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19)화
(119/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19)화
(119/306)
#119. 그들만의 출정식
2022.11.27.
“─그럼 남해안 게이트 대비 특별 회의는 이쯤에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광현은 어딘가 지친 얼굴이었다. 괴도와 트릭스터의 갑작스러운 합류로 일찍 끝이 날 줄로만 알았던 회의가 예상 시간을 훨씬 넘어서야 마무리된 탓이었다.
“여러분들을 위해 저희 협회에서 소소한 자리를 마련하였으니,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특별 2관에 위치한 대연회장에서 작은 출정식을 가질 겸 식사라도 하고 가시면 어떨까 합니다.”
“성의는 고맙지만 저희는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일정이 있어서.”
자리에서 일어난 하균이 거절의 뜻을 정중히 밝혔다. 출정식이든 식사든, 그러한 자리에 참여할 이유도 시간도 없었다.
“나도 출정식은 별로.”
“귀찮은데. 집에 가서 라면이나 끓여 먹을래.”
민주와 아연도 연달아 불참의 뜻을 밝혔다.
특히 아연의 경우 지루해서 죽겠다는 듯 회의 내내 하품을 연발한 뒤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 갑갑하고 재미없는 협회를 벗어나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다.
“다들 서운하게 구는군.”
그 가운데, 팔짱을 끼고 있던 유환이 스르륵 입을 열었다.
“모처럼 마련된 자리지 않나. 다들 가볍게 한 잔씩 하고 돌아가는 게 어떨까 싶은데. 우리가 언제 이렇게 한자리에 다시 모여 보겠어?”
물론 협회가 준비한 술과 밥이 내심 기대되는 까닭도 있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유환은 그곳에 모인 면면을 하나씩 차례로 훑어보았다.
본인 제천대성과 그 옆의 허재민.
장미의 닥터 플랜트와 은매화.
군단의 트릭스터, 그리고 그의 패밀리인 배준환과 함수현.
늑대의 부길드장 이하균과 그 옆에 마스크를 쓴 남자.
마지막으로 괴도 강아연과 흑염의 프린세스 ‘이유라’까지, 지금 이 자리에 모인 헌터는 총 11명.
마스크로 얼굴을 숨긴 정체불명의 남자를 제외하고는 다들 실력이 입증된 강한 헌터들이었다. 그야말로 한국 헌터계의 최정상에 선 이들.
─그러나.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지만, 남해안 게이트가 열리면 이 중 누구 하나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잖아?”
유환의 말에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그가 틀린 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였다.
남해안 게이트에서 어떤 싸움을 하게 될지 그곳의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었다. 다만 결코 쉬운 싸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모두가 예상할 수 있었다.
“내 말이 틀려, 아우님?”
유환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은하에게로 힐끗 시선을 보냈다.
“아우님은 갈 거지? 2차전, 나는 준비됐는데 어때?”
은하는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 어제저녁에 남겨 둔 닭볶음탕을 먹을 것인가, 이곳에서 식사를 하고 돌아갈 것인가…… 그런 고민이었다.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좋아.”
은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뚝.
회의실을 벗어나려던 민주와 아연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음, 누나가 간다면 뭐.”
“……생각해 보면 공짜 음식을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 같아.”
한편 가던 길을 멈춘 것은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회의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하균이 힐끔 뒤돌아보았다.
“도련님? 안 가십니까?”
제자리에 우두커니 선 시우는 회의실 내부에서 왁자지껄한 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곧,
“……먼저 돌아가 있어.”
심각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도련님께서는 출정식에 참여할 생각이신가? 하균은 그의 의외의 결정에 순간 의문을 품었다가 도로 내려 두었다.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
타 S급이 한곳에 모인 자리다. 이번 남해안 게이트 작전에 관련한 사항뿐 아니라 다른 어떤 이야기가 오갈 가능성도 높았다.
생각이 깊으신 분이니 아마 여러 가지 일을 고려하고 계신 거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먼저 돌아가 시키신 일을 처리하고 있겠습니다.”
“그래.”
시우는 회의실 안쪽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짧게 답했다.
“누나, 얼른 가요! 갑자기 배고파요!”
“꼬맹이, 비켜. 언니는 나랑 갈 거야.”
“괜찮은 술이 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아우님?”
“…….”
하균이 그곳을 완전히 떠날 때까지도, 시우의 푸른 시선은 오롯이 한곳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 * *
협회의 안내에 따라 특별 2관 대연회장으로 이동한 그들은 그곳에서 간이 출정식이라는 이름의 작은 파티를 열었다.
먼저 돌아간 하균을 제외하고 그곳에 참여한 인원은 10명.
단 10명만을 위한 자리라고 하기에는 음식이며 장식이며 하나같이 번쩍번쩍 호화스러웠다.
눈부신 샹들리에 아래 끝없이 즐비한 뷔페. 테이블마다 금빛 찬란한 네임 카드와 색색의 꽃을 풍성하게 꽂은 화병이 놓여 있었다.
“그냥 집에 갔으면 어쩔 뻔했어. 와, 이것도 대유맛인데?”
금가루가 뿌려진 큐브 케이크를 한입에 쏙 넣은 아연이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언니, 이거 좀 먹…… 응?”
그런데 방금까지만 해도 거기 앉아 있던 은하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어디 갔지? 자리에서 일어난 아연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그릇 위로 음식을 산처럼 쌓은 재민이 다가왔다.
“너 피해서 피신 간 거 아니야?”
재민은 자연스레 아연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연은 “웩.” 소리를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오빠가 왜 여기 앉아? 여긴 울 언니 자리야.”
“어디에 앉으면 어때.”
“아, 왜. 가서 털복…… 제천대성 옆자리에나 앉으라니까.”
“너 이거 안 먹으면 내가 먹는다.”
아연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재민은 그녀의 그릇 위 큐브 케이크를 쏙 집어 가 버렸다.
“이 미친!”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쯤.
발코니로 빠져나온 은하는 힐끗 뒤를 확인했다. 다행히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 듯했다.
“……후.”
은하는 조금 지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노랗고 둥근 달이 머리 위에 높게 떠 있었다. 민주와 아연, 그리고 유환에게 번갈아 가며 시달리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훌쩍 흐른 모양이었다.
이렇듯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익숙하지 않을 뿐.
은하는 조용한 발코니에서 잠시간의 휴식을 갖다가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다.
차갑게 식은 유리 난간에 기대어 잠든 서울의 야경을 응시하던 도중.
“안녕하세요.”
문득 등 뒤에서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흰 가운 대신 어깨가 드러난 긴 원피스에 반투명한 숄을 걸친…… 닥터 플랜트, 금로제였다.
“당신이 발코니에 가는 걸 보고 따라 나왔어요. 혹시 방해가 되었나요?”
“아뇨.”
은하가 짧게 답하자 로제는 “다행이다.” 하고 생긋 웃더니 천천히 은하 곁으로 다가왔다.
불어오는 밤바람에 로제의 와인빛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날렸다.
“그날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던 것 같아서.”
그날? 은하가 로제를 향해 힐끗 시선을 던졌다. 우아한 손길로 머리를 쓸어 넘기던 로제와 문득 눈이 마주쳤다.
“이번 복계산 일이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어떤 비극이 일어났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덕분에 장미도 책임을 덜 수 있었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망자의 군락에서 열린 지원 자격시험은 장미 길드에서 연 것이었지.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인지한 은하는 별다른 감상 없이 답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더라면 시험 참여자들은 꼼짝없이 그곳에 갇혀 버렸을 테니까. 누군가가 꼭 나서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고 여건이 된다면, 은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나설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집과 가족을 잃은 후부터는 늘 그래 왔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런데.”
로제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당신은 보스에게 이름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던 거죠?”
멈칫.
살짝 굳은 은하가 옆에 선 로제를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자세히 알고 있네요.”
“보고를 들었으니까요.”
휘이이잉─
불현듯 발코니를 뒤덮은 바람에 두 사람의 옷자락이 흐드러지게 휘날렸다. 무언가 생각하던 은하가 입술을 달싹이려는 순간.
벌컥!
“아우님, 언제 와? 술 다 식는데.”
발코니의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유환이었다.
“……음? 로제?”
기세 좋게 들이닥친 그는 은하 곁에 선 로제를 발견하고는 움찔 굳어 버렸다.
“뭐 중요한 이야기라도 하고 있었나?”
“아냐. 복계산 일로 그녀에게 감사를 전하고 있었을 뿐이야.”
빙긋 웃은 로제는 어깨선을 따라 떨어져 내린 숄을 살짝 위로 올리며 말했다.
“유라 씨…… 라고 했지요? 다시 한번 고마워요.”
그럼.
고개를 까딱 숙인 뒤 유유히 발코니를 빠져나가는 로제. 은하는 까만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묵묵히 쫓았다.
“예쁘지?”
불쑥, 눈앞에 유환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송곳니를 드러내며 히죽이는 그는 어쩐지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처음 그녀를 본 거라면 시선을 빼앗기는 것도 당연하지. 나도 그랬으니 말이야.”
음. 충분히 이해한다, 아우여.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유환은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그리운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작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확실히 로제는 남녀노소 숨을 삼킬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은하는 그녀의 외모에 눈길이 사로잡힌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로제와 초면 사이도 아니었고 말이다.
정작 은하가 신경 쓰는 점은 다른 부분이었다.
‘어떻게 당신은 보스에게 이름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던 거죠?’
망자의 군락에서 조우한 보스, ‘이름을 빼앗긴 자’.
그러나 사실 놈은 그곳의 진짜 보스가 아니었다. 광대저씨의 말에 따르면 그의 정체는 오래전 복계산에서 행방불명되었던 헌터.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시체, 즉 껍데기일 뿐. 전투가 끝나자마자 가루처럼 바스러져 결국 뼈조차 남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곳의 진짜 보스는 산 자의 목숨뿐만 아니라 이름까지 빼앗아 꼭두각시처럼 부리는 요정형 몬스터 ‘원혼의 지배자’였다.
은하가 ‘원혼의 지배자’를 쓰러트리는 순간, ‘이름을 빼앗긴 자’ 역시 실이 풀린 마리오네트처럼 풀썩 쓰러졌고 던전화가 중단되었으니 틀림없었다.
그곳에 모여 있던 모든 헌터가 당시의 상황을 지켜봤다.
다만 ‘원혼의 지배자’를 쓰러트리기 직전, 놈이 은하의 이름을 빼앗으려고 시도했다는 것을 아는 자는 은하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즉, 닥터 플랜트는 ‘보고를 받았다’고 했지만 그 말에는 어폐가 있는 것.
“자, 우리도 어서 들어가자고. 꽤 괜찮은 술을 발견했어. 짠돌이 협회장도 이번에는 꽤 신경을 쓴 모양이더군.”
유환은 콧노래를 부르며 발코니 문을 열었다. 은하는 의문을 속에 품은 채,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어, 누나 왔다.”
은하가 연회장으로 돌아오자마자 근처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있던 민주가 기다렸다는 듯 쪼르르 달려왔다. 저 멀리서 “언니이!” 하고 손을 흔드는 아연도 보였다.
그러자 유환은 마치 그들 사이를 차단하기라도 하듯 척! 하고 손을 뻗었다.
“애들은 가라.”
유환의 말에 민주는 은하에게 달려오다 말고 끼익 걸음을 멈추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뭐라는 거야, 털보가.”
“푸웁─!”
민주 곁에서 잔에 입을 대고 있던 준환과 수현이 동시에 오렌지주스를 뿜었다. 화들짝 놀란 그들이 입을 닦으며 유환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매우 기분이 좋은 상태인 유환은 민주의 건방진 발언을 웃으며 넘겼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일은 그것이 아니었다.
“자, 이제 시작할까.”
자리에 앉자마자 술병을 쥔 유환이 한층 진지한 얼굴로 은하를 향해 힐끗 눈짓했다.
“준비는 됐나?”
제2차 K-디오니소스 자리 쟁탈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