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07)화
(107/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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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다시 찾아온 늑대
2022.11.15.
대한민국 경기도 어딘가.
작은 창문조차 없는 그곳은 햇빛이나 달빛 대신 주홍빛 작은 조명만이 드리우고 있었다.
비좁은 공간에는 옅은 나무 냄새가 가득했다. 저기 산더미처럼 쌓인 책 때문일지도, 아니면 이곳이 숲속 한가운데에 있는 까닭일지도 몰랐다.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 속. 어디선가 간간이 들려오는 바람 소리만이 이 꽉 막힌 공간 어딘가에도 분명 통로가 있음을 알렸다.
“……그래? 그럼 흑염의 프린세스의 참전은 확정이구나.”
휴대전화를 든 로제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서렸다. 스피커 너머로 유환의 웃음소리가 아렴풋이 새어 나왔다.
“게이트가 최대 다섯일 거라는 추측이 적중하든 그렇지 않든 그녀는 작지 않은 전력이 돼 줄 거야. 수고했어, 유환. 그리고 고마워.”
또 연락할게.
전화를 끊은 로제는 귀에 대고 있던 휴대전화를 스르륵 아래로 내렸다.
“…….”
로제가 입을 다물자 이 밀폐된 공간에 다시금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무로 된 바닥은 걸을 때마다 삐거덕삐거덕 소리를 냈다. 이윽고 그녀가 도달한 곳은 왼쪽 벽, 커다란 액자 앞이었다.
로제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액자를 응시했다.
오래되어 색이 바랬을지언정 액자 속의 모녀는 아직도 눈부시도록 행복해 보였다.
로제는 천천히 손을 뻗어 액자 속 환히 웃는 소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아무도 없는 방 안. 붉은 입술을 통해 다정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조금만 기다려, 내 딸.”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의 보물.
* * *
“아, 유라 씨. 가시게요?”
조용히 병실 문을 닫고 나온 은하는 마침 주변 의자에 앉아 있던 수현을 만났다.
“네. 민주는 잠들었어요.”
“아, 그랬군요……. 죄송해서 어쩌죠. 약 때문에 요즘 곧잘 곯아떨어지셔서.”
“괜찮아요. 이제 돌아갈 시간이기도 하고.”
그럼, 또 오겠습니다. 살짝 묵례한 은하가 수현을 지나치려는 순간,
“잠시만요, 유라 씨.”
수현이 은하를 붙들었다.
“저…… 남해안 게이트 일이요.”
“준환 씨한테 들었어요. 민주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수현은 할 말을 고르는 듯 눈알을 굴리더니 이내 결심한 듯 은하와 시선을 마주했다.
“협회에 말해서 우리 군단조로 들어오는 건 어때요? 전투 인원이 꽤 되니까 아마 팀별로 움직이게 될 텐데, 유라 씨는 길드도 없고 무소속이잖아요.”
최대한 그럴듯하게 말해 보았지만 사실 수현의 속내는 조금 달랐다.
이유라. 그녀는 표면적으로 F급 헌터, 그것도 전투복으로 드레스를 착용하는 꽤 요란한 컨셉 헌터였다.
수현을 포함한 군단 멤버 그리고 제천대성과 닥터 플랜트는 은하가 평범한 F급이 아니리라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그곳에 모일 대부분의 헌터들은 모를 일이었다.
워낙 중대한 작전이다 보니 일각에서는 비웃음이나 비난을 살 가능성이 높았다.
이곳은 그런 세상이었다. 랭크만으로 신분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랭크가 낮으면 소속 길드라도 유명하든가. 그러나 은하는 그것도 아니었다.
‘군단과 함께라면 괜찮을 거야.’
수현은 확신했다. 그들은 그녀를 지킬 수 있었다. 감히 군단에게 손가락질할 수 있는 녀석들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은하 옆에 군단이 붙어 있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대비책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은하는 제안에 대한 답 대신 감사를 전해 왔다.
수현이 어떤 마음으로 이런 제안을 했는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제안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게요. 하지만 전 그곳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러 가는 게 아니에요.”
누군가 저를 F급이라 생각해도 상관없었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러 가는 것일 뿐이니까요.”
은하는 스스로를 F급이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그 사실이야말로,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세상의 평가 속에서도 그녀를 끝내 단단하게 지탱하는 뿌리였다.
* * *
같은 시각, 은하의 오피스텔 입구.
“…….”
오피스텔 건물 벽에 비스듬하게 등을 기댄 시우는 주머니를 뒤적여 휴대전화를 꺼냈다. 오후 6시 50분, 곧 7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헌터님 말씀입니까? 음, 아마 오늘은 잠시 어디 외출하신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렇군.’
‘별일이 있지 않은 이상 보통 7시쯤에는 귀가하십니다.’
‘그건 안 물었어.’
‘넵.’
시우는 벽에 기댄 등을 떼어 내지 않은 채 앞쪽으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가끔 보행자와 눈이 마주칠 때면 더욱 깊이 모자를 눌러쓰면서 말이다.
조심해야 했다. 혹시 이곳에 온 걸 늑대에게 들키면 일이 귀찮아질 테니까.
그로부터 약 5분 뒤.
시우는 저 멀리 걸어오는 은하를 발견했다.
청바지에 작은 별 로고가 새겨진 흰 티셔츠. 예전에 시우와 쇼핑센터에서 구매한 그 옷이었다.
혼자 어딜 다녀온 걸까. 양손이 비어 있는 걸 보니 근처 편의점을 다녀온 것 같지는 않았다. 당연하게도, 그녀가 트릭스터의 병원에 다녀왔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삑, 삑, 삑…….
1층 현관에 도착한 은하가 비밀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비밀번호를 틀리셨습니다. 다시 확인해 주십시오.」
「비밀번호를 틀리셨습니다. 다시 확인해 주십시오.」
「비밀번호를 틀리셨습니다.」
「경비실을 호출합니다.」
「──♬」
“……아.”
비밀번호 패드를 누르던 은하의 손가락이 공중에서 우뚝 굳었다. 시우가 있는 위치에서는 은하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당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우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리 없이 웃었다.
이곳에 산 지도 이제 꽤 시간이 흘렀는데 아직도 비밀번호 하나 제대로 누르지 못하다니. 옛날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상당한 기계치가 틀림없었다.
“……1701호 사는 사람인데 문 좀 열어 주세요.”
경비실과 연결된 스피커를 통해 은하가 조금은 머쓱하게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주춤주춤 걸음을 내디뎠다.
“선배.”
띠리링.
현관문이 열리고 그곳으로 들어서려던 은하가 휙 고개를 돌렸다.
시우를 발견한 그녀의 눈이 일순 조금 커졌다.
아, 모자와 마스크 때문에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걸지도 몰랐다. 시우는 한발 늦게 마스크에 손을 가져갔다. 그런데.
“신시우?”
마스크를 벗으려던 시우가 우뚝 굳었다.
이렇게 얼굴을 꽁꽁 싸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은하는 그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저를 ‘선배’라고 부르는 존재가 시우밖에 없는 까닭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우는 그 사실이 어쩐지…….
“…….”
시우의 푸른 눈이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먼저 찾아온 주제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오랜만이네.”
말문이 막혀 버린 시우 대신 은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 은 아니었지만 시우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은하의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하니 새삼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일까. 원래 시우가 알던 은하의 눈빛은 이게 맞았는데…….
‘휴지야.’
휴지를 볼 때는 유난히도 잘 휘어지던 눈매가 자꾸 겹쳐졌다. 맘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를 그 탓으로 돌리며 시우는 괜히 손등을 들어 입 주변을 슥슥 비벼 댔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은하가 가볍게 물어 왔다.
“무슨 일인데?”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할 이야기?”
은하는 의문스러운 눈빛을 했다. 곧장 대답을 해 주진 않았다. 시우는 왠지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이놈은 계약을 파기하자고 할 때는 언제고 왜 이제 와서 다시 찾아오는 거냐며 몹시 어이가 없다는 듯 팔짱을 낍니다.]
[아니, 잠깐만…… 이 개 냄새 어디선가 또 맡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하고 수염을 씰룩입니다.]
사실 은하가 대답을 망설인 것은 부리나케 떠오른 고양이의 메시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 리가 없는 시우는, 은하가 자신과 이야길 나누기를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것처럼 행동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은하가 지금 여기서 이제 와서 할 이야기는 없다며 등을 돌려도 할 말이 없었다.
그를 대비하여 꽤 그럴싸한 변명거리를 생각해 온 시우였다.
1. (자연스럽게) 그냥 지나치다가 생각나서 들렸다.
2. (단도직입적으로) 남해안 게이트에 대한 일을 들었다.
3. (갑작스럽게) 날도 선선한데 산책이나 할까요?
“…….”
시우의 얼굴에 희미한 균열이 일었다. 막상 그녀의 얼굴을 보니 맘처럼 입이 움직여 주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생각해 왔던 여러 가지 변명은 하등 쓸모가 없을 정도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정말, 바보 같았다.
그냥 물어보고 싶은 것을 물어보면 되는 일이었다. 이번 작전에 참여하게 된 것이 선배의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강요받은 까닭이었는지 말이다.
그런 간단한 일마저도 이토록 힘들 줄이야.
하긴. 생각해 보면 계약이 파기된 마당에 그런 걸 왜 물어보냐며 은하가 정색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어쩐지 이곳에 자신이 서 있는 상황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온 것일까.
시우는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선배. 그냥 돌아가겠습─.”
그렇게 등을 돌려 버리려는데,
“들어오든가.”
은하가 오피스텔 1층 현관문을 향해 턱짓했다.
들어오라고? 어디로? 집으로? 도리어 놀란 시우가 뻣뻣하게 굳었다.
“아, 아뇨…….”
답지 않게 말을 더듬은 시우가 황급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그 모습은 굉장히 어리숙해 보일지도 몰랐지만 지금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시우는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를 유지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집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고. 그냥 잠시 근처를 걷는 정도로 충분합니다.”
“그래?”
빤히 이곳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질수록 시우는 더더욱 그녀 쪽을 바라볼 수 없었다.
노을이 진 하늘 아래 근처 가로등 불빛이 깜빡깜빡 켜지는 것을 의미 없이 응시하던 중, 그녀에게서 담백한 대답이 돌아왔다.
“알았어.”
생각보다 너무나도 쉽게 대화 시간이 마련되었다.
그래서일까, 잠시 뒤 시우는 은하와 나란히 벤치에 앉은 지금 이 상황이 어쩐지 신기하게 느껴졌다.
‘……심한 말을 했는데.’
늑대에서 그녀를 빼내겠다는 명목이 있었다곤 하나, 어찌 됐든 시우는 계약 파기 당시 은하에게 날이 선 말을 뱉었다.
그러나 은하는 계약 파기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얼굴로 그를 대했다. 초연한 저 옆얼굴에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죄여 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쉽게 말문을 열지 못하는 까닭은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할 말이 뭔데?”
결국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번에도 은하 쪽이었다.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던 시우가 결심한 듯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