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21)화 (121/306)


#121. 꽃물이 번지듯
2022.11.29.


“사부, 저는 늑대랑은 진짜 안 맞는다니까요.”

“우선 잔말 말고 따라…… 응?”

화장실을 갔다가 재민을 데리고 돌아오던 유환은 눈앞의 광경에 우뚝 걸음을 멈춰 세웠다.

“……사부?”

“조용.”

시우와 은하가 서로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유환은 심각한 얼굴로 그들을 살폈다. 그의 시야에서는 은하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시우의 얼굴은 확실하게 보였다.

제아무리 수련과 전투 이외의 것에서 둔하기로 유명한 유환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피부로 느끼고야 말았다.

시우의 저 눈빛. 틀림없다.

“녀석.”

유환은 팔짱을 낀 채 흐뭇한 목소리를 지었다. 그러더니 돌연 휙 등을 돌리고는 곁에 선 재민을 향해 턱짓했다.

“화장실에 폰을 두고 왔어. 따라와라.”

“예, 예?”

유환은 젊은이들을 위해 조금만 더 자리를 피해 주기로 했다.

‘저런 뜨거운 눈빛을 보고 있자니 오랜만에 옛날 생각이 나기도 하고…….’

이것이 바로, 사나이의 배려가 아니겠는가.

* * *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의 일이었다.

“엎어치기! 그렇지! 잘한다!”

“역시 유환!”

“금메달리스트가 되기 전에 미리 사인이라도 받아 놔야 하는 거 아니야?”

당시 유환은 촉망받는 유도 선수였다. 주변인들은 유환이 장래에 금메달리스트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유환 본인 역시 그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유도가 없는 삶이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체육관에서 10시간 이상을 보낸 유환은 귀가를 위해 지하철에 올라탔다.

“여기 앉으시죠, 할머니.”

유환은 무거운 짐을 든 할머니를 보자마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뿐인가. 할머니의 거대한 보따리를 번쩍 들어 짐칸에 직접 올려 주기도 했다.

“아유, 고마우이. 젊은이가 참 예의가 바르네.”

재능과 실력은 물론 동료에 대한 의리와 타인에 대한 배려까지 갖춘, 그야말로 귀감과 같은 존재였다.

──어느 날,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큰 부상을 입기 전까지는.

“안타깝지만 이제 운동은 접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청천벽력과 같았던 의사의 진단.

그날 유환이 잃은 것은 왼쪽 다리의 감각뿐만이 아니었다. 삶의 희망도, 꿈꾸었던 미래도, 동료들의 기대마저 모조리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환아,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다. 우선 치료를 받아 보자.”

“하지만 관장님, 저는…….”

“괜찮아. 너라면 할 수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장님은 유환을 포기하지 않았다.

관장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유환은 주사 치료, 도수 치료, 물리 치료 가릴 것 없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재활 치료에 몰두했다.

그렇게 3년을 쉬지 않고 이어 간 재활 치료.

결과는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았다. 휠체어와 목발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뿐, 아무리 노력하여도 사고가 나기 이전의 몸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환아. 내일부터는 나오지 않아도 된다.”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관장님도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이 말을 하기까지 나도 많이 망설였다. 미안하구나. 하지만 이제 그만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니. 너도…… 그리고 나도 말이다.”

그렇게 체육관을 빠져나오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관장님은 유환을 쳐다보지 않았다.

한솥밥을 먹던 체육관 동기들은 저마다 말없이 유환의 어깨에 툭, 손을 얹을 뿐 그 어떤 말도 해 주지 않았다.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왼발을 절뚝이며 지하철에 올라타자 한 아주머니가 유환을 향해 조심스레 손짓했다.

“총각, 여기 앉아요.”

처음에는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도 몰랐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유환은 한 박자 늦게 아주머니를 쳐다보았다.

“예……? 저는 괜찮─.”

“얼른 앉아요. 다리도 불편해 보이는데……. 난 어차피 다음 역에서 내릴 거라서요.”

상냥하게 웃은 아주머니는 기어코 유환을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에 앉혔다.

“…….”

어째서일까. 그 순간 유환이 느낀 것은 고마움도 따듯함도 미안함도 아니었다.

절망.

그것은 지독한 절망이었다.

현실을 깨달은 유환은 그때야말로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 이후로는 어떻게 살았던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문자 그대로 그저 ‘되는 대로’ 살았던 것 같다.

TV를 켜면 같은 체육관에 다니던 동기가 유명 유도 선수가 되어 인터뷰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유환은 리모콘을 거머쥔 채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두컴컴한 이 집에 있는 것이라곤 구겨진 구인 구직 신문, 더러운 중국집 그릇, 먼지 쌓인 유도복이 전부였다.

술이 없으면 제대로 잠조차 잘 수 없는 나날의 연속.

그렇게 매일을 미친 듯이 퍼마시다 보니 어느새 수중의 돈도 다 떨어지게 되었다.

술값을 벌어야만 했던 유환은 돈이 될 만한 일을 닥치는 대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가진 자격증이라고는 그나마 학창 시절 따 두었던 워드 프로세서 3급이 전부. 영어는 옛날부터 젬병에, 유도에 몰두하며 살아오느라 여태 직장은커녕 아르바이트 경력마저 제로. 게다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저는 상태에 열정이나 의욕은 바닥.

당시의 유환이 가진 장점이라고는 남들보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세다는 것 정도였다. 그런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다 쓰러져 가는 판자촌을 반쯤 밀어 내고, 그 위로 올라온 건설 현장. 그곳에서 유환이 맡은 일은 모래, 타일, 벽돌 등 무거운 짐들을 옮기는 등 비교적 단순한 작업이었다.

일반인에 비해 힘이 세고 튼튼한 데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유환에게는 무척 적합한 일이었으나,

“어휴, 비가 오네.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이렇듯 날씨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큰 단점이었다.

“그럼…… 언제 다시 나오면 됩니까?”

“글쎄. 나도 장담할 수가 없네. 형씨도 알겠지만 지금 공사 자체가 삐거덕거리고 있잖수.”

남자는 뺨을 긁적이며 어디론가 휙 시선을 던졌다.

<주민 의견을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하는 ○○건설! 보상은 필요 없다! 인권을 보장하라! - △△동 주민 일동>

공사를 반대하는 현수막이 검은 비에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뭐, 사정이 급한 건 잘 알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봐.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불러 줄게. 자자, 다들 철수, 철수!”

“…….”

결국 유환은 지폐 몇 장을 손에 쥔 채 현장을 터덜터덜 빠져나왔다.

벌써 며칠째 술과 라면으로만 끼니를 때우고 있는 유환이었다. 오늘부터 장마가 시작될 것을 생각하면 적어도 앞으로 며칠은, 혹은 일주일 이상은 쫄쫄 굶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다행이랴.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로 만일 공사가 중단되기라도 하면…….

“후우.”

긴 한숨을 내뱉은 유환은 근처 슈퍼에서 오늘 번 돈을 탈탈 털어 술과 마른안주를 가득 구매했다. 혼자서는 다 먹지 못할 양이었지만 되는 대로 모조리 다 쓸어 담았다.

적당한 벤치에 앉은 그는 안주를 뜯지도 않고 술병부터 열어 단숨에 들이켰다.

“……크.”

독한 알코올 향이 코를 찡 울렸다. 오늘따라 유달리 달게 느껴졌다.

탱! 데구루루…….

발에 차이는 빈 캔을 오른쪽 발로 밀어낸 유환이 고개를 들어 거무스름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강변에 위치한 이 가난한 판자촌에는 굵은 비가 주룩주룩 구슬프게도 내리고 있었다.

“날씨 좋고.”

어수선한 공기 가운데, 유환은 비에 축축하게 젖은 벤치 위에 흐느적흐느적 몸을 뉘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수군대며 빠르게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남들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내 뜻대로 되는 일 하나 없는 잔혹한 세상이었으나 이렇듯 배가 터져라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한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자유를 느꼈다.

코가 삐뚤어질 만큼 술을 마시면 마치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유환은 그러한 착각이 좋았다.

……아, 이대로 죽어도 괜찮을 것 같다.

검은 빗줄기 속에서 문득 그런 생각을 한 순간이었다.

찰박찰박!

“아저씨!”

물웅덩이를 밟는 소리가 들리더니 돌연 어린 소녀가 유환 앞에 나타났다. 노란 우비를 입고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아이는 기껏해야 여섯 살 정도로 보였다.

“여기서 자면 아야 해요!”

마치 혼이라도 내듯 허리춤에 손을 짚은 아이는 있는 힘껏 눈썹을 세워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유환은 귀여운 아이의 등장에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공중에 손을 휘저었다.

“너야말로 비 오는데 돌아다니다가 감기 걸린다. 얼른 집에 돌아가라.”

“어휴, 술 냄새! 아저씨, 여기서 술 마셨죠!”

그러나 아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그마한 손으로 제 코를 감쌌다.

“이거 안 보여요? 이 공원 치식 금지예요! 치식 금지!”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 오른쪽을 휙 가리켰다.

<쾌적한 환경 조성 및 자연 보호를 위해 방문객 여러분의 공원 내 취식을 금지합니다.>

유환은 아이가 가리킨 현수막을 힐끔 바라보았다가 도로 팔을 베고 누웠다. 금방 포기하고 돌아갈 줄 알았던 아이는 이후에도 유환 곁을 떠나지 않고 조잘댔다.

“아저씨, 여기서 자면 아야 한다니까요!”

“해도 돼. 아야.”

유환은 눈을 감은 채 심드렁하게 답했다.

이대로 죽어 버린다 한들 뭐 어떤가. 오히려 그게 나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슬퍼할 사람도 없고, 남길 유언 따위도 없었다.

“우씨…….”

씩씩대던 아이는 곧 빗속으로 사라졌다. 이제야 주변에 조용해졌다.

유환은 감은 눈을 뜨지 않고 한 손으로 대충 벤치를 더듬었다. 그리고 손에 닿은 술병을 들어, 누운 상태 그대로 그것을 콸콸 입에 들이부었다.

빗소리는 갈수록 시끄러워졌지만, 유환의 마음은 점차 편안해졌다.

그렇게 유환은 새까만 빗속에서 스르륵 정신을 놓아 버렸다.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흐른 후.

“엄마, 여기! 여기야!”

노란 우비를 입은 아이가 다다다다 달려왔다.

아이의 뒤에는 하얀 우산을 든 여인이 서 있었다.

“어머.”

벤치 위 널브러진 거대한 체구의 남자, 유환을 발견한 여인은 깜짝 놀라 제자리에서 굳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아이가 물었다.

“엄마, 아저씨 죽었어?”

“나래야, 그런 말 하면 못써.”

딸을 꾸짖은 여인은 유환의 상태를 확인하듯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갔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비를 맞고 있었던 걸까, 그의 얼굴이 시체의 그것처럼 창백했다.

주변에는 빈 술병과 비에 젖은 안주들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를 살피던 여인은 벤치에서 떨어진 그의 왼쪽 다리에 시선을 두었다. 휘어지기라도 한 듯 힘없이 돌아간 발목. 눈에 띄는 흉터.

혹시…… 다리가 안 좋은 것일까. 로제는 그를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에서 연녹색 희미한 빛이 퍼지는 그 순간,

“…….”

기절한 줄로만 알았던 유환이 스르륵 눈을 떴다.

“우와, 아저씨! 아저씨 안 죽었어! 다행이다!”

신이 난 아이가 방방 뛰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에 맞춰 웅덩이에 고여 있던 빗물이 유환의 얼굴에 사정없이 튀었지만, 정작 유환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눈앞의 여인에게 오롯이 고정되어 있었다.

먹구름이 잔뜩 낀, 이런 검은 하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사람.

그것이 그녀의 첫인상이었다.

“나래가…… 우리 애가 이곳에 아픈 사람이 있다고 해서 온 건데 혹시 휴식을 방해한 거라면 미안해요.”

“아, 아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유환이 돌연 몸을 휘청거렸다. 감각이 없는 왼쪽 다리부터 내밀어 버린 탓이었다.

오랜 재활의 성과로 가까스로 중심을 잡는 것에 성공하였지만, 그것을 바라보던 로제는 비로소 확신했다. 역시 이 사람, 왼쪽 다리가…….

“댁이 어디시죠? 사람을 불러 모셔다드릴게요.”

로제는 유환을 향해 조심스럽게, 그리고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

유환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헉! 엄마! 아저씨 노숙자였나 봐! 어떡해?”

펄쩍 뛰는 아이의 어깨를 부드럽게 붙잡은 로제는 다시 한번 같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혹시 갈 곳이 없는 건가요?”

“…….”

유환은 이번에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제는 표정 한 번 일그러트리지 않고 물었다.

“그럼…… 나와 함께 갈래요?”

그 물음에, 여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유환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왜.

혼탁한 빛을 띤 눈동자는 의문과 경계를 품고 있었다.

“전 의사예요.”

그 앞에서, 로제는 새하얗게 웃었다.

“눈앞에 죽을 것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을 내가 살릴 수 있다면, 당연히 도와야겠죠.”

마치 꽃물이 번지듯 고운 미소였다.

“…….”

“…….”

거센 빗줄기가 시야를 방해하는 가운데 로제와 유환, 두 사람은 오랫동안 시선을 교환했다.

유환은 로제를 뜯어보듯 살폈고, 로제는 그런 유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고막을 두들기는 빗소리도, 무어라 재잘대는 아이의 목소리도, 저 멀리서 울리는 자동차 경적 소리도, 그 순간만큼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것은 오직 하나.

“괜찮다면 따라오세요.”

눈부시도록 새하얀,

“내가 당신을 도와줄게요.”

그녀의 목소리였다.

* * *

유환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로제를 따라갔다.

그녀의 정체가 한국 사상 초유의 S급 치유 헌터 ‘닥터 플랜트’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유환은 그 유명한 닥터 플랜트가 도대체 왜 자신을 거둔 것인지 의문을 가졌다. 그에 대해 물을 때마다, 로제는 그냥 이렇게 답했다.

“당신, 그렇게 두었다면 그대로 그냥 죽어 버릴 것 같았으니까.”

처음에는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생전 처음 보는 타인이 빗속에서 죽든 말든 전혀 관여할 바가 없을 텐데.

그러나 로제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면 늘수록, 유환은 점차 납득할 수 있었다.

로제가 이끄는 장미 길드, 그리고 장미가 운영하는 여러 기관에는 집과 가족을 잃은 사람, 병원에서 불치 판정을 받은 환자들이 들끓고 있었다.

로제는 그러한 자들에게 일일이 손을 내밀었다. 비록 지구의 모든 이를 구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눈앞에 있는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치유 헌터로 각성한 이유라고 생각해.”

닥터 플랜트 금로제라는 여인은 유환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매스컴에서 말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다른 의사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던 유환의 다리를 고작 한 달도 되지 않아 고쳐 주었다는 점도 그러했지만,
먹색 구름이 가득 끼어 있던 유환의 삶을 단숨에 맑게 개게 해 준 점이 더욱 그랬다.

로제가 고쳐 준 것은 유환의 다리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마음, 삶, 심지어는 꿈마저. 삐걱거리고 있던 모든 것들을 제자리로, 혹은 이전보다 더 나은 형태로 고쳐 주었다.

다리를 회복한 유환은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각성자가 되었고, 머지않아 신수 원숭이와 계약했다.

유환이 로제를 이어 대한민국의 S급 헌터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그로부터 약 1년 후의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이지 마법 같은, 선물 같은 일의 연속이었다.

유환은 생각했다.

로제가 각성한 이유가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각성한 이유는 그녀를 돕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고.

“엄마! 내가 이거 그렸어!”

조그만 아이, 로제의 딸 나래가 스케치북을 들고 뛰어왔다.

“어디 보자. 와아, 우리 나래는 그림도 잘 그리네.”

로제는 하나뿐인 딸이 그린 그림을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건 나래고, 이건 엄마고…… 이건 누구야?”

“유환 삼촌이야!”

나래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힘차게 답했다.

‘아저씨’에서 ‘유환 삼촌’으로 칭호가 바뀐 것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똑똑하고 야무진 나래는 또다시 기특한 짓을 했다.

“엄마, 나래는 있지, 유환 삼촌이 아빠였으면 좋겠어.”

“어머…….”

로제가 눈을 깜빡였다.

“커흠, 크흠.”

유환은 새빨개진 얼굴로 연신 헛기침을 해 댔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까, 나래는 넘어갈 듯 까르륵 웃었다.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한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그날, 나래가 언노운 게이트에 휩쓸려 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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