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18)화 (118/306)


#118. S급 총집결
2022.11.26.


“그녀의 대장 임명에 대해서는 많은 지원대 대원들의 추천이 있었다네.”

대윤은 우선 흑염의 프린세스가 지원대 대장으로 선별된 경위에 대해 설명할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이렇듯 중요한 기밀 작전에서 랭크가 낮은 컨셉 헌터를 대장 자리에 앉히다니,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비리라고 오해할 가능성도 있으니 말이다.

“그녀가 망자의 군락에서 열린 지원 자격시험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스켈레톤 핵을 얻었다는 점, 그리고 복계산 던전화를 막은 공적을 인정하는바, 협회는 흑염의 프린세스를 지원대 대장으로 임…….”

그런데 기분 탓일까?

대윤의 말을 그 누구도 제대로 듣고 있지 않는 듯했다.

“왔군. 언제 오나 했는데.”

아예 대놓고 대윤의 말을 끊어 버린 유환은 은하를 향해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맞은편에 앉아 있던 준환과 수현은 벌떡 일어나 은하를 향해 깍듯이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닌가.

“유라 씨, 여기 제 자리에. 저는 서 있어도 괜찮습니다.”

준환은 자신의 의자를 선뜻 내밀기까지 했다. 곁에 앉아 있던 수현도 그리하라는 듯 준환의 의자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유환은 질 수 없다는 듯 옆에 앉아 있던 재민을 뻥 차 버리고 제 옆자리를 향해 슬쩍 턱짓했다.

“아니, 아우님은 여기 앉아.”

“…….”

“…….”

파지직─

그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이분께서는 ‘마스터 공인’ 저희 군단의 패밀리셔서요.”

“패밀리인지 해피밀인지 난 잘 모르겠고. 이자와 나는 술로 밤을 지새우며 진즉에 의형제를 맺은 사이야.”

왜지? 어째서 공기가 살벌하게 얼어붙고 있는 것 같지?

대윤은 굳은 얼굴로 광현을 힐끔 쳐다보았다. 광현 역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 탓인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게다가.

“크흠.”

하균의 뒤에서 후드와 마스크로 얼굴을 꼭꼭 숨기고 있던 남자, 신시우.

여태껏 작은 소리 하나 내지 않았던 그가 돌연 헛기침을 하더니,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각도로 하균의 등을 쿡 찔렀다.

‘응?’

시우의 의도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하균이 가면 너머에서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드르륵.

정적 속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렸다. 우두커니 서 있던 은하가 스스로 앉을 자리를 정한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은하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선택한 자리는 바로…….

“마침 여기 자리가 비어 있길래.”

하균과 시우, 그러니까 늑대의 바로 옆자리였다.

“유라 씨의 뜻이 그러하다면…….”

준환은 시무룩한 얼굴을 숨기지는 않았으나, 은하의 선택에 대해 토를 달지 않고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아우님, 진심이야?”

유환은 이 상황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계약이 끝났다더니 늑대 옆자리에 스스로 가서 앉는 그녀의 속내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 제천대성의 제안을 거절하고 굳이 저 칙칙한 검은 가면 옆에?

이의를 제기하려는 듯 유환이 한껏 미간을 좁히는 순간, 맞은편에서 누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회의를 시작하도록 할까요.”

모든 이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하균의 왼쪽에 앉은, 신원 불명의 남자였다.

그의 정체를 아는 자는 하균과 광현, 그리고 협회장 대윤뿐이었다.

다른 자들은 시우를 하균이 데려온 부하 1, 혹은 늑대의 간부 중 하나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늑대의 작은 주인이자 대한민국의 숨겨진 S급 헌터 백랑이리라고 짐작하는 자는 없었다.

마스크와 후드로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린 채, 시우가 힐끗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바로 옆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새까만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은하였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녀가 소리 없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안녕.’

“……!”

시우는 다른 방향으로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최대한 태연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됐습니다. 얼른 진행하시죠, 협회장님.”

“그, 그러지.”

대윤은 얼떨떨한 얼굴을 고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본격적인 회의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벌써부터 피곤한 기분이었다.

어찌어찌하여 겨우 시작된 회의.

“다들 알고 있다시피 남해안 게이트의 정확한 출현 날짜는 예측할 수가 없네. 따라서 지금 회의에서 정하는 것들은 그저 대비책에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은 그날, 그대들의 판단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네.”

모두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가운데, 시우는 힐끗 곁에 앉은 은하를 또다시 바라보았다.

“……?”

시선을 느낀 것일까, 그녀 역시 이쪽으로 살짝 눈을 돌렸다.

새까만 동공이 ‘왜?’라고 묻고 있는 듯했다. 시우는 희미하게 고개를 저은 뒤 다시 대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

와중에도 대윤은 홀로그램으로 띄운 남해안 부근 위상 지도를 가리키며 각 부대의 집결지나 대기 위치 등, 대략적인 작전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시우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커다란 손을 올려 조금 비뚤어진 마스크를 바로잡았다.

마스크를 끼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본의 아니게 자꾸만 꿈틀꿈틀 올라가는 입꼬리를 모두에게 들켜 버리고 말았을 테니 말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다른 자리를 마다하고 제 옆자리에 앉아 준 것이, 시우는 내심 기뻤다.

그로부터 약 2시간 후. 짧은 듯 길었던 회의가 끝이 날 무렵,

“우선 전달 사항은 이것뿐이라네.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 짓고 조만간 다시 모이도록 하─.”

쿠당탕탕! 복도에서 요란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돌연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엥? 뭐야, 회의 벌써 끝남?”

기세 좋게 문을 열어젖힌 단발머리 소녀가 쓰고 있던 야구 모자를 살짝 들어 올렸다.

“아니죠? 모처럼 택시까지 타고 왔는데.”

“자, 자네…….”

회의 자료를 쥔 채 굳어 버린 대윤.

그가 보이지 않는 걸까. 갑작스럽게 등장한 소녀는 분홍색 눈동자를 또르륵 굴리며 회의실 내부를 빠르게 훑었다. 그리고.

“꺅! 언니이!”

포옥.

은하의 품에 쏙 안기는 것이 아닌가?!

놀란 것은 대윤뿐만이 아니었다. 그 곁에 있던 광현도 경악했고, 자리에 앉은 제천대성과 닥터 플랜트 역시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저 애가 왜…….’

괴도 강아연.

철저한 실리주의자로 악명 높은 그녀가 협회의 남해안 게이트 작전 회의에 참여하리라고는 그중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실제로 아연은 당장 어제까지도 협회의 호출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아무런 연락도 없이 갑자기 회의 장소에 들이닥친 것이 놀랍지 않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저 태도.

“언니가 복계산 던전화 막았다면서요?! 어디 봐요, 다친 곳은 없고? 어우, 손 까칠까칠해진 것 좀 봐…….”

흑염의 프린세스 옆에 찰싹 달라붙어 그녀의 양손을 제 뺨에 비비적거리는 모양새가 퍽 낯설었다.

대윤은 아연이 S급으로 각성한 중학생 시절부터 그녀를 보아 왔지만, 저렇듯 타인에게 신체 접촉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본 기억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전에 아연과 게이트 토벌을 몇 번 함께한 경험이 있는 유환과 로제도 눈앞의 그녀가 낯설기는 마찬가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아연을 바라보고 있는데─.

“…….”

콰직.

펜이 부러지는 듯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시우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반쯤 밀려난 자세로, 바로 옆에서 생난리를 펼치는 아연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마스크에 가려지지 않은 새파란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은하를 향해 황소처럼 돌진한 아연 탓에, 그 옆에 앉아 있던 시우가 철퍽 밀려나 버린 까닭이었다. 만일 반사적으로 착지자세를 취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을 것이다.

고오오…….

후드 아래로 살짝 드러난 검푸른 머리카락이 서서히 백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시우가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은하에게 온갖 신경을 쏟고 있던 아연은 그제야 자신이 밀쳐 냈던 검은 마스크의 남자를 발견했다.

천진한 빛을 띤 분홍색 눈동자가 위아래로 그를 훑더니 곧 화사하게 휘었다.

“아, 몰랐음.”

명랑하고 상쾌한 대꾸. 반대로 시우의 눈빛은 차갑게 식어만 갔다.

“……너.”

시우가 입술을 달싹이던 그 순간,

벌컥─!

회의실 문이 또 한 번 기세 좋게 열렸다.

아연에게 쏠려 있던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귤색 머리카락의 작은 소년을 발견했다.

큼지막한 별 마크가 박힌 바주카를 어깨에 멘 소년은…….

“마, 마스터?!”

트릭스터 송민주였다.

벌떡!

준환이 의자를 걷어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스터가 왜 이곳에? 놀란 얼굴로 휙, 수현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수현 역시 바닥에 닿을 기세로 턱을 쭉 벌리고 있었다. 그녀도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준환이 형, 실망이야. 이렇게 중요한 일을 왜 나한테 비밀로 했어?”

“아, 아니…… 그게 그러니까…….”

말끝을 흐린 준환은 수현을 향해 곤란한 눈빛을 보냈다. 야, 좀 도와줘. 그런 의미였다.

“배준환 혼자가 아니라 우리 군단 전체가 내린 결정이었어요. 마스터는 아직 회복이 필요한 단계잖아요.”

“그, 그래요, 마스터. 병상에서 일어나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요. 이번 작전은 마스터께서 직접 참여하시지 않으셔도 저희끼리 어떻게든…….”

준환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그들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민주는 여전히 부루퉁하게 뺨을 부풀린 채였다. 회복은 무슨. 이렇게 멀쩡한데.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바주카를 만지작대던 민주는 곧, 시야 한구석에서 은하를 발견하고는 눈을 반짝 빛냈다.

“누나!”

날다람쥐처럼 날아든 민주가 은하의 의자를 홱 하고 돌렸다. 은하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던 아연은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물론 아연의 상태 따위 안중에도 없는 민주는 오롯이 은하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 재잘대기 시작했다.

“누나까지 나한테 한마디도 안 하기예요? 나, 매일 병원에서 얼마나 심심한 줄 알아요?”

“야, 꼬맹이.”

아연은 부글부글 끓는 목소리로 눈꼬리를 사납게 세웠다.

“아.”

은하에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민주가 아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못 봤음.”

“……뭐?”

──그리고 눈앞에서 벌어진 이 대환장 파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으니.

“혀, 협회장님, 이게 무슨 일이죠?”

“나도 잘 모르겠네.”

협회장 고대윤과 그의 부하 김광현이었다.

“믿기진 않지만 아무래도…….”

대윤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광경.

그것은 분명 대한민국 헌터계 역사상 최초의, S급 총집결의 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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