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22)화
(122/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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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시들어 버린 꽃
2022.11.30.
어느 날 수도권에 수수께끼의 검은 게이트가 출현했다. 대한민국 헌터계 역사상 최초의 언노운 게이트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상자와 행방불명자를 낳았다.
로제의 하나뿐인 딸, 나래 역시 그중 하나였다.
“나래야! 나래야!”
“로제! 정신 차려! 지금 저곳에 뛰어들면 당신 목숨도 보장할 수 없다고!”
“아, 안 돼……. 내 딸…… 우리 나래가…….”
유환은 금방이라도 언노운 게이트에 뛰어들려는 로제를 온몸으로 막았다. 주변의 장미 길드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한눈에 보아도 저 게이트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입구 규모부터 색까지 모든 것이 보통의 게이트와 달랐으니까.
이미 저곳에 뛰어든 수많은 헌터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뒤돌아보면, 그때 그녀를 막지 않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종종 들었다.
그날 이후 로제는 어딘가 달라져 버렸으니까.
가만히 있다가도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거나, 그러다가도 돌연 깔깔 웃어 버리거나, 갑자기 픽픽 쓰러져 버리거나.
그것뿐이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갑작스레 언노운 게이트 연구를 시작하겠다던 그녀는, 연구실에 틀어박혀 몇 달 동안 얼굴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유환은 물론 그녀를 따르는 장미 길드원들에게도 말이다.
그렇게 약 5개월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그녀는, 어느 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왔다.
걱정 끼쳐서 미안하다며 웃는 얼굴은 이전의 그녀로 돌아온 듯 보였다. 겉으로는 말이다.
로제의 상태에 대해 눈치챈 자는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장미 길드의 간부들, 유환, 그리고…….
“내가 자네를 찾아온 이유는, 최근 닥터 플랜트의 행보에 관해 자세히 묻기 위해서야.”
늑대의 주인인 백야 신귀훈뿐이었다.
“왜 그런 걸 궁금해하는 거지?”
유환은 어느 날 갑자기 저를 찾아온 백야를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귀훈은 로제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 헌터였다.
헌터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구제를 위해 자원봉사마저 쉬지 않는 로제와는 달리, 백야라는 이 작자는 오로지 한국 헌터계 혹은 늑대 길드의 이득을 위해서만 움직였다.
무분별한 지원과 봉사는 인간을 둔하게 만들고 나아가 간악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세상이 바뀐 뒤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도움의 손길이 아닌, 무슨 일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방벽, 즉 절대적 지배자이다. 그것이 귀훈의 논리였다.
로제는 그의 논리에 사사건건 반박을 했다. 때문에 두 사람은 여러 문제에서 자주 마찰을 겪고는 했다.
로제와 가깝게 지내는 유환이 그런 귀훈에게 적대감을 가지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녀가 최근 들어 언노운 게이트 연구를 시작했다는 건 알고 있어. 확실히, 언노운 게이트에 대한 정보가 쌓이면 큰 도움이 되긴 할 테지. 나도 동의해. 다만…….”
귀훈은 푸른 눈을 서서히 들어 유환을 빤히 응시했다.
“듣기로는 연구원들을 언노운 게이트에 파견하거나 직접 언노운 게이트에 들어가기도 한다던데.”
“맞아. 그게 왜?”
유환은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이상할 것 있나. 자세히는 모르는 일이지만 그것 모두가 연구의 일환이 아니겠어?”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
나지막이 웃은 귀훈이 테이블 위 찻잔을 쥐며 덧붙였다.
“나는 혹시 그녀가 미친 건 아닌가 해서.”
벌떡!
“……겁도 없이 함부로 입을 놀리는군그래.”
안광을 매섭게 번뜩인 유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자네라면 알고 있을 텐데. 그녀가 이전과는 조금 달라졌다는 것을 말이야.”
그러나 귀훈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유유히 찻잔에 입을 가져갔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잘난 표정. 그 때문이었다. 유환이 더욱 화가 나는 건.
“설령 그녀가 미쳤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누가 손가락질할 수 있지? 그녀는 딸을 잃었다.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나? 그런 그녀를 욕보이는 네놈이야말로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딸을 잃은 일은 안타깝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정신을 놓아 버릴 정도로 우리가 앉은 이 자리는 가볍지 않아.”
“…….”
“그녀가 어떤 방식으로든 한국 헌터계를 위협하는 짓을 하고 있는 거라면, 나는 그것을 파악하고 막아야 할 의무가 있어.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야.”
귀훈은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이미 대한민국의 정상에 서 있다. 네 말대로 그녀가 딸을 잃은 슬픔으로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녀는 한국 헌터계의 정상은커녕 장미 길드의 주인 자리에도 앉을 자격이 없어.”
손톱이 손바닥 살을 파고들 만큼 세게 주먹을 거머쥔 유환은 한껏 짓눌린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말한 적 있던가? 백야, 처음부터 난 네놈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12신수, ‘하늘을 짊어진 원숭이’의 권능 ▶ ‘긴고아’를 일시 해제하시겠습니까?]
챙그랑─!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려왔다.
“썩 꺼져라. 네놈과 다시 말을 섞는 날이 오지 않으면 좋겠군.”
그것이 아마, 유환이 기억하는 귀훈과의 마지막 대화였다.
유환은 불멸 길드 수련장에서 샌드백을 흠씬 두들겨 팬 이후에야 로제를 찾았다.
“유환, 왔구나. 나래에게 줄 선물을 생각하고 있었거든. 뭐가 좋을까?”
로제는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제 곧 있으면 나래를 만날 거야. 올해 생일을 챙겨 주지 못한 만큼 좋은 선물을 준비해야 할 텐데. 그렇지?”
“로제…….”
유환은 그녀의 책상 위 널브러진 스케치북을 발견했다. 흰 도화지 위 크레파스로 삐뚤빼뚤하게 그려진 세 사람을 응시하다가, 다시 로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 유환, 언제 왔어? 미안. 내가 정신이 없어서.”
로제는 이마를 감싸 쥐며 피곤한 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즐거운 듯한 미소를 지었던 표정과는 괴리감이 있는, 그늘진 얼굴.
“이럴 때가 아니야. 어서 연구 결과를 기록해 두지 않으면…….”
“로제, 괜찮아.”
탁.
유환이 로제의 손목을 붙잡았다. 우뚝 굳은 로제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유환은 보고야 말았다. 로제의 눈동자 속 슬픔과 혼란…… 그리고 희미한 두려움을.
‘나는 혹시, 그녀가 미친 건 아닌가 해서.’
유환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하지만 찰나일 뿐이었다.
‘눈앞에 죽을 것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을 내가 살릴 수 있다면, 당연히 도와야겠죠.’
이내 유환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다.”
그리고 로제의 작은 어깨를 커다란 손으로 토닥였다.
“갑자기 왜 그래, 유환?”
로제는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
‘그럼…… 나와 함께 갈래요? 내가 당신을 도와줄게요.’
유환이 알던, 꽃물이 번지듯 맑고 고운 미소.
그것을 마주한 유환은, 그 순간 굳게 맹세했다.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도와주겠노라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 * *
이른 아침.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부셨던지, 침대에 죽은 듯 누워 꼼짝 않고 있던 시우가 서서히 미간을 좁혔다.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고 시계를 향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현재 시각 오전 9시 반.
벌떡!
“……읏.”
상체를 급히 일으킨 시우는 엄청난 두통에 커다란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 속이 메스껍고 정신이 멍했다.
‘도대체 이게 얼마만의 숙취지.’
일반인에 비해 회복 능력도 뛰어난 각성자는 알코올 해독 능력 역시 월등히 좋았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지,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았다.
그 증거로 S급 헌터이자 개의 화신이기도 한 시우는 술이 약했다. 각성자들 중에서도 눈에 띌 만큼 예민한 후각을 지닌 탓에, 직접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알코올 향만 맡아도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따라서 정말 필요할 때가 아니라면 굳이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본인의 뜻이 그랬을 뿐더러 감히 그에게 강제적으로 술을 권하는 자가 여태 없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시우가 자의로 술자리에 참여했다. 그뿐인가.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을 마셔 버린 것이다. 어리석게도.
침대 곁에는 차가운 물이 놓여 있었다. 슬슬 눈을 뜰 시우를 위해 누군가 미리 가져다 둔 것이다.
그것을 단숨에 들이켠 시우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차근차근 떠오르는 기억들. 다행히 필름이 끊기는 불상사는 피한 모양.
하지만…….
‘30년 빨리 태어날 걸 그랬습니다.’
“……!”
툭.
시우가 쥐고 있던 컵이 바닥에 떨어졌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으로 깨져 버린 유리컵.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시우는 두 손으로 제 머리를 감쌌다. 바닥을 응시하던 그의 푸른 두 눈이 점점 더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 분명 시우는 은하에게 그런 말을 했다.
왜 그런 말을 했지? 모르겠다.
그 말에 선배가 어떤 반응을 했더라? 그것도 잘 모르겠다.
다만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음. 청춘이군, 청춘이야.’
호탕한 유환의 웃음소리뿐.
시우의 기억이 틀림없다면 그 후 출정식은 금방 끝이 났다. 오랜 술 대작으로 결국 바닥에 코를 쿵 박아 버린 유환을, 불멸의 부길드장 허재민이 업다시피 하여 데려간 것도 기억이 난다.
은하의 경우, 군단 녀석들이 직접 댁까지 모셔다드리겠다고 법석을 떨어 그들과 함께 귀가했던 것 같다.
결국 마지막까지 선배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않았다. 즉, 그녀와의 마지막 대화는 ‘30년 빨리 태어날 걸 그랬다’로 끝이 난 상태.
모든 기억을 더듬은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미쳤군.”
그것도 아주 단단히.
필름이 끊겼더라면 차라리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시우는 앞머리를 거칠게 흩트렸다. 그리고 두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가, 아랫입술을 짓씹다가, 침대 위에 철퍼덕 누워 버렸다가, 또다시 벌떡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대표님……?”
문 쪽에서 들려온 제휘의 목소리에, 베개를 안은 채 끙끙 앓던 시우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 죄송해요.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으시길래…….”
심각한 시우의 안색에 제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시선을 떨구었다. 아무래도 멋대로 방에 들어온 것에 대해 시우가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시우는 제휘가 들고 있는 나무 트레이를 힐끗 바라보았다. 간단한 아침 식사와 숙취에 도움이 되는 약을 챙겨 온 듯 했다.
“……거기 대충 올려놔.”
단지 그리 말한 시우는 이마를 감싸고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이 틀림없었다.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기까지 노크 소리는커녕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시우가 말이다.
테이블 위에 식사 트레이를 올려 둔 제휘는 문득 시우의 침대맡에서 산산이 깨져 버린 유리컵의 잔해를 발견하고 펄쩍 뛰었다.
“커, 컵은 왜 깨졌습니까? 잠시만요. 얼른 치우지 않으면─.”
“됐으니 그냥 둬. 머리 아프니까 조용히 좀 하고.”
시우는 제휘를 향해 그만 나가 보라는 듯 휘휘 손을 내저었다. 시우와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제휘는 결국 엉거주춤 뒤로 돌아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하아.”
다시 머리를 싸맨 시우는 느릿하게 한숨을 쉬었다.
오후부터 일정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이러고 있을 틈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휙.
그러다 침대 곁에 놓여 있던 휴대전화를 들었다. 한참 동안 액정을 노려보던 시우는 곧 결심한 듯 서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선배,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아니, 아니다. 죄송한 일은 하지 않았으니까. 아마도.
급하게 문장을 지운 시우는 또 한 번 고민하다가 다시 액정을 두드렸다.
[선배,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니, 이것도 안 되겠다. 메신저로 아침 인사를 나눌 만큼의 사이가 아니다. 어색하게 생각할지도 몰랐다.
[어제 제 말뜻은 다른 게 아니고…….]
……이건 너무 변명 같아 보인다. 다시 삭제.
그렇게 한참 동안 휴대전화와 씨름을 하던 시우는 결국 침대 위에 툭 그것을 던져 버렸다.
‘관두자.’
그리고 쓰러지듯 푹신한 베개에 등을 기대어 누웠다.
짹짹짹. 바깥 창틀에 앉은 작은 새들이 울고 있었다. 시우는 나갈 준비는 하지 않고, 침대에 가만히 누운 채 한참 동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후우…….”
적막에 휩싸인 방 안에서 복잡한 한숨을 간간이 흘려 보내고 있는데.
삐─ 삐─ 삐─
돌연 들려오는 시끄러운 알람에, 얼굴 위에 덮은 손등을 치우고 스르륵 상체를 일으켰다.
……소리의 근원지는 휴대전화가 아니었다.
시우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꺼내 든 것은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단말기.
‘이건…….’
<긴급! 보안된 메시지입니다.>
단말기에 떠오른 문자를 확인한 시우의 눈빛이 단숨에 변했다.
<남해안 지방 게이트 관리국, 좌표 937, 650 대규모의 검은 균열 발생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