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17)화 (117/306)


#117. 선택의 순간
2022.11.25.


서울 S 병원 지하.

늑대의 부길드장이자 귀훈의 명실상부한 오른팔, ‘검은 톱날’ 이하균은 두꺼운 가면 너머로 눈앞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늑대의 작은 주인, 백랑 신시우.

“얼마 남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무겁게 입을 연 하균과는 달리, 시우에게서 돌아온 대꾸는 아주 가볍고 단조로웠다.

“그래?”

여전히 한쪽 귀에 이어폰을 끼운 그는 이쪽을 쳐다보고 있지도 않았다. 하균은 다시 한번 말문을 열었다.

“길어도 3개월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요.”

“…….”

이번에는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턱을 괸 시우는 말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이어폰을 통해 아렴풋이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적막한 공기 위를 걸었다.

부친의 죽음을 눈앞에 둔 아들의 표정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무심한 얼굴.

시우의 이러한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하며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하균은 가면 너머로 맞은편의 시우를 빤히 주시했다.

하균의 부름에 시우가 곧장 응답한 것은, 그의 기억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열 번을 부르면 그중 한 번 만날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그의 연락을 늘 무시하던 시우가, 오늘은 웬일로 바로 나타난 것이었다.

어쩌면 그에게 어떠한 심적 변화가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하균은 그 희박한 확률에 매달려야만 했다.

“도련님, 적지 않은 길드원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올해만 하더라도 본부와 지방 지부를 합하여 200명에 달하는 길드원이 늑대를 떠났다.

간부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야 있었지만, 내심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일부는 눈치를 살살 살피며 이적 시기를 엿보고 있었으며, 또 일부는 간부 중에서 새 마스터를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했다.

굳건하게 대한민국 헌터계 최상층을 지키고 있던 늑대에서, 소리 없는 내부 분열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었다.

우두머리를 잃게 된 무리가 내전을 겪거나 분열하게 되는 일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한낱 곤충에 불과한 일벌조차 여왕벌을 잃으면 새로운 여왕벌을 찾는다고 했다. 만일 그것에 실패하면 그 벌집은 텅텅 비게 될 것이다.

즉, 이대로라면 한국 헌터계를 군림하던 늑대가 추락하는 것도 시간문제란 소리였다.

그것을 막을 방법은 단 하나.

“지금이야말로 도련님께서 나서 주셔야 할 때입니다.”

─누구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를 왕좌에 올리는 일.

스르륵.

침묵을 일관하고 있던 시우가 의자 등받이에 느슨하게 등을 기댔다. 그리고 나직이 물었다.

“네게는, 그렇게 늑대가 중요한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에 하균은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시우는 높낮이 없는 어조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아니면 그저 ‘백야’가 중요한 것인가?”

“…….”

하균은 선뜻 답하지 않았다. 시우는 입을 닫아 버린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의자 팔걸이에 턱을 괴었다.

“몇십 년 전, 게이트 잔해에 파묻혀 있던 널 아버지가 주워 와서 길렀다고 했었지. 그 은혜를 갚을 생각이야?”

“……마스터께는 목숨을 빚졌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늑대는 조금 다릅니다.”

작게 숨을 내쉰 하균이 곧 고개를 들어 시우를 똑바로 응시했다.

“늑대는, 제 삶의 전부입니다.”

째깍째깍…….

시계 초침 소리가 몇 번 훑고 지나간 그 끝에서, 시우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하균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그렇지 않았던 것인지, 시우는 이번에도 그저 그렇게 단조로운 반응을 보였다. 무표정인 그의 얼굴에서는 이렇다 할 속내를 읽어 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사실 시우는 썩 만족스러운 상태였다.

‘늑대가 삶의 전부라.’

……생각보다 쓸 만하겠다. 시우는 하균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생각했다.

강한 의지는 집념이 되고 집념은 곧 집착이 된다. 시우가 유일하게 부친에게 배운 것이 있다면 단지 그것이었다.

귀훈의 죽음 이후 시우가 늑대의 뿌리를 뽑아내거나 깡그리 바꿔 버릴 시, 기존의 부마스터인 하균이 맞선다면 그의 입김은 상당할 터.

늑대에 대한 하균의 의지를 잘만 이용한다면, 어쩌면 그는 앞으로의 시우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카드가 되어 줄지도 몰랐다.

‘시험해 볼까.’

의자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던 시우가 다시 시선을 들어 하균을 바라보았다.

“그 소식은 들었나?”

“소식이라면.”

“남해안 게이트.”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시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거기 참여하기로 했거든.”

“…….”

하균이 입을 닫았다. 참여하기로 했다니? 누가? 도련님께서? 머릿속에 그러한 의문이 밀물처럼 가득 밀려온 탓이었다.

시우는 여태 헌터 활동을 극도로 꺼려 왔다. 튜토리얼조차 미루고 미루다 올해 겨우 등 떠밀리듯 치렀을 정도였으니.

그런 그가 협회에서 제안한 거대 작전에 스스로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도련님 혼자서…… 말씀이십니까?”

“아니.”

시우가 비스듬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참여자는 늑대에서 이미 골라 뒀어. 뭐, 한 200명 정도.”

“……네?”

하균의 입에서 답지 않게 멍청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200명씩이나 지원자를 모았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된다.

귀훈이 병상에 누운 현재 시점에서 마스터 대리 역을 맡고 있는 하균이었다. 늑대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가 모를 수가 없었다.

그 200명이 작정하여 하균의 눈과 귀를 피하고 입을 닫지 않은 이상─.

“…….”

그 순간, 살짝 벌어져 있던 하균의 입술이 꾹 닫혔다.

올해 늑대 길드를 떠났던 200명의 길드원들. 그 두툼한 명부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렇군. 그런 거였나.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젊은 늑대를 바라보았다.

의자에 느슨히 등을 기댄 시우는 하균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건 채.

“작전에 관련해서 내일 회의가 있거든. 협회까지 네가 함께 가 주었으면 하는데.”

“…….”

“…….”

무거운 정적 속, 하균의 목젖이 상하로 느릿하게 움직였다.

이하균은 신귀훈의 충직한 개.

시우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시우는 자신이 남해안 게이트에 참여하기로 했다는 것도, 그것을 위해 200명의 인원을 확보하였다는 것도 하균에게 전했다. 심지어 내일 협회에서 있을 회의에 함께 참여하자고도.

믿을 수 없는 자에게 선뜻 손을 내미는 이유.

생각해 보면 답은 간단했다.

‘묻고 계신 거다.’

너는 어느 줄을 탈 것이냐고. 늑대의 미래를 지킬 것인지, 혹은 늙고 병든 주인을 지킬 것인지.

──지금 이곳에서 선택하라고.

“어떻게 할래?”

그다지 참을성이 없는 시우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하균은 느릿느릿 고개를 들어 눈앞의 청년, 젊은 늑대를 바라보았다.

살짝 기울여진 고개를 따라 비스듬히 떨어지는 검푸른 머리카락. 그리고 그 아래에 자리한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는 꿰뚫듯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하균은 그것과 닮은 눈동자를 아주 오랫동안 보아 왔다.

‘하균아.’

지금은 늙고 병들었지만 한때는 하늘과 같았던, 한국 최초 S급이자 최강의 헌터 백야 신귀훈.

‘살다 보면 말이다, 누구에게나 선택의 순간이라는 것이 찾아오게 되어 있다.

그럴 때는 무조건 늑대를 우선시하거라.

너의 모든 선택, 그 끝에는 늑대가 있어야 한다. 알겠느냐?’

하균의 단 한 명의, 단 한 명이었던 주인.

“저는─.”

비로소 하균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것이, 그것만이 네가 은혜를 갚는 일인 걸 명심해라.’

* * *

다음날. 한국 헌터 관할 협회.

“협회장님, 다 모인 것 같습니다.”

회장실을 방문한 광현은 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협회장님?”

몇 번 더 노크를 해 보았지만 무반응.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기에, 광현은 “실례합니다.” 하며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윤은 소파에 앉아 커다란 모니터를 뚫어져라 응시 중이었다.

“크흠. 협회장님?”

“어, 왔는가.”

바로 옆에서 헛기침을 해 대자 그제야 대윤이 고개를 들어 광현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그렇게 유심히 보고 계셨던 건지. 광현은 힐끗 시선을 돌려 모니터를 확인했다.

모니터에 비치고 있는 것은…….

‘흑염의 프린세스?’

우거진 나무 사이로 양산을 무섭게 휘둘러 대는 흑염의 프린세스였다. 망자의 군락 CCTV에서 다운로드 한 녹화 영상인 듯했다.

뻐억─!

흑염의 프린세스가 까만 양산을 크게 휘두르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박살 나는 스켈레톤. 거의 대부분의 스켈레톤이 단 일격 만에 문자 그대로 뼛가루가 되어 바스러졌다.

일반적인 경우 레벨 5 수준의 몬스터는 E급 헌터도 어렵지 않게 처리할 정도였다.

다만 망자의 군락에 서식하는 스켈레톤의 경우 어지간한 파괴력을 가하지 않는 이상 무한으로 재생한다는 점 때문에 처치가 까다로웠다.

저렇듯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양산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박살을 낼 수 있을 상대는 아니란 소리.

퍽! 파앗! 빠각!

그러나 그런 상식을 무시하기라도 하듯, 모니터 속 흑염의 프린세스는 양산 한 자루만으로 아주 손쉽게 수십, 수백의 스켈레톤을 박살…… 아니, 멸살(滅殺)하고 있었다.

대윤 곁에서 넋이 나간 듯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던 광현이 “앗.” 하고 뒤늦게 퍼뜩 정신을 차렸다.

“협회장님, 다들 모였습니다. 이제 슬슬 내려가시죠.”

“음. 벌써 시간이 이리 되었군.”

삑.

리모콘 버튼을 눌러 모니터를 끈 대윤은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멈칫 굳었다. 책상 위에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가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그것들 모두가 남해안 지방 게이트 관리국에서 보내온 최신 자료 및 이번 망자의 군락 던전화에 관련한 보고서들이었다.

무거운 눈빛으로 책상 위를 응시하던 대윤은 이내 광현과 함께 회장실을 빠져나왔다.

이윽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별관 최상층에 위치한 특별 회의실이었다.

기다란 회의 책상, 그 가장 안쪽에 앉은 대윤은 고개를 들고 그곳의 면면들을 향해 한 번씩 시선을 두었다.

장미의 주인이자 국내 최고 치유 헌터 ‘닥터 플랜트’ 금로제.

불멸의 주인이자 육체 강화계의 거장 ‘제천대성’ 유환.

‘트릭스터’ 송민주를 대신하여 참석한 군단의 부길드장 배준환.

그리고…… 늑대의 부길드장 이하균.

‘저자가 올 줄이야.’

두꺼운 팔로 팔짱을 낀 유환은 하균을 빤히 주시했다. 활활 타오르는 유환의 시선이 적나라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하균은 꿈쩍도 하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른 이도 아닌 그가 이렇듯 뜨거운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즉, 무시하는 것이다.

빠직.

유환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돋아났다. 이래서 늑대는 질색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 아무튼 그랬다.

‘협회장이 말했던 비밀 부대가 늑대였다는 건가. 왜 진즉 말해 주지 않고.’

유환의 시선이 이번에는 협회장 대윤을 향해 휙 돌아갔다. 삽시간에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이봐, 협회장. 늑대가 이곳에 온다는 얘기, 난 단 한 마디도 못 들었─.”

나지막이 으르렁대던 유환이 돌연 입을 딱 다물었다. 곁에 앉아 있던 로제가 사뿐히 그의 손등 위에 손을 겹친 까닭이었다.

“유환.”

“……흠.”

단지 그것만으로 유환은 표정을 풀었다. 굉장히 빠른 태세 변환이었으나, 로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귀가 빨개진 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딴 곳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어쨌든, 이로써 적어도 이곳에서 싸움이 벌어질 가능성은 낮아졌다.

그다지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이 자리는 그야말로 국내 최정상급 헌터 총집합.

여기 모인 그들은 곧 있을 남해안 게이트 작전에서 각 부대를 대표할, 이른바 대장(隊長)이 될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을 차례로 확인한 대윤은 힐끗 광현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으로 물었다.

‘트릭스터와 괴도는?’

그러자 광현은 곤란한 눈빛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역시 불참인 모양.

‘어쩔 수 없지.’

그들의 빈자리가 작지는 않을 테지만 이 정도가 어디인가. 충분히 마음이 든든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비장의 수가 아직 있었으니.

“곧 있을 재앙에 대비하여 오늘 이 자리에 참여해 준 그대들에게 협회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하여 감사 인사를 전하네. 우선, 본격적인 회의를 진행하기에 앞서 그대들에게 소개할 사람이 있네.”

거기까지 말한 대윤은 닫힌 회의실 문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들어오게.”

달칵─

천천히 열리는 문. 그 사이로 또각, 맑은 구두 소리가 울렸다.

“지원대의 대장을 맡아 줄, 흑염의 프린세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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