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08)화 (108/306)


#108. 이번에는 동료로서
2022.11.16.


“사실……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요.”

푸른 눈이 소리 없이 은하 쪽을 향했다.

“이번 남해안 게이트 작전에 선배도 참여하신다고요.”

“…….”

그 말을 듣는 순간, 은하의 머릿속에 불쑥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박 매니저.’

제휘가 시우에게 전달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최근 은하가 불멸에 두 번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시우라면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일을 유추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됐어.”

은하는 담백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시야에 무섭게 떠오르는 메시지창.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그 매니저,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쪼르르 달려가 일러바친 것이 괘씸하기 짝이 없다며 얼얼한 뒤통수를 매만집니다.]

[언니, 봤지? 역시 세상에 믿을 놈 없다는 말에 틀린 구석 하나도 없다며, 당신의 아군은 자신뿐이라 강조합니다.]

은하는 고양이의 분노를 알리듯 부르르 떨리는 노란 메시지창을 보며 생각했다.

‘글쎄. 애초에 숨길 필요가 없기도 하고.’

제휘가 시우에게 보고를 했다고 한들 그를 원망할 필요가 있을까? 제휘가 시우의 사람이란 걸 몰랐던 것도 아니고 말이다.
다만.

“말리려고 온 거야?”

은하가 시우를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네? 말리다니요?”

그러자 시우는 오히려 당혹스러운 눈빛을 했다. 반응을 보니 말리러 온 것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네가 계약 파기 이야기를 꺼냈을 때 어렴풋이 생각했어. 너도 내가 헌터 활동을 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눈이 돌아갈 정도의 목돈을 제시하며 계약을 제안했던 시우. 그런 그가 갑작스럽게 계약 파기를 선언했다.

물론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은하였지만, 처음에는 생각해 보겠다고 답을 보류했던 시우가 어느 기점을 경계로 역으로 계약 파기를 제안해 왔다.

은하는 거기에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생각해 보니 이쪽도 손해가 큰 것 같아서 말입니다. 입원비 지원도 이 이상은 힘듭니다. 이래 봬도 이 병원, 진료비나 입원비가 비싸서요.’

그러나 그런 이유였다면 은하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의 명의를 ‘이유라’로 돌리지 않았을 것이며, 거액이 든 계좌를 그녀에게 전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은하의 이야기를 듣던 시우는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너도?’

그게 무슨 말이지? 조금 굳은 얼굴로 시우가 입술을 달싹였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진실이야 어찌 됐든 현대에서 난 F급 컨셉 헌터로 낙인이 찍혀 있는 상태니까.”

은하가 세월을 껑충 뛰어 2031년 현대에 나오고도 벌써 몇 개월이 흘렀다.

이제는 알았다. 현대 사회에서 랭크가 낮은 헌터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컨셉 헌터가 어떤 대우를 받는지 말이다.

그러니 시우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문제는 시우라기보다는 이 부조리한 현대 헌터계일 테니까.

그런데.

“선배가 F급 컨셉 헌터라고 활동을 말리려는 자가 있었던 겁니까?”

시우의 눈매가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다.

반대로 은하의 눈빛에는 의문이 더해졌다.

‘……화난 건가?’

원래부터 살짝 올라간 눈꼬리에 차가운 눈빛까지 더해지니 푸른 눈동자가 유독 서늘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눈밖에 보이지 않으니 더욱 그랬다.

“그 자식이 누군지는 몰라도 저는 그런 생각 한 적 없습니다. 오늘도 단지 확인을 하러 온 것뿐입니다.”

“확인?”

“선배가 작전에 참여하게 된 것이 스스로 선택한 일인지. 그게 아니면…….”

무릎 위에 올려 둔 시우의 손 위로 희미하게 푸른 혈관이 툭 올라왔다.

“누군가에게 강요받은 일인지 말입니다.”

─이를테면 불멸이라든가 장미라든가.

은하 본인이 정한 일이라면 시우가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그럴 자격 따위 제게 없다는 것을 아니까.

하지만 만일 그게 아니라면.

제천대성 그리고 닥터 플랜트의 얼굴을 떠올린 시우가 마스크 너머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내가 어떤 각오로 선배와의 계약을 파기했는데.

한편 그런 시우를 빤히 바라보던 은하가 옅게 웃었다.

시우가 은하에 대해 알게 된 만큼 은하 역시 시우에 대해 알게 된 점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신시우는 표정 관리에 능숙하지 않았다.

‘역시.’

시우가 은하와의 계약을 파기한 까닭은 돈 때문도, 은하의 랭크 때문도 아니라고 지금 강하게 확신했다.

만일 그랬다면 저런 얼굴을 보이진 않았을 테니까.

“왜 웃습니까?”

으르렁거리던 시우가 조금은 퉁명스럽게 물어 왔다. 은하는 웃음을 거두지 않으며 답했다.

“그냥.”

그리고 시선을 들어 바람에 흔들리는 가로수를 응시하며 차분히 입술을 달싹였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 누군가의 강요도 협박도 아니었어. 이건 내 선택이야.”

“……선배는 계약이 끝나면 평범한 생활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닙니까?”

“그랬지.”

잠시 침묵한 은하는 여전히 가로수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그게 꼭 지금일 필요는 없으니까. 지금 내가 우선시해야 할 일이 뭔지, 이제는 알아.”

이름 모를 그 나무는 다가오는 겨울에 앙상한 가지를 반쯤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은하는 알았다. 내년 봄이면, 저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위에 또 다른 새싹이 움트리라는 것을.

끝이 아니었다.

소장님의 말씀대로 말이다.

그녀의 옆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시우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렇군요.”

스르륵.

꾹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이 풀렸다.

그런 거라면 시우가 할 말은 없었다. 그럴 권한 따위 누구에게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협회 지원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은하였다. 선배가 원하는 삶을 살길 바랐으니까.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진 지금, 어떻게 할지 생각해야 했다.

지원을 취소할지, 아니면…….

“……유명한 헌터들이 많이 모일 겁니다.”

힐끔.

푸른 눈이 소리 없이 은하에게 향했다. 시우는 조심스러운 어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것보다 선배는 우선 그들에게 힘을 입증해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정하려고 들지 않을 테니까요.”

협회를 포함하여 그곳에 모인 수많은 헌터들은 그녀를 그저 F급 컨셉 헌터로만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늘 그래 왔듯 이번에도 선배는 선배의 방식대로, 행동으로 보여 주시겠죠?”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일까, 시우는 잠시 숨이 멎는 듯했다.

그것은 마치 바람이었다. 열린 줄도 모르고 있던 창문 새로 불어와 뺨을 간질이는 그런 바람.

은하는 이곳을 쳐다보지 않은 채 흔들림 없이 이렇게 말했다.

“물론 그럴 생각이야.”

솨아아아─

다시금 불어온 바람에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

시우는 입을 닫았다.

붉은 노을은 어느새 저물어 있었고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빛이 대신 모습을 드러냈다. 아렴풋한 달빛 아래, 시우는 이끌리듯 은하의 시선을 좇았다. 곧 그의 푸른 눈에도 저 멀리 가로수 나무가 들어왔다.

저 여린 나무는 작은 바람도 버티지 못하여 바닥으로 낙엽을 우수수 떨어트렸다.

마치 어린 날의 자신처럼 초라하고 속절없이.

바닥에 수북이 쌓인 낙엽으로 시선을 떨구었던 시우가 다시 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깨닫는다.

그 정도 바람에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일은 없다는 것을. 마치 내 옆의 그녀처럼, 강직하고 초연하게.

그 순간 시우는 불현듯 또 깨달았다.

스스로도 눈치 못 챘지만 자신은 그녀를 좇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가 걷는 길,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다.

가능하다면 함께 걸어 보고 싶다. 그녀의 보폭에 맞춰서 걷다 보면 언젠가 같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흔들림 없는 까만 눈동자는 시우로 하여금 그 목적지가 어디든 결국 후회는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이 들게 했다.

‘……신기한 사람.’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그녀에게서 이토록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는.

“─선배.”

나지막이 그녀를 부르자 새까만 눈동자가 이곳을 향했다. 시우는 주머니를 뒤적여 무언가를 은하에게 건넸다.

“받으세요. 이제야 돌려드리게 되네요.”

시우의 손바닥 위의 작은 기계. 단말기였다. 이전에 은하가 고장이 난 것 같다며 시우에게 맡겼던 것이었다.

“여러 차례 확인한 결과 단말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습니다.”

“그럼 왜…….”

은하는 건네받은 단말기를 응시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고장 난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획득 경험치가 표시되지 않았던 걸까.

“단말기가 멀쩡하다는 것만 알아냈을 뿐,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수확을 얻지 못했습니다. 전례가 없는 일이다 보니.”

거기까지 말한 시우는 옷매무새를 다듬고 스르륵 벤치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이 이상 뜯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이번 작전에 단말기가 필요한 상황이 올지도 모르니 우선 돌려드리겠습니다.”

후드를 뒤집어쓴 그가 휙 고개를 돌려 은하를 바라보았다.

“다음에는 남해안 게이트에서 만나게 되겠네요.”

“……?”

단말기를 들여다보던 은하가 고개를 들어 시우를 바라보았다. 은하의 눈에 조그마한 의문의 빛이 깃들었다.

너도 오는 거냐고, 마치 그렇게 묻고 있는 듯했다.

은하가 아는 시우는 헌터 활동을 극도로 꺼리는 사람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 때문에 거금을 들여 가며 계약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대신할 허수아비를 세운 것이 아니었나.

갑자기 마음을 바꾸게 된 이유를 물어보려던 은하는 불쑥 제 앞에 내밀어진 커다란 손을 보고는 입을 닫았다.

“이제는 비즈니스 파트너가 아닌, 동료가 되겠군요.”

은하에게 손을 내민 시우가 눈을 휘며 웃었다.

은하는 휘어진 시우의 푸른 눈동자를 가만히 올려 보다가 다시 시선을 깔아 그의 손을 응시했다.

“……동료?”

“네. 동료.”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장미 꽃잎처럼 붉은 낙엽이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띠링.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동료? 도오옹료오오?! 하고 고개를 들이밉니다.]

번쩍 떠오르는 노란 메시지창에 은하가 재빨리 눈을 깜빡였다.

“…….”

그리고 입가에 떠오르는 조그만 미소.

은하는 천천히 손을 뻗어 시우의 손을 맞잡았다.

* * *

장미 길드 강원도 지부.

닥터 플랜트의 특별 공고를 전해 들은 수많은 헌터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지하 강당에는 얼핏 보아도 족히 백은 넘어 보이는 인원이 바글바글했다. 그들 모두가 남해안 게이트 작전에 지원한 이들이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을 쭈뼛쭈뼛 걷던 한 중년의 남성이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야. 저 사람, 광대저씨 아니야?”

누군가 수군대는 소리에 여러 사람의 시선이 중년 남성, 광대저씨에게 다닥다닥 들러붙었다.

“맞네. 와, 저런 평범한 옷차림은 처음 보는데? 못 알아볼 뻔.”

“다행이다. 비밀 작전이라길래 내심 겁먹었는데 별거 없나 봐. 컨셉 헌터 지원도 받는 걸 보니 말이야.”

“아저씨, 폭죽 쇼 한 번만 보여 주면 안 돼요?”

컨셉 헌터의 인식이 예전보다는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베테랑 헌터들 사이에서는 낙오자 취급을 받는 것이 현실. 그러나.

“미안하지만 오늘은 휴업이네.”

광대저씨가 여유롭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곳에서 기가 죽을 수는 없었다. 컨셉 헌터 활동 경력만 15년. 그 어떤 부조리에도 단련이 된 그였기에.

지이잉─

바지 앞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민지공주♥] [오전 8:50] 아빵!!

[민지공주♥] [오전 8:50] 잘 도착해써? 아침 안먹고 갔다구 엄마가 속상해하던데ㅠㅠ

“……녀석.”

액정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광대저씨는 답장을 보내는 대신 손가락을 들어 딸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터치했다.

사진 속 딸은 하얀 패딩을 입고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직 가을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새로 산 패딩을 꺼내서 셀카를 찍고 싶었을까.

그는 액정 위에 떠오른 딸의 얼굴을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평생 어린아이일 줄로만 알았던 금쪽같은 내 새끼가 내년이면 대학생이라니, 한편으로는 감격스러웠고 또 한편으로는…….

“…….”

액정 속 딸을 바라보는 광대저씨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고3 수험생 딸을 둔 부모로서 감당해야 하는 돈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나뿐인 딸에게 뭐든 아까울 리가 있을까. 장기라도 팔아서 뒷바라지를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아……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이번에는 출연이 조금 어렵겠는데요.’

‘죄송합니다. 다음 기회에…….’

‘저희 프로는 만 50세 이하의 출연진만 찾고 있어서요. 긍정적인 답변을 드리지 못해 안타깝군요.’

‘음, 제가 아는 분이 이번에 음식점을 크게 열었는데 오픈 행사 도우미를 찾고 있더라고요. 혹시 그건 어때요? 묘기 같은 거 가능하시죠? 입에서 막 불 뿜고 그런 거요.’

상위 0.1% 스타급의 컨셉 헌터는 웬만한 B+급 헌터가 챙기는 만큼, 혹은 그 이상의 돈을 번다지만 광대 분장을 한 중년 남성이 괜찮은 수입원을 찾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자네, 소식 들었나? 지금 닥터 플랜트가 화속성, 암속성 헌터를 찾고 있다던데. 마침 자네, 화속성 스킬을 가지고 있지 않나. 혹시 모르니 지원해 보는 게 어떤가?’

그에게 놓칠 수 없는 기회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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