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20)화
(120/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20)화
(120/306)
#120. 30년 빨리 태어났더라면
2022.11.28.
간이 출정식을 시작한 지 어느덧 1시간 반이 흘렀다. 먹음직스러운 뷔페 음식은 비우는 족족 가득 채워졌고 향긋한 술과 음료는 마를 줄을 몰랐다.
“그렇구나. 아직도 흉터가…….”
로제는 민주의 목덜미, 정확히는 그 부근에 선명히 남아 있는 흉터를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목을 가볍게 긁적인 민주는 태연한 어조로 답했다.
“뭐, 괜찮아요.”
애초에 많이 눈에 띄는 크기도 아닌 데다 이렇듯 긁어도 아프지 않았다. 지금 민주에게는 그깟 흉터보다 로제가 선물해 준 탱크 모형 QKZ-786이 더 중요했다. 그것도 리뉴얼 버전!
달칵달칵…….
야무지게 탱크를 조립해 나가는 민주. 곁에서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준환이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였다.
“그날 언노운 게이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여전히 전혀 기억나지 않고요?”
“음…… 잘 안 나는데.”
탱크를 만지작대는 손을 잠시 멈춘 민주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듯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무언가 생각나기라도 한 듯 “아.” 하고 살짝 입을 벌렸다.
“그러고 보니 거기서 누구랑 대화를 나눴던 것 같기도 하고.”
……대화?
민주의 말에, 준환은 물론 곁에서 쿠키를 집어 먹던 수현도 힐끗 뒤돌아보았다.
“대화라뇨? 마스터, 여태까지 그런 말씀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잖아요.”
“방금 생각난 거니까. 확실한 건 아니고, 그냥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는 거지.”
그리 말한 민주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얼굴로 다시금 탱크 모형을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준환이 무언가 깊게 생각하는 것처럼 턱을 쓸다가 입을 열었다.
“……그곳에 말하는 몬스터가 있었다거나?”
“말하는 몬스터?”
그에 반응한 수현이 눈을 깜빡였다. 준환은 턱을 쓸던 손을 멈추고 진지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거긴 언노운 게이트잖아.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말하는 몬스터. 그것은 헌터들에게 마치 UFO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구체적인 목격담을 진술하는 자도, 그에 대해 깊게 연구하는 자도 있었지만 아직 뚜렷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헌터 사이에서 유명한 ‘흑염의 프린세스’ 역시도 말하는 몬스터에 대한 괴담 중 하나였다.
“만일 그런 거라면 우선 협회에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마스터, 어떤 대화였는지는 기억하십니까? 상대의 생김새라든지 특징은요?”
수현과 준환은 심각한 낯빛으로 민주를 둘러쌌다. 민주는 기억을 짜내려는 듯 미간을 힘껏 좁혔다.
“곤충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벌레? 음, 아닌가…… 그냥 사람이었나? 으음,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포기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준환과 수현이 아쉬운 얼굴로 그를 응시하는 가운데,
“매혹이나 환각보다야 덜하다지만 일부 저주의 경우에는 해제 이후에도 간혹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일 때가 있답니다.”
여태 침묵을 지키던 로제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확실한 기억이 아닐 가능성도 고려해야 해요. 우선 기억이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 조금 더 지켜봐야겠죠.”
“하지만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마스터의 기억이 이번 남해안 게이트 작전에 큰 힌트가 되어 줄지.”
준환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닥터 플랜트께서는 이번 남해안 게이트를 언노운 게이트로 예상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GIA는 한국 헌터 협회에게 ‘남해안 어딘가에서 거대한 게이트가 출현할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오랜 기간 언노운 게이트를 연구해 왔던 로제는 그것이 언노운 게이트일 것이라 추측했다. 장미가 협회와는 별개로 지원대를 모집하는 등의 준비를 했던 것도 그 까닭이었다.
“그래요.”
고개를 끄덕인 로제가 차분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모든 언노운 게이트가 같을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죠. 트릭스터의 기억이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때가 되어야만 알 수 있는 일이에요. 게다가, 억지로 기억을 떠올리다가는 설명할 수 없는 부작용이 따를지도 몰라요.”
로제는 탱크 모형을 가지고 노는 민주를 향해 힐끗 시선을 던졌다.
‘부작용…….’
이어서 준환과 수현의 시선 역시 그에 이끌리듯 민주에게 향했다.
콧노래를 흥얼대며 탱크 모형에 열중하고 있는 옆모습은 평화롭고 천진난만하기만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흉측한 반점이 얼굴 전체를 뒤덮고, 온몸에 수분이 빠져나간 듯 미라와 같은 모습으로 꼼짝도 하지 않았던…… 나의 마스터.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끔찍한 모습이었다.
“무리해서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보다는 우선은 절대 안정. 무슨 말인지 알죠?”
로제의 말에 준환과 수현은 입을 다물었다.
“로제 이모도 참, 호들갑은. 나 진짜 멀쩡─.”
심각해진 분위기에 부러 밝은 투로 입을 연 민주가 돌연 말문을 멈추었다.
‘어라, 저 형…….’
도토리 같은 민주의 눈이 어딘가에 못 박히듯 고정되었다. 그 시선 끝에는 연회장 구석, 벽에 등을 기댄 채 후드와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남자가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마스터.”
“저기 저 사람 말이야.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서.”
민주가 손가락으로 시우 방향을 가리키자 준환이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민주는 회의가 끝날 때쯤 들이닥쳤으니 모를 만도 했다.
“늑대의 부길드장이 데리고 온 자입니다.”
“늑대?”
……아하, 이제야 생각났다.
‘군단을 상대로 자신만만하네. 형, 혹시 늑대라도 돼?’
‘글쎄. 내가 대답해야 하나?’
틀림없다. 저렇듯 구석에서 한마디 말도 없이 서 있는 탓에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전에 누나랑 함께 국밥집을 방문했을 때 만났던 자가 분명했다.
특유의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운 태도에서도 대충 짐작했지만, 역시 늑대였던 모양.
‘그런데.’
시우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민주의 눈에 의문의 빛이 서렸다.
그땐 분명 눈치가 빠르고 날 선 감각을 가진 인상이었는데……. 자신이 이렇듯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그는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눈치채지 못한 척하는 것일지도, 혹은 그보다 중요한 어딘가에 온통 신경이 쏠린 것일지도 몰랐다.
민주는 아마 후자이리라 추측했다. 민주가 시우를 빤히 바라보듯, 시우 역시 어딘가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기에.
‘대체 어디에 저렇게 정신이 팔린 거지?’
민주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시우의 시선을 쫓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렇게까지 내 페이스를 잘 따라오는 자는 정말이지 처음이군.”
“글쎄. 페이스를 잘 따라오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 쪽인 것 같은데.”
사이좋게 술판을 벌인 은하와 유환을 발견했다.
“뭐? 으하핫!”
이것 참, 보기보다 유쾌한 친구라니까! 목을 꺾어 호탕하게 웃어 젖힌 유환이 탁! 하고 은하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의 기준에서 가벼웠을 뿐, 산짐승처럼 거대한 그의 덩치를 생각하면 상당한 타격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유유히 술잔을 홀짝였다.
‘흐응.’
민주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굉장히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듯 입꼬리가 절로 씰룩대기 시작했다.
민주는 보고야 만 것이다.
유환의 손이 은하의 어깨에 닿는 바로 그 순간, 마스크를 쓴 저 형의 안광이 문자 그대로 퍼렇게 번쩍이는 것을 말이다.
“마스터? 어디 가십니까?”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민주는 여태 열심히 만지작대던 탱크 모형을 팽개치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누나아!”
다다다닷!
재빠르게 달려 은하의 품에 퐁당 안겼다. 예상대로 뒤통수에 따끔따끔한 시선이 닿는 것이 느껴졌지만, 민주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누나, 나랑도 놀아 줘요.”
“어허, 어른들 술자리에 애가 끼는 거 아니다.”
“엥, 뭐 어때. 술 마실 것도 아닌데. 누나, 괜찮죠?”
민주는 반짝반짝한 눈으로 은하를 바라보았다.
“이래서 애들은.”
유환은 성가시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성스러운 술자리를 방해하던 괴도를 재민을 시켜 억지로 떼어 놓은 것이 바로 30분 전의 일.
이번에는 트릭스터라니. 잘 가지고 놀던 탱크 장난감은 어디다 팽개쳐 놓고 갑자기 들이닥쳐서 이 난리란 말인가.
깊게 한숨을 쉰 유환은 눈앞에서 은하에게 대롱대롱 매달린 민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말이야. 누나랑 같이 앉아서 놀고 싶거든 앞으로 최소 5년은 더 이따 오도록 해.”
“아저씨, 요즘은 연하가 대세인 거 몰라?”
허어? 요것 봐라? 유환이 한쪽 눈썹을 스윽 들어 올렸다. 눈앞의 이 요망한 꼬마를 향해 피식 비웃음을 날린 그가 이번에는 은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건 본인에게 물어봐야지. 아우님은 연하가 취향인가?”
입에 술잔을 가져가던 은하가 멈칫 굳었다. 새까만 눈은 마치 ‘나?’ 하고 묻고 있는 듯했다.
음. 유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은하는 잠깐 생각하더니, 이내 중얼거리듯 조용히 답했다.
“……딱히.”
호로록.
가볍게 술을 넘기는 소리가 이어졌다.
“들었지, 꼬맹이? 두 번 말하지 않을 테니 이만 네 해피밀한테 돌아가라.”
유환이 저 멀리 준환과 수현을 척, 가리켰다. 결국 민주는 삐죽 입을 내밀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풀이 죽은 듯한 겉과는 달리,
“……풉.”
민주는 금방이라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삼키고 있는 중이었다.
방해물이 사라진 술판.
“자,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
쪼르륵.
빈 술잔을 다시 채우기도 전에 낯선 그림자가 또다시 그들을 덮쳤다.
“……저도 한 잔 받아도 되겠습니까?”
“음?”
술병을 기울이던 유환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뭐야.”
목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하자마자 그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그곳에서는 얼굴을 꼭꼭 싸맨 정체불명의 남자가 푸른 눈으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체불명은 아니지. 저자는 늑대의 부길드장 이하균이 데려온 자였으니.
“지금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말을 거는 건가?”
“물론, 불멸의 제천대성이시겠죠.”
“잘 알고 있군.”
쨍그랑!
유환이 쥐고 있던 술병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그는 유리가 박힌 손을 개의치 않은 채, 피처럼 새빨간 눈으로 시우를 날카롭게 올려다보았다.
“그럼, 내가 세상에서 늑대를 가장 싫어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을 텐데.”
* * *
약 15분 후.
“…….”
은하는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자신의 양옆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들의 가장 큰 착각이 뭔 줄 아나? 늑대가 없으면 한국 헌터계가 멸망할 거라는 착각이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생각하지 않는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찢어 죽일 것처럼 시우를 노려봤던 유환이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게다가 늑대만큼 쓸데없는 일에 목숨을 거는 길드도 드물지.”
“동감입니다. 늑대는 자신들이 행하는 모든 일이 한국 헌터계의 밑거름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죠.”
한국 헌터계를 썩게 만드는 장본인이 오히려 본인들인 것을 모르고. 술잔을 내려놓은 시우가 희미하게 입매를 비틀었다.
푸른 안광을 머금은 그의 눈동자가 술잔 위로 고요히 떠올랐다. 그것을 응시하던 시우는 곧 차갑게 입술을 달싹였다.
“……개면 개답게 집이나 지킬 것을요.”
그 순간,
[12신수 ‘깊은 밤을 수호하는 개’가 당신의 잔인한 발언에 힘없이 꼬리를 떨어트립니다.]
“…….”
빈 술잔을 채우기 위해 병으로 손을 뻗던 시우가 불현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신수의 반응이 신경 쓰인다기보다는…….
‘신수라는 게 상처를 받을 수도 있는 존재인가?’
─그런 의문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계약자’들이 그럴 테지만, 시우는 신수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일반적인 계약자와는 다른 ‘화신’이라고 해도 말이다.
개 특유의 충성심 때문인지, 아니면 시우가 화신이기 때문인지, 신수 ‘깊은 밤을 수호하는 개’는 이전부터 시우를 잘 따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관계를 가깝게 만들지는 않았다.
시우는 단 한 번도 ‘깊은 밤을 수호하는 개’의 진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진짜 모습이랄 것이 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그들은 이렇듯 메시지창을 통해서만 소통하는 사이였으니 말이다.
늘 곁에 머무르며 제게 권능을 빌려주는 존재. 단지 그뿐이었다.
한편 가만히 그를 응시하던 유환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자, 받아라.”
그리고 시우의 빈 잔을 선뜻 채워 주었다.
“너와는 신기하게 말이 잘 통하는군.”
그의 붉은 두 눈에 깃든 것은 누가 봐도 호의. 처음 그가 시우에게 보였던 적대감은 이제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아우님을 제외하고도 늑대에 이런 자가 있었다니 놀랍기 그지없어.”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유환이 은하 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렇지 않은가, 아우여. 한껏 휘어진 두 눈은 마치 그리 묻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그쪽은 무엇 때문에 늑대에 몸을 담고 있는 거지?”
한참 술잔을 기울이던 유환이 시우를 향해 물었다. 시우는 덤덤한 얼굴로 다만 이렇게 말했다.
“제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저런. 유환이 쯧 하고 혀를 찼다.
눈앞의 이 젊은 청년은 비록 여태 헌터 활동을 하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라고는 하나, 협회에서 비밀리에 연 특별 회의에 늑대의 부길드장 이하균이 직접 데려온 자였다.
유추하건대 그는 늑대 길드의 간부급이거나, 적어도 국내 랭킹 상위권의 헌터일 가능성이 높았다.
늑대라면 쓸 만한 인재를 잡아 두기 위해 추악하고 비정한 수법을 썼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니까.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유환은 돌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특별히 내 오른팔 허재민을 소개시켜 주지. 분명 녀석과도 말이 잘 통할 거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겸사겸사 오줌이나 싸려고. 많이 마셨더니 방광이 터질 것 같군그래.”
자리에서 일어난 유환은 힐끗 시우를 향해 물었다.
“같이 가겠는가?”
“…….”
시우의 얼굴이 마스크 위로도 알 수 있을 만큼 딱딱하게 굳었다. 그 반응이 썩 마음에 들었던지, 유환은 호탕하게 웃어 젖히더니 빙글 몸을 돌렸다.
“금방 다녀오지.”
그렇게 유환이 자리를 벗어난 뒤.
“…….”
“…….”
은하와 시우 단둘만이 그곳에 남았다.
두 사람은 딱히 이렇다 할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잔이 빌 때마다 묵묵히 술을 따라 줄 뿐이었다.
한 잔.
두 잔.
세 잔.
…….
잔을 비우면 비울수록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은하는 힐끗 시선을 들어 곁에 앉은 시우를 살폈다.
겉으로 보아서는 전혀 취한 것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시우의 눈매가 평소보다 한층 느슨해진 것을 보니 어느 정도 취기가 올라온 것 같기도 했다.
‘그럴 만도 하지.’
은하는 테이블 아래 즐비한 빈 술병을 보며 생각했다.
유환과의 술자리가 시작된 지 아직 3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그들이 비운 술병은 자그마치 10병 이상. 그것도 그냥 술이 아닌 협회에서 특별히 준비한 독주였다.
해독 능력마저 일반인보다 뛰어난 각성자가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응급실에 실려 갔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터였다.
“……아.”
눈앞의 잔을 향해 술병을 뻗은 시우가 문득 그것을 쏟아 버렸다.
뚜욱, 뚜욱…….
술잔에서 흘러넘쳐 쏟아진 술이 테이블 아래로 굵게 방울져 추락했다. 은하는 근처에 있던 냅킨을 쥐었다. 술을 닦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
멈칫─
두 사람의 손끝이 희미하게 닿았다. 시우 역시 냅킨으로 테이블을 닦으려고 했던 것.
돌처럼 굳어 버린 시우와는 달리, 은하는 평소와 다름없는 태연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됐어. 내가 닦을게.”
“…….”
시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을 거둘 뿐이었다.
테이블을 닦는 일에 열중하고 있던 탓에, 은하는 그 순간 시우가 어떤 얼굴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대충 테이블을 정리한 은하가 젖은 냅킨을 한 곳으로 치운 다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술, 잘 못 마시나 봐.”
“…….”
시우는 말끔해진 테이블에 푸른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닫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돌처럼 굳은 옆얼굴에서는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무슨 생각 해?”
은하의 물음에 한순간 그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말 찰나일 뿐이었다. 다시 홱 시선을 피한 시우가 오랜 침묵 끝에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그냥 쓸데없는 생각이요.”
시우가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와 눈을 가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느릿하고 긴 한숨.
검푸른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흐트러트린 그가 다시금 천천히 손을 내렸다. 시리도록 투명했던 푸른 눈동자가 오늘만큼은 지독히도 혼탁했다.
시우는 조금 메인 목소리로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30년 빨리 태어날 걸 그랬다는 생각.”
뭐? 은하가 눈을 깜빡였다.
방금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