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10)화 (110/306)


#110. 망자의 군락 (2)
2022.11.18.


버스에 오른 은하는 창가에 턱을 괴고 바깥을 응시하고 있었다.

버스는 아직 출발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시험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에게 속박 스킬이 있으니까 우선 그걸 이용해서 놈들을 묶은 다음에 사냥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찬성.”

“근데 거기 몬스터들 언데드잖아. 한 방에 처리하지 않으면 계속 재생할 텐데…….”

“혹시 몰라서 중독 효과 아이템들도 챙겨 오긴 했는데. 한번 써 보고 소용이 없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물리적 타격을 가하는 수밖에.”

“잠깐. 핵은 어떻게 나눌 건데? 그게 제일 중요하지 않겠어?”

이미 저마다 짝을 지은 헌터들은 고유 능력이나 주력 스킬, 전투 스타일에 따라 역할을 분담하는 등 꼼꼼하게 전략을 세우며 어떻게 이 시험을 헤쳐 나갈지에 대해 머리를 맞댔다.

은하에게는 꽤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 시절, 한 게이트 토벌이 끝나고 다음 게이트로 향할 때 늘 군용 수송 차량을 타고 이동하곤 했었으니 말이다.

그럴 때마다 늘 은하 옆자리를 차지해 재잘대던 사람이 있었다.

은하야, 경주에 가 본 적 있어?’

‘줄곧 궁금했던 건데…… 은하 너 혹시 신수와 계약은 맺었어?’

‘넌 12신수 중에 용이 잘 어울리겠다. 제일 강하니까.’

턱을 괴고 있는 상태 그대로 스르륵 눈을 감아 본다. 감긴 눈꺼풀 뒤로 어머니의 묘비 앞에 홀로 서서 기도를 올리던 뒷모습이 떠오른다.

‘결국 못 쫓았어.’

아무것도 물어보지 못했다. 그날 이후에도 두세 번 정도 어머니의 묘를 방문했지만 이준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은하는 이유 모를 확신이 들었다. 머지않아 다시 그와 만나게 될 거라는, 그런 확신 말이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흥, 피라미들끼리 잘들 논다! 아무리 파티 플레이를 해도 네놈들은 우리 언니 발끝도 못 따라올 게 뻔하다며, 주변 헌터들을 못마땅한 듯 바라봅니다.]

한편 고양이는 무언가 단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아까부터 저 상태였다.

짐작하건대, 아무도 은하에게 파티 제안을 해 오지 않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막상 누군가 다가오면 발톱을 세울 거면서 말이다.

은하는 생각했다. 고양이의 마음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우리 언니가 여기서 너희랑 같은 버스를 타고 있을 짬밥인 줄 아느냐며 저 어리석은 중생들을 보라며 한숨을 쉽니다.]

[언니도 언니라며, 언니는 F급 따위가 아니잖아! 가만히 있으니까 이것들이 언니를 가마니로 알지 않느냐! 하고 혼을 내듯 허리춤을 짚습니다.]

은하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또다시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아니, 잠깐만…… 하고 수염을 쓰다듬습니다.]

[잠시 후, 이건 기회야! 하고 번쩍 고개를 치켜듭니다.]

[언니는 저들과 격이 다르다는 것을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보여 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합니다.]

[이런 취급은 이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 내가 이런 꼴을 보기 위해 그곳을 탈출한 것이 아니라며 핑크 젤리로 탁탁 땅을 두드립니다.]

띠링, 띠링, 띠링…….

고양이의 흥분에 따라 눈앞에 겹겹이 팝업되는 메시지창을 보며 은하가 말했다.

“고양아. 미리 말해 두지만 난 단 한 번도 내가 F급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아니, 그러면 뭘 하냥! 세상은 언니를 XX으로 아는데! 하고 빽 소리칩니다.]

분노에 사로잡혀 날뛰는 모습처럼만 보이지만 생각해 보면 고양이가 하는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은하에게 있어서 랭크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애초에 은하로 살던 시절에는 헌터에게 랭크 따위는 없었기도 하고.

그러나 이제는 잘 알겠다.

‘해야만 하는 일’. 사람을 구하는 일에도 세상은 랭크를 따진다는 것을.

──그렇다면 기꺼이.

“네 말이 맞아.”

흑염의 프린세스가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행동은 몬스터를 쓰러트리는 일도, 양산을 휘두르는 일도 아니었다.

증명.

“이제는 보여 줘야겠지.”

반론 여지조차 없게끔, 아주 확실하게.

[…….]

그러자 무서운 기세로 떠오르던 메시지창이 돌연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후.

띠링─!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그게 정말이냐며 반짝 눈을 뜹니다.]

[그래! 핵을 수십 개, 아니 수백 개는 챙기는 거야! 하며, 다른 사람들 코를 납작하게 해 줄 생각에 흥분된다는 듯 분홍색 코를 벌렁거립니다.]

저렇게 좋을까.

이리저리 움직이는 메시지창은 마치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을 그것을 응시하며 혼자 웃음을 삼키던 와중.

“실례합니다, 여기 앉아도 될까─.”

누군가 은하 곁에 다가왔다. 멀끔한 차림의 중년 남성이었다.

“네.”

메시지창에서 시선을 거둔 은하는 그를 바라보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은하는 그가 놀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처음에는 이 요란한 복장 탓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가씨, 오랜만이네. 나 기억해요?”

남자는 반가운 얼굴로 옆자리에 앉았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던 은하였지만 넉살 좋은 미소를 마주한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여기서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땐 정말 고마웠어.”

온헌트에서 여름 특집으로 기획한 <2031년, 여름보다 HOT한 스타 헌터>. 이 사람은 그곳에 함께 출연했던 컨셉 헌터였다.

광대 분장을 하고 있던 그때와는 달리 오늘은 평범한 중년 남성의 모습이었던 까닭에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그때 가방 안에 상금을 넣어 두고 간 거, 아가씨 맞지? 뒤늦게 방송국 밖까지 쫓아 나갔는데 벌써 사라지고 없더라고. 수소문해도 연락처를 알아낼 방법도 없고…….”

가방 속에서 낯선 봉투를 발견했을 때 어찌나 놀랐던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때처럼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무어라 이야기해야 좋을지 몰라 멋쩍게 뺨만 긁적이는 그에게 은하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민지는 패딩을 마음에 들어 하던가요.”

“……아.”

순간 굳어 버린 광대저씨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주머니를 뒤적여 휴대전화를 꺼냈다.

“어찌나 방방 뛰던지 지붕을 뚫고 날아가는 줄 알았지 뭔가.”

슥.

눈앞에 내밀어진 그의 휴대전화 속에는, 그의 딸 민지가 새하얀 패딩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잘 어울리네요.”

액정 속 소녀를 응시하던 은하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광대저씨가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그렇지?”

휴대전화를 집어넣은 광대저씨는 딸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갔다.

“말도 마. 빨리 겨울이 됐으면 좋겠다고 난리도 아냐. 지난주만 해도 패딩 입고 학교 가겠다는 걸 억지로 뜯어 말렸다니까. 누가 10월 말부터 패딩을 꺼내냐고 말이야.”

안 그래요? 광대저씨가 은하를 바라보았다.

어휴, 하고 내쉬는 한숨과는 달리 그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걸려 있었다. 마주 보고 있는 은하에게마저 전염이 될 정도로 행복한 미소였다.

* * *

그들은 복계산 망자의 군락에 도착할 때까지 시시콜콜한 담소를 나누었다.

그리고 어느덧 멈춘 버스.

은하는 그곳에 내리자마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여긴…….’

검은 산. 첫인상은 그러했다. 아직 낮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이곳에만 햇볕이 들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부지런히 임시 치료 막사를 짓기 시작하는 장미 길드원들 너머로, 산봉우리를 뒤덮은 먹색 구름이 보인다.

11월인데도 불구하고 서울의 겨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추위. 아렴풋이 들려오는 바람 소리는 비명을 닮아 있었다.

썩은 나무가 풍기는 이상한 악취에 코가 마비되는 듯했다. 은하보다 예민한 후각을 가진 시우였다면 시험이고 뭐고 아마 발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미세하게 미간을 좁힌 은하는 한 손으로 코를 막고 땅을 밟았다.

자박─

발밑의 흙은 마치 피를 머금은 듯한 색이었다. 이 또한 게이트의 영향이겠지만, 붉다 못해 검게 물든 흙만 보아도 이곳이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오, 저기 봐. 스켈레톤이다.”

누군가가 외치자 그곳 헌터들 모두가 한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달그락달그락…….

낡은 검을 든 해골 병사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걸어 다니는 해골이라니, 마치 공포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오싹한 외견과는 달리…….

“저 녀석, X나 약해 보이는데?”

성인 남자보다 조금 작은 몸집에 느린 움직임을 보아하니 그다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실제로 시스템창을 통해 엿본 녀석의 레벨은 고작 5였다. 즉, 레벨만 보자면 F급 헌터도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준.

놈이 허공에 부웅 검을 휘두르는 순간이었다.

와르르…….

스켈레톤은 아무 공격도 받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무너져 내렸다.

일정 구역을 벗어나면 무력화가 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맥이 빠질 지경이었다.

“뭐야, 블록도 아니고.”

“죽은 거야? 왜? 뭐 때문에?”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헌터들은 놈의 한심한 꼴에 하나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툭툭, 무너진 뼛조각을 발로 건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광대저씨였다.

은하는 곁에 선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굳은 얼굴이었다. E급 컨셉 헌터인 데다 전투 경험이 많이 없는 그가 긴장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

눈이 마주치는 순간, 광대저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 멋쩍게 웃었다.

“아가씨는 바로 출발하려고?”

“그래야죠.”

은하의 짧은 대답에 그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했다. 그러다가 다시 시선을 마주치고 결심한 듯 입술을 달싹였다.

“저기 아가씨, 혹시 파티─.”

하지만 한순간뿐이었다. 광대저씨는 움찔 몸을 굳히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네.”

힐끔. 스켈레톤을 살핀 눈이 다시금 은하에게 닿았다.

“서로 힘내자고.”

* * *

햇볕이 내리쬐는 창가.

둥글게 부풀어 올랐다가 줄어드는 커튼. 그 뒤에 가만히 서 있던 남자가 작게 신음했다.

“……아.”

포츈텔러. 코드네임 안드레아.

그가 감았던 눈을 떴다.

쏟아지는 햇살 아래, 원래는 에메랄드빛이었던 그의 눈이 홍채 끝부터 서서히 붉게 물들고 있었다.

현안 개방.

창을 바라보는 듯한 그의 시선은 사실 그 너머, 아득한 저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복계산.

망자의 군락.

검은 사념, 검은 불길, 그리고…….

“이름을 잃은 자…….”

안드레아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새장, 그 속 하얀 새가 불안한 듯 짹짹 소리 내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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