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16)화 (116/306)


#116. 리더 결정
2022.11.24.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니요?”

협회 소속 김광현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은매화를 바라보았다. 장미 길드원이자 이번 복계산 자격시험의 책임자인 그녀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현재 어떻게든 복계산 진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만 보시다시피…….”

말끝을 흐린 그녀는 힐끗 산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검은 연기. 오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결코 저것에 닿으면 안 된다고.

은매화는 광현에게 현재까지의 상황에 대해 차근차근 전달했다. 물론 전달 내용은 별것 없었다. 바깥에서 파악할 수 있는 일은 적었으니까.

“시험자들과 함께 진입했던 우리 길드원들도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간섭하고 있는 양, 산 곳곳에 설치된 CCTV도 하나도 빠짐없이 먹통인 상태.

즉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제가 판단하기에는 아무래도…….”

“던전화가 진행되고 있는 게로군.”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협회장 대윤이 성큼 다가왔다. 은매화는 그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죄인과 같은 얼굴을 한 그녀에게 대윤이 말했다.

“던전화는 게이트 리더로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야. 장미 탓이 아니니 고개를 들게.”

그리 말한 그는 넓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시험장을 중도 퇴장한 헌터가 약 서른 명 정도. 남은 인원은 아직 산중을 헤매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안쪽에서 ‘파훼 조건’을 눈치채고 던전화 진행을 막지 않는다면 던전은 곧 ‘완성’될 것이다.

바깥에서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던전이 완성된 이후 입구가 열리자마자 수색조를 파견하여 조난자 및 부상자를 구출하는 일. 최대한 빨리.

‘하지만…….’

대윤은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어째서 하필 시험이 열리는 오늘?’

최근 들어 눈에 띄게 잦아진 언노운 게이트 출현, GIA의 예언, 그리고 갑작스러운 던전화까지.

이 모든 악재가 겹친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어떤 징조일지도 몰라.’

어둠에 휩싸인 복계산을 무거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대윤이 다시금 은매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닥터 플랜트는?”

“서둘러 이쪽으로 오고 계십니다. 아마 1시간 후면 도착하실─.”

은매화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혀, 협회장님!”

츠츠츠츠츳─

돌연 복계산 전체에 붉은 스파크가 튀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휘오오……!

제대로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들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검게 물든 숲이 파도처럼 요동치고 산 입구부터 자욱했던 연기가 서서히 걷혀 간다.

설마 완전히 던전화되어 버린 것일까? 대윤을 포함한 모든 인원이 초조한 눈빛으로 산을 올려다보았다.

바로 그때,

“저, 저기! 건슬링어와 샤인 J야!”

와아아! 누군가 함성을 내질렀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정말이었다. 검은 연기가 걷힌 곳에서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두 그림자. 시험에 참여했던 B급 헌터, 건슬링어와 샤인 J였다.

그들을 선두로, 다른 헌터들도 뒤이어 숲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이, 이쪽! 이쪽입니다!”

은매화는 재빨리 그곳으로 다가가 그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크게 다친 곳이 없어 보이는 샤인 J와는 달리, 그녀가 부축하고 있는 건슬링어는 작지 않은 부상을 입은 듯했다.

“괜찮으신가요?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게…… 갑자기 히든 업적 알림이 뜨더니 던전화가…… 아니, 설명은 나중에 하고 우선 이 사람부터 봐 주세요.”

“아, 네. 어서 이쪽으로.”

은매화는 건슬링어를 포함한 부상자들을 미리 설치해 둔 막사로 이동시켰다.

초상집 분위기였던 산 입구가 한바탕 수선스러워졌다. 차례로 산을 빠져나오는 시험자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큰 외상은 없어 보였다.

“인원은 이게 다인가요?”

장미 길드 직속 치유 헌터들에게 각기 명령을 내린 은매화는 시험 참여자 명부를 팔락이며 샤인 J를 향해 물었다.

“글쎄요. 저도 정신이 없어서. 저희랑 같은 공간에 있었던 헌터는 아마 이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다른 자들은 저도 잘…… 앗.”

돌연 샤인 J가 하던 말을 멈추고 은매화를 쌩하니 지나쳤다. 어찌나 급하게 뛰어가는지 자신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는 지팡이마저 홀라당 내팽개치고 말이다.

“리더, 오셨군요! 뒤처지진 않으셨을까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리더?

샤인 J의 지팡이를 잽싸게 잡아챈 은매화가 의아한 얼굴로 뒤로 돌았다.

장미 측에서는 따로 리더를 지정하지 않았다. 이곳에 모인 헌터들에게 서로의 존재란 팀원이 아닌 경쟁 상대였으니 굳이 리더가 필요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리더, 전투뿐만 아니라 산을 내려오시느라 고생하셨는데 어서 이리 와서 제 망토를 깔고 앉으시죠.”

샤인 J는 빙긋 웃으며 자신들의 리더, 흑염의 프린세스를 바라보았다.

호감을 넘어 경의마저 느껴지는 눈빛. 하산하며 줄곧 받아 온 것이었지만 은하는 그러한 눈빛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아 다른 곳으로 휙 시선을 돌려 버렸다.

“아뇨, 괜찮아요.”

“사양 마시고요. 앗, 잠시만요. 거기 먼지가.”

샤인 J는 떨떠름한 은하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은하의 옷가지에 묻은 흙먼지를 정성스레 털어 주거나 자신의 옷 안에 붙여 두었던 핫팩까지 꺼내 은하에게 건네는 등 지극정성이었다.

“리더!”

“오셨습니까? 내려오는 길 별일 없으셨고요?”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 근처에서 쉬고 있던 자들은 물론 막사 내부에서 치료를 받던 자들까지 떼로 모여 은하 곁에 섰다.
그 기이한 광경을 한참 동안 지켜보던 은매화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분이 당신들의 리더…… 라고요?”

그러자 새 핫팩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던 샤인 J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분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꼼짝없이 던전 속에 갇혔을 겁니다. 산을 이렇게 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분 덕분이죠.”

맑은 미소와 함께 그녀는 다시 한번 흑염의 프린세스, 은하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러니 이분이야말로 우리의 리더이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샤인 J가 주변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치듯 묻자,

와아아─!

주변의 헌터들이 기다렸다는 듯 함성을 질렀다.

“…….”

은매화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잠깐 사이에 양손에는 미리 데워 둔 핫팩과 뜨거운 코코아를, 어깨에는 두툼한 담요를, 발에는 따뜻한 온수가 담긴 양동이를 두게 된 흑염의 프린세스는 근처의 중년 남성에게 제 몫으로 들어온 물건…… 아니, 헌상물들을 나눠 주고 있었다.

은매화는 수많은 지원자들 속 유일한 F급이었던 그녀, 흑염의 프린세스를 유독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차림새가 그렇다 보니 시험장에서부터 눈에 띄기도 했고, 무엇보다 협회가 요구하는 암속성과 화속성을 동시에 지닌 자였으니까.

게다가…….

‘은매화, 흑염의 프린세스가 찍힌 CCTV 영상은 따로 빼서 보관해 놔요.’

닥터 플랜트는 그녀를 주목하고 있는 듯했다.

은매화는 늘 그래 왔듯 마스터의 명령에 이유 불문 따를 생각이었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저 헌터에게 어떤 특별한 점이 있는 것인지 말이다.

“흑프! 흑프! 흑프!”

박자에 맞춰 손뼉까지 치며 그녀를 칭송하는 헌터들. 마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을 대하는 태도였다.

일반인이라면 어깨가 으쓱할 만도 한데, 은하의 새까만 동공은 작은 흔들림도 없이 차분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도대체 망자의 군락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당혹스러운 얼굴을 한 은매화 곁에, 흑염의 프린세스가 사뿐히 한 발자국 다가왔다.

“저기.”

“네, 네?”

퍼뜩 고개를 들자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거대한 보따리가 시야 앞에 불쑥 내밀어졌다.

“모아 온 핵은 어디에 제출하면 되나요?”

또르륵.

살짝 열린 보따리 틈으로 녹색 구슬이 굴러떨어졌다. 눈앞의 보따리를 확인한 은매화의 얼굴이 점차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얼핏 보아도 몇백은 되어 보이는 듯한 핵들. 이 정도면 산중의 스켈레톤을 거의 몰살하고 돌아온 수준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한편, 조금 벗어난 거리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광현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협회장님…….”

“음.”

대윤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흑염의 프린세스. 그의 시선은 오롯이 은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 * *

이준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흑프! 흑프! 흑프!”

저 멀리서 헌터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어째서일까. 이준은 반사적으로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할 새도 없이.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그곳에는 한 사람을 향한 환호가 짙게 섞여 있었다.

이준은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제 가슴 위에 오른손을 얹었다.

쿵, 쿵, 쿵…….

심장이 아직도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무언가를 찾듯 다급하게 움직이는 눈동자. 이윽고 그것이 한군데에서 우뚝 멈추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여자.

“…….”

이준은 그제야 조금 풀린 얼굴로 나무에 느슨하게 등을 기댔다.

‘【복계산을 뒤덮는 검은 구름을 봤다고. 그 아래에 그녀가 서 있었어.】’

안드레아에게 그 말을 들은 이준은 당장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왔다. 이후의 기억은 거의 없었다. 그냥 머릿속에 새하얀 물감이 번진 듯했다.

원래라면 이런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직접 여기까지 오는 수고를 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캐서린을 시켜 장미 길드에 연락을 넣어도 되었을 것이다.

그도 아니면 그냥 모른 척,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관심 없다는 듯 귀를 닫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늘 그랬던 것 같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 애와 연관된 일이라면 언제나.

“우오오오! 리더어!”

누군가가 외쳤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던 이준이 살짝 고개를 들어 그곳을 바라보았다.

“다들 뭐 하고 있어?! 세리머니다, 세리머니!”

“리더, 이리 오세요!”

헌터들이 한곳에 모여 누군가를 잡아끌고 있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흔들림 없이 단호한 어조였지만 그 목소리에는 사실 어색함과 당혹감이 서려 있다는 것을 이준은 알 수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에이, 리더, 사양 마시고.”

“맞습니다, 리더! 리더께서는 우리의 은인이 아니십니까! 자, 이리 오십시오!”

“아니, 전 정말…….”

번쩍!

헌터들이 은하를 들었다. 그러더니 공중에 던졌다가 받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흑염의 프린세스, 만세!”

뻣뻣하게 굳은 은하는 그 세리머니를 온몸으로 받아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익숙하지 않은지, 그녀는 결국 정색하고 그들의 손을 뿌리쳐 버렸다.

이전부터 그녀에게는 그런 면이 있었다. 눈에 띄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하면서도, 막상 주목을 받게 되면 내심 어색해하고는 했었다.

훈련소 졸업일에 훈련생 대표 선서를 하던 날에도, 분대장으로 결정이 나던 날에도, 부모님을 구해 주어서 고맙다고 어느 한 청년이 두 손을 꼭 잡고 울던 날에도, 은하는 늘 저런 얼굴을 했다.

“리더? 리더! 어디 가세요?”

“……잠시 화장실에.”

“화장실은 그쪽이 아닌데요?!”

그다지 멀지 않은 곳. 그러나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이준은 하염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을 뗄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그녀의 모습에서, 도저히.

휘이이이…….

또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환호성과 웃음소리가 섞인 그 바람은 이준의 머리카락, 뺨, 가슴을 세차게 훑었다.

이윽고 다시 바람이 멎었을 때.

“마에스트로?”

“……!”

넋을 놓고 있던 이준이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홱 고개를 돌렸다.

“헉!”

인기척의 주인공, 광현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순간적으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린 것.

분명 착각이 아니었다. 아주 짧은 사이, 그는 보이지 않은 무언가에 속박이 된 듯했다.

“……자네였나.”

이준이 낮게 중얼거렸다. 슈우욱, 그의 주변에 공격적으로 피어올랐던 진홍색 기운이 언제 그랬냐는 양 공기 중에 흩어졌다.

광현은 한껏 치솟았던 어깨를 스르륵 아래로 내렸다. 몸 전체를 꽁꽁 옭아매고 있던 속박감이 이제야 완전히 사라졌다.

“이,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마에스트로께서 망자의 군락을 방문하신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확인을 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잠시 들렀을 뿐이야.”

“확인, 이요?”

눈을 깜빡이던 광현이 한 박자 늦게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에스트로도 복계산 던전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마침 잘되었다.

“협회장님께서도 저곳에 계시니 우선 저와 함께 가시죠. 시험 참여자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아니. 난 이제 돌아가야 해서.”

“예?”

등을 돌렸던 광현이 힐끗 이준을 바라본 순간,

“자네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후욱.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짙은 페로몬 향이 다가왔다.

“그렇지?”

눈이 마주치자 이준의 잿빛 눈동자가 사르륵 휘었다. 검은 가죽 장갑을 쓴 커다란 손이 문득 코앞까지 다가왔다.

스르륵, 광현의 동공이 넓어지며 또렷하던 눈매가 흐릿해졌다. 이윽고.

“……어, 어라?”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광현은 홀로 그곳에 남아 있었다.

그는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 분명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참, 내 정신 좀 봐.”

차에 가서 자료를 가져오려고 했는데. 요즘 들어 이렇듯 정신을 놓아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무언가에 단단히 홀린 것이 아니라면, 이제 정말 퇴사할 때가 된 모양이다.

“어휴, 인생…….”

깊은 한숨을 내쉰 광현이 뒷덜미를 벅벅 긁으며 그곳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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