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11)화 (111/306)


#111. 망자의 군락 (3)
2022.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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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계산에 들어온 은하는 우선 주변을 탐색해 보았다.

체계적인 관리와 기술 발전 덕분에 2031년 현대에는 게이트가 폭주하는 일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은하 시절에는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

걸음을 멈춘 은하는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손으로 흙을 쓸었다.

물기 하나 머금지 않은 푸석푸석한 감촉. 마치 염료를 만진 듯 손끝이 검붉게 물들었다.

이 정도 오염도를 보아하니 역시 이곳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방치된 것이 분명했다. 은매화였던가. 지원자들을 안내하던 장미 길드원도 그리 말했고. 다만.

‘직접 산으로 들어와 보니 겉에서 보던 것보다 상태가 심각한데.’

은하는 검게 물든 제 손가락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아하하하하…….

저 멀리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이 근처 어딘가에 모인 헌터 무리들이겠지. 소리만 듣자면 산에 피크닉을 하러 온 등산객이라 착각할 만큼 긴장감이라고는 없었다.

‘그냥 기우일까.’

높은 오염도와는 달리, 산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은 까다롭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이상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고 말이다.

인간의 혈향으로 추정되는 냄새도 아직까진 없었다. 즉, 적어도 은하 가까이에서는 부상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은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팔랑─

시야 구석에 낯선 물체가 스친 듯했다.

“……!”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손바닥을 펼쳐 들었던 은하가 멈칫 굳었다.

아주 짧은 사이 ‘그것’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은하는 찰나의 순간 보았다. 연둣빛이 감도는 거대한 날개. 그건 분명…….

‘……팅커벨?’

이런 곳에도 팅커벨이 있단 말이야? 은하는 허공에 굳어 있던 손을 아래로 스르륵 내리며 훈련소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으, 으으은하야! 벌레! 벌레!’

페로몬 능력으로 개미 따위의 곤충을 주로 다루는 주제에 그 누구보다 벌레를 싫어했던 이준.

이름 모를 벌레가 들끓는 야외 진지(陣地)에 머무를 때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물까지 글썽였었지. 덕분에 은하는 자다가도 일어나 반쯤 감은 눈으로 갖가지 벌레를 맨손으로 때려잡아 주곤 했었다.

‘아……. 빨리 여름이 갔으면. 난 벌레가 너무 싫단 말이야…….’

이준은 죽은 나방의 시체에서 애써 눈을 돌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은하는 팅커벨, 즉 거대 나방이 사라진 방향을 심각한 얼굴로 응시하며 그때의 기억을 곱씹었다.

숨을 쉴 때마다 연기처럼 피어나는 입김. 모르긴 몰라도 지금 이곳의 기온은 서울보다 현저히 낮을 것이 분명했다.

간간이 휘몰아치는 칼바람에 귓불이 얼얼할 정도. 이곳이 강원도 철원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상할 만큼의 한기였다.

이런 날씨 속에서 저러한 나방이 멀쩡히 날아다니고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렇게 녀석이 사라진 방향을 유심히 응시하던 도중.

[언니, 뒤.]

팟!

그녀의 오른쪽 어깨에서 검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뒤쪽을 향해 예고도 없이 날아간 불꽃.

한 박자 늦게 퍼엉! 폭발음이 들려왔다.

은하는 스르륵 뒤로 돌아 흙바닥 위에 볼품없이 널브러진 스켈레톤의 뼛조각을 확인했다.

“…….”

그리고 다시 한번 나방이 사라진 방향에 시선을 던진 뒤, 무릎을 낮춰 뼈다귀에 파묻힌 녹색 구슬을 집어 들었다.

그로부터 3시간 후.

[Lv.5 ‘스켈레톤’에게 강력한 지배의 힘이 깃듭니다.]

[Lv.5 ‘스켈레톤’의 공격력이 강화됩니다.]

[Lv.5 ‘스켈레톤’의 방어력이 강화됩니다.]

팟! 팟! 팟!

스켈레톤 사이에 검은 그림자가 재빠르게 튀었다. 일반인의 눈으로는 쫓을 수도 없는 속도. 보통 사람이라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다.

탓.

공중을 누비던 은하가 제자리에 섰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투두둑…….

멀쩡하게 서 있던 스켈레톤들이 일제히 무너져 내렸다. 그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갈비뼈가 박살 나 있었다.

은하는 저벅저벅 걸어가 산더미처럼 쌓인 뼛조각 사이에서 핵들을 주워 모았다.

‘이걸로 400개째.’

망자의 군락에 들어선 지 어언 3시간. 은하는 자그마치 400개에 육박하는 핵을 모으는 것에 성공했다.

급한 상황이 아니면 굳이 흑염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대부분 양산만으로도 충분한, 고작 그 정도의 난이도.

그런데 예상치 못한 난관이 그곳에 있었다.

[인벤토리가 가득 찼습니다.]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창에 은하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벌써 꽉 찼다고?’

인벤토리는 코인으로 확장하는 것이 가능했다. 고양이의 아낌없는 후원 덕분에 은하는 인벤토리를 이미 최대치로 확장해 둔 상태였다.

그런데도 칸이 부족하다니…….

경매 때 가죽 따위의 잡동사니 아이템을 꽤 많이 팔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양이 많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당신의 터질 듯한 인벤토리 칸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어디 엿 바꿔 먹을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아이템은 자리만 차지하니 그냥 바닥에 갖다 버리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합니다.]

고양이의 제안에 은하는 잠시 고민했다.

지난 헌터 옥션 때처럼 언제 어떤 목적으로 쓰일지 모르는 일이니 가능하면 버리고 싶지 않았다.

고민의 빛이 깃들어 있던 까만 눈동자가 휙 어디론가 움직였다. 스켈레톤이 두르고 있던 낡은 망토를 눈에 담는 순간 은하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저거다.’

은하는 박살 난 뼛조각 사이에 파묻혀 있던 망토를 꺼내 툭툭 털었다. 그리고 인벤토리에 모아 두었던 핵, 그리고 방금 모은 핵들을 한데 모아 보따리처럼 묶었다.

‘완벽해.’

단단히 묶은 매듭을 보고 지레 만족스럽게 웃은 은하는 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다시 길을 나섰다.

* * *

복계산 중턱, 망자의 군락 어딘가.

“젠장, 이 녀석들 왜 이렇게 끈질긴 거야?!”

한 헌터가 짜증이 섞인 욕설을 뱉었다.

퍼억!

그가 너클을 낀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팽이처럼 팽그르르 돌아가던 스켈레톤의 두개골이 쿵! 하고 땅에 떨어졌다.

달그락달그락…….

하지만 머리를 잃은 몸체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느린 움직임.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성가신 것은 분명했다.

그들이 복계산에 오른 지도 벌써 3시간째였다. 지금까지 모은 핵의 개수는 총 72개.

적은 수는 아니었지만 4인 파티라는 것을 감안하여 4등분을 하면 인당 20개도 되지 않는 개수였다. 즉 1시간당 핵 10개를 챙기는 것도 빠듯했던 것.

“비켜!”

파티원 중 한 명이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퍼어어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박살 난 스켈레톤. 뼈다귀 사이로 작은 녹색 구슬이 반짝였다. 핵이었다.

“이걸로 73개째인가.”

“아까 여길 지나친 파티는 벌써 100개도 넘게 모았다던데…… 이대로는 안 돼. 상대 평가라고 했잖아. 이러다간 우리 모두 시험에 떨어질 거라고.”

후방에서 지원하던 다른 헌터가 다가와 초조한 듯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난 꼭 이 시험에 통과해서 작전에 참여해야 해. 카드 값 갚아야 한단 말이야.”

“괜찮아. 아직 7시간이나 남았어. 조금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보자고.”

“일단 조금 쉬는 건 어때? 네 말대로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까 10분 정도는 괜찮을 거야. 계속 무기를 휘둘러 댔더니 어깨가 뻐근해.”

“난 조금 더 버틸 수 있어.”

“나도.”

결국 그들은 둘씩 나뉘었다. 두 명이 근처 나무 아래 앉아 휴식하는 동안 나머지 두 명이 핵을 모으기로 합의한 것.

“아으, 어깨야.”

나무에 등을 기댄 남자는 붕붕 어깨를 돌리며 신음을 흘렸다. 고된 얼굴이었지만 부상당한 곳은 없었다. 레벨 5짜리 스켈레톤을 상대로 다칠 일이 없었으니 말이다.

일정 구역을 나가면 무력화되는 스켈레톤.

그 점을 이용하여, 처음에는 일부러 놈들을 숲 바깥까지 유인해 해치우려고 했다. 하지만 숲을 나간 스켈레톤은 그대로 무너져 내리면서 핵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 문제였다. 즉 핵을 구하려거든 숲속에서 직접 놈을 해치우는 수밖에 없었다.

이건 장기전이었다. 제한된 시간 내에서 얼마나 많은 핵을 모으느냐, 그것이 핵심. 그런 의미에서 파티 플레이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문제는 이곳이 너무나도 춥다는 것과,

“적어도 인당 100개 정도는 챙겨야 안심인데…….”

“100으로 돼? 최소 200개는 챙겨야 할걸.”

생각보다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까 못 봤어? 지원자들 중에 B급 헌터도 섞여 있었어. ‘쇠방망이’랑 ‘음유시인’은 저희들끼리 파티까지 맺었던데.”

B급끼리의 파티라니.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이 산 어딘가에서 핵을 쓸어 담고 있을 것이다.

아, 가능하다면 나도 그쪽 파티에 가고 싶었는데.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남자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데.

“저…… 혹시 그쪽, 파티 자리가 남아 있는가?”

응?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근처까지 다가온 아저씨가 멋쩍게 뺨을 긁고 있었다.

남자는 눈앞에 선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실력만 있다면 파티 신청이야 환영이지만…….

‘이 아저씨, 아직까지 파티를 못 구하고 있는 걸 보니 어딘가 하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은데.’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그들이 복계산에 들어오고 나서 3시간이 지난 상태였다. 웬만큼 쓸모 있는 헌터들은 저마다 팀을 꾸리고도 남았을 시간이었으니까.

“컨셉 헌터다. 광대저씨라고, 아마 E급이었던가.”

아니나 다를까, 동료 헌터가 귓속말로 속닥거렸다. 광대저씨를 바라보던 헌터가 알겠다는 듯 ‘흐응’ 하고 눈매를 좁혔다.

“모아 둔 핵은 좀 있어요?”

“여기 있네.”

광대저씨가 기다렸다는 듯 인벤토리를 열었다. 펼쳐진 손바닥 위로 녹색 구슬, 스켈레톤의 핵이 빛무리와 함께 현실화되었다.

“풉.”

헌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고작 3개. 광대저씨가 보란 듯이 내민 핵의 개수를 보니,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계산하자면 이 아저씨는 한 시간에 겨우 하나의 핵을 구한 셈이었다.

“죄송하지만 저희 파티에 합류하는 건 좀.”

“어이, 아저씨. 여긴 만석이니 다른 데 알아보슈.”

눈을 돌리려는 그들을 향해 광대저씨가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부탁하네. 난 이 시험에 꼭 통과해서 작전에 참여해야 해.”

절박한 표정. 시킨다면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그러나…….

“아저씨,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헌터는 단단한 입매를 무너뜨리지 않고 말했다. 그 단호한 태도에 광대저씨는 공중에 붕 뜬 손을 끝내 거둘 수 밖에 없었다.

“……하아.”

홀로 터덜터덜 산길을 걷던 광대저씨는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섰다. 이대로 가면 시험에 떨어지고 말 거라는 불안 때문이었다.

방금 전 거절로 벌써 5번째였다.

착잡했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내일부터는 또다시 인터넷 공고를 뒤지며 일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세상 참.”

다시 다른 파티를 찾아보자. 이 많은 지원자들 중 그를 받아 줄 사람 한 명 없을까. 다시 힘을 내서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끼리리리릭…….

등 뒤에서 칠판에 손톱을 긁는 양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휙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석궁을 든 스켈레톤이 서 있었다.

스켈레톤은 크게 근거리 공격형과 원거리 공격형, 두 종류로 나뉘었다. 보다 까다로운 것은 당연히 원거리형이었다.

놈은 삐거덕삐거덕하며 석궁을 광대저씨에게 겨누었다.

광대저씨는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놈의 움직임은 둔했지만 날아드는 화살은 그렇지 않을 것을 알았다. 적어도 광대저씨의 ‘팡파르’보다는 빠를 것이다.

찰카닥, 석궁이 내는 소리에 광대저씨가 움찔 몸을 떨었다. 공격해? 아니면 도망가? 짧은 찰나 고민했다. 그러나.

‘아빠!’

──처음부터 답은 하나였다.

피유웅……!

오색찬란한 연기와 함께 광대저씨의 손끝에서 폭죽이 터졌다. 그리고 그 순간,

퍼어어어엉─!

스켈레톤이.

“……?!”

폭발했다……?

광대저씨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내가…… 해치운 건, 가……? 그것도 단 일격에……?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같은 스킬로 다른 스켈레톤을 공격했을 때 한 번의 공격으로 이만큼의 치명타를 날린 적은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자폭한 걸까? 그도 아니면 연기? 이런 지성이 없는 몬스터에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패닉에 빠져 있는 광대저씨의 귓가에 돌연 바스락, 풀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주인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광대저씨는 까맣게 타 버린 스켈레톤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목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천천히 들어 올렸다.

“여기요.”

슥.

눈앞에 내밀어진 스켈레톤의 핵.

두 눈을 끔뻑인 광대저씨가 조금 더 시선을 올려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아, 아가씨?”

“……?”

커다란 보따리를 어깨에 멘 흑염의 프린세스, 은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들고 있는 보따리는 울룩불룩해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다.

광대저씨는 보았다.

“그, 그거…….”

보따리 입구 사이로 보이는, 엄청난 양의 녹색 구슬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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