면 끝이 없을 정도였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고개를 까딱이며 노래합니다.]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서쪽 하늘에서도, 동쪽 하늘에서도…….]
노랫소리가 실제로 들리는 것은 아니었으나, 리듬에 맞춰 씰룩이는 노란 메시지창. 비록 형태는 보이지 않지만 동요 가사를 읊는 고양이는 꿍꿍이 따위 전혀 품고 있지 않은, 세상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다.
언노운 게이트를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흑염의 프린세스’라는 칭호를 얻어 전투력이 대폭 상승한 것도, 이렇듯 많은 코인을 가진 것도, 꿍꿍이가 있든 없든 간에 어쨌든 고양이 덕분이었다.
즉 은하가 고양이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더군다나 수상한 것을 알면서도 고양이와 계약을 진행한 것은 다름 아닌 본인이었다. 그때는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던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니 고양이를 몰아세우면서까지 그 꿍꿍이를 캐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복계산에서 만난 ‘이름을 빼앗긴 자’. 그 몬스터를 떠올릴 때마다 자꾸 신경이 쓰였다. 그 ‘이름’이라는 것에 대하여.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놈에게 이름을 빼앗겼다면, 나 역시 광대저씨의 친구처럼 빈껍데기, 즉 몬스터가 되었을까? 혹은 이미 이름을 잃은 나 또한 언젠가는 그런 모습이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고.
머그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은하는 눈앞에서 동요에 맞춰 살랑거리는 메시지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언니, 같이 부르지 않고 뭐 해? 하며 당신을 앞발로 툭 건드립니다.]
[좋아, 기분이다! 노래 한 곡에 3,000코인! 하며 파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은하는 눈앞에 뜬 ‘Yes’ 버튼에 손을 가져가지 않았다. 다만 무덤덤한 얼굴로 메시지창을 응시할 뿐.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어…… 너무 적나? 하고 털을 긁적이더니 고민하듯 수염을 가다듬습니다.]
[……5,000코인? 조금 더 보상을 올려 봅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고양아.”
여태 침묵을 지키던 은하가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여전히 ‘Yes’ 버튼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네가 내 이름을 가져간 이유에 대해 알려 줘.”
…….
고양이는 반응이 없었다.
은하가 저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궁지에 몰린 탓에 회피를 하려는 걸까.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TV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작은 별’ 동요는 끊이지 않고 있었다.
은하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네가 입을 다물어 버리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살짝 시선을 떨구었던 은하가 이내 다시 결심한 듯 메시지창을 똑바로 응시했다.
“네가 내 이름을 빼앗아서 날 몬스터로 만들 작정이 아닐까, 하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단 소리야.”
띠링!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제자리에서 펄쩍 뜁니다!]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 내가 왜 언니를 몬스터로 만들겠느냐! 하며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에 억울하다는 듯 눈물을 글썽입니다.]
눈물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고양이.
원래였다면 이쯤에서 끝냈을 것이다. 고양이가 은하를 ‘언니’라 부르며 곧잘 따르는 것처럼, 은하 역시 언제부턴가 고양이를 가족처럼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늘 곁에 있어 주며,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을 들어 주는, 그런 가족 말이다.
하지만.
“억울하면 말해.”
이제는 꼭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왜 하필 이름이었어?”
…….
또다시 침묵.
은하는 노란 메시지창이 떠오르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그리고 그렇게 10초, 20초, 그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내가 이름을 빼앗지 않았더라면, 나와 언니는 이렇게 함께 있을 수도 없었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나는 이름 없이는 이 채널에──.]
삐─ 삐─ 삐─
[System Error = ??? 허가되지 않은 출력입니다.]
[Pa뛟霂 System:{ }SV8??Jd웮뎻쥾㼖n䗧鑴]
[오류. 메시지를 불러올 수 없습니다.]
은하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오류? 갑자기?
소파에서 일어난 은하가 메시지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고양아?”
삐─ 삐─ 삐─
다시 한번 들려오는 경보음. 이번에는 메시지창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테이블 구석에 올려 둔 단말기에서였다.
은하는 눈앞에 팝업된 오류창에서 단말기로 힐끗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것은,
<긴급! 보안된 메시지입니다.>
<남해안 지방 게이트 관리국, 좌표 937, 650 대규모의 검은 균열 발생 확인.>
“…….”
─게이트 출현 비상경보였다.
* * *
오후 2시 13분. 지정 좌표 937, 650.
전라남도 고흥군 거금도 앞바다에서 한참 더 남쪽으로 내려간 곳. 그곳에는 ‘대병풍도(大屛風島)’라고 하는 작은 섬이 있었다.
대병풍도는 정부에서 지정한 특정 도서로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섬, 즉 무인도였다.
몇 년 전만 해도 조황이 좋다는 소문을 들은 바다 낚시꾼들이 대병풍도를 방문하는 일이 종종 있었으나, 2030년에 이르러서는 그마저도 법으로 금지된 상태였다.
“저것도 내리고, 이것도 얼른 가지고 가!”
“누구 내 짐 못 보았나?”
대병풍도와 마주한, 그보다 작은 형제 섬 소병풍도. 대한민국 헌터 관할 협회의 마크가 새겨진 거대 군함 여섯 척이 그 근처에 닻을 내렸다.
“…….”
해안가 근처 깎아지른 듯 높이 솟은 암벽 위, 협회장 고대윤은 맞은편 대병풍도를 무겁게 응시했다.
거대하고 시꺼먼 균열은 섬 위로 적란운처럼 두껍게 생성되어 금방이라도 주변 일대를 집어삼킬 듯 보였다.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느낀 것일까. 머리 위를 나는 갈매기가 불안한 듯 끊임없이 울어 댔다. 섬 암벽에 부딪히는 파도마저 유난히 거센 가운데, 대윤은 생각했다.
‘그나마 다행이야.’
만일 이 섬에 사람이 살았더라면, 혹은 방문자가 있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일이 커졌을 테니까.
“협회장님.”
로제가 조심스레 대윤에게 다가갔다.
“……닥터, 자네의 말이 맞았어.”
대윤은 대병풍도를 뒤덮은 검은 균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들어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것은 높은 확률로 언노운 게이트일 것이다.
일반 게이트의 전조 현상, 그러니까 균열은 거대하다 하여도 보통 빌딩 한 채 정도의 크기였다.
이렇듯 섬 하나를 완전히 뒤덮을 정도의 크기는 둘 중에 하나, 재앙급이라 불리는 대규모 게이트 혹은 언노운 게이트. 어느 쪽이든 헌터 입장에서는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게이트였다.
다만 균열의 색이 검은색인 것을 보아, 아마도 높은 확률로 언노운 게이트일 것이다. 로제의 예측대로 말이다.
“내가 진즉 자네의 말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대윤이 말끝을 흐렸다.
인간이란 참 어리석었다. 위기에 직면하고 나서야 지난날의 과오를 깨닫고 후회하니까.
GIA의 성언에 귀를 기울였던 그 절반만큼이라도 로제의 말을 새겨들었더라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대비책을 준비할 수 있었을까.
저 위협적인 검은 균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책하지 마세요. 이건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만일 저였더라도 확실하지 않은 연구 결과에 많은 것을 투자하지는 못했겠죠.”
복잡한 눈빛으로 검은 균열을 응시하는 대윤 곁에 로제가 사뿐히 다가섰다.
“신중해질 수밖에 없고 또 그래야만 하는 자리라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짝 눈을 휘며 웃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가 아니겠습니까.”
부우우우─
푸른 대해 위, 뱃고동 소리가 낮게 깔리기 시작했다.
로제의 흰 가운이 바닷바람에 하늘하늘 휘날린다. 그 하얀 물결 너머로 보이는, 수백 명의 대군. 그리고 가장 선두에서 이곳을 올려다보는 대군의 주인.
제천대성 유환.
트릭스터 송민주.
괴도 강아연.
백랑 신시우.
흑염의 프린세스, 이유라.
그리고…….
“출발 신호를 내려 주시죠, 협회장님.”
닥터 플랜트 금로제가 속삭였다. 대윤은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갑판을 밟고 섬을 향해 내려오는 검은 그림자가 보인다.
마에스트로 백이준.
부우우우─
이준이 대열에 합류하는 바로 그 순간, 뱃고동이 다시 한번 포효하듯 울려 퍼졌다.
그 외 아무런 신호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의 모든 이가 약속이라도 한 듯 대병풍도를 뒤덮은 검은 균열을 일제히 바라보았다.
갈매기 울음이 섞인 바닷바람이 사납게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 순간, 검은 균열이 섬 전체를 집어삼킬 듯 뒤덮었다.
──비로소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