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06)화
(106/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06)화
(106/306)
#106. 완성된 피규어
2022.11.14.
실버문 매니지먼트.
“……선배가 또 불멸 본부에 갔다고?”
책상에 걸터앉아 보고서를 훑어보던 시우가 스윽 시선을 들었다.
“왜지?”
“음, 이유는 따로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만 아무래도…….”
제휘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시우는 다시금 서류로 시선을 내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제천대성이 바람을 넣은 모양이군.”
어떤 식으로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선배는 남해안 게이트 작전에 참여하기를 결심한 것이 분명했다.
“……학원은 그만뒀다고 했던가.”
“예. 제가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이미 관두신 후였습니다.”
시우는 보고서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지만 사실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시우의…… 아니, 휴지의 털을 빗기며 미소 짓던 은하의 모습이 뇌리에 선연히 떠올랐다.
‘그렇게나 좋아했으면서 왜.’
손가락 끝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자 손에 쥐고 있던 보고서가 살짝 구겨졌다.
“나, 나름대로 설득을 하긴 했는데…….”
시우의 눈치를 살핀 제휘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의외로 고집이 세신 분이라 제휘의 설득만으로는 뜻을 꺾기가 역부족이었던 것.
“됐어. 선배의 맘대로 하게 내버려 둬.”
그런데 시우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제휘가 예상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 하, 하지만.”
주춤대던 제휘는 결국 입을 닫았다. 또 건방진 소리를 한다며 시우가 정색할 것이 뻔했기에.
제휘는 이전부터 확신하고 있었다. 대표님은 이 헌터님이 평범한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는 것을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손해를 보면서까지 계약을 중도 파기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이렇듯 제휘를 불러내서 꼬치꼬치 근황을 캐묻지도 않았을 거고, 그를 통해 애견 잡지나 관련 서적들을 전하는 번거로운 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은하가 남해안 게이트 작전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시우가 전해 듣게 되면, 어떻게든 막지 않고 뭐 했냐며 제게 불호령을 내릴 거라 생각했다. 그에 관해 나름대로 각오를 하고 온 제휘였다.
그러나 시우는 그러지 않았다. 속내야 어찌 됐든 겉으로는 말이다.
“그건 됐고, 뭐 다른 이야기는 없었나?”
귓가에 닿은 목소리에 제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른 이야기요?”
……아. 눈을 깜빡인 제휘는 요지를 재빨리 파악했다. 시우는 지금 은하의 근황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었다. 늘 그렇듯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자주 연락하는 친구가 생기셨더군요. 얼마 전에는 영화도 보고 오셨다고…….”
“영화?”
내내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보고서에서 시우가 시선을 들었다. 기분 탓일까.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혹시 그 친구라는 놈 이름이 윤호인가?”
높낮이가 거의 없는 건조한 목소리. 그러나 제휘는 보았다. 시우의 모발 끝이 미세하게 하얗게 물들고 있었다.
제휘는 펄쩍 뛰며 손을 휘저었다.
“아뇨, 아뇨, 아뇨. 그런 이름은 아니었고…… 음, 뭐였더라. 아현……? 어쨌든 여자 이름이었습니다.”
“그렇군.”
슈우욱…….
하얗게 물들던 시우의 모발이 다시금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시우는 평온한 얼굴로 다시 보고서를 향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제야 제휘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다른 건.”
다음 장으로 보고서를 넘긴 시우가 툭 던지듯 입을 열었다.
“다른 것…… 이요? 어, 음…….”
제휘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필사적으로 은하의 근황을 떠올려 보았다. 그 와중에, 견디지 못한 시우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뭐, 외로워한다거나 그렇지는 않아?”
“네?”
외로워한다니. 누가. 헌터님이?
시우는 아리송한 얼굴의 제휘를 힐끔 쳐다보더니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휴지.”
팔락.
보고서를 또 한 장 넘기고는 태연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휴지를…… 크흠, 보고 싶어 한다거나.”
“아아.”
제휘의 입술이 멋대로 씰룩이기 시작했다. 그러면 안 되지만 흐뭇한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시우가 보고서에 못 박힌 듯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제휘는 성대에 힘을 주고 웃음기를 싹 숨긴 다음 입을 열었다.
“가끔 사진을 보내 달라고 하실 때마다 미리 저장해 둔 사진을 보내고 있습니다. 비축분이 다 떨어지면 그때 다시 촬영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표님.”
“……너, 요즘 자주 그렇게 웃는군.”
윽. 제휘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도대체 시야가 얼마나 넓은 것인지, 시우는 보고서를 읽고 있으면서도 씰룩대는 제휘의 입꼬리를 포착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흰자로도 물체를 볼 수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 그렇게 웃는다니요.”
“조카 재롱을 보는 삼촌 같은 얼굴로 말이야.”
“그럴 리가요!”
절대, 절대 아닙니다, 대표님! 제휘가 펄쩍 뛰었다. 그러나 이미 사무실 내부에는 찬바람이 쌩쌩 불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오늘도 역시 마무리는 제휘의 사죄였다. 다행히 시우는 제휘를 다그치지 않았다. 다만 건조한 목소리로 이렇게 물을 뿐이었다.
“오늘은 뭐 해.”
“저요?”
“아니.”
시우가 미간을 움찔 좁혔다.
“선배 말이야.”
* * *
약 한 시간 전, 은하는 준환에게서 급한 연락을 받았다. 드디어 민주가 깨어났다는 희소식이었다.
준환의 말에 따르면 아직까지는 후유증이라든가 치료의 부작용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장미 길드에서도 정식으로 완쾌 진단을 내렸다고.
“하지만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 많다고 준환은 설명했다.
픽시 파우더 사용 이후 말끔히 사라진 검은 반점과는 달리 목덜미에 이상한 흉터가 남아 있는 점. 그리고 그날 있었던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꼽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저주인 만큼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군단은 자신들의 주인인 트릭스터에게 이번 남해안 게이트 일을 함구하기로 한 듯했다. 협회에도 트릭스터를 투입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지원을 약속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유라 씨, 아무쪼록 그 사안에 대해서는 마스터께 비밀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병실 문을 열기 직전에도 준환은 재차 은하에게 부탁했다.
그들이 얼마나 민주를 아끼고 따르는지 이제는 알았다.
언노운 게이트에서 봉변을 당한 것이 최근 일이니 또다시 그를 전장으로 밀어 넣고 싶지 않은 것일 테다.
그들에게 있어서 트릭스터는, 민주는 S급 헌터이기 전에 ‘패밀리’였으니까.
그것은 은하에게도 그러했다.
은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은하의 확답을 받은 후에야 준환은 안심하고 미소를 지었다.
달칵─
문이 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무언가 폴짝 뛰어올랐다.
“누나아!”
민주였다. 아직 환자복을 벗지 않은 모습이었다.
“마스터, 그렇게 뛰면 안 돼요! 링거 바늘 또 떨어진다고요.”
수현이 다급히 따라와 민주에게 잔소리를 해 댔다. 그러나 민주에게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민주는 도토리같이 동그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은하를 올려다보았다.
“누나, 피규어 만들러 온 거죠? 미리 준비해 놨어요.”
짜잔! 민주가 병실 침대를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침대 위에는 커다란 피규어 박스가 놓여 있었다.
“이제 다들 나가 봐. 난 누나랑 놀 거니까.”
민주는 수현과 준환을 향해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그들은 조금 서운한 듯 입을 쭉 내밀었지만 군말 없이 병실을 나섰다.
“그럼…….”
문을 닫기 직전 준환이 은하를 향해 살짝 눈짓을 보냈다. 아까의 약속을 잊지 말아 달라는 신호.
은하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빙긋 웃고 문을 닫았다.
“누나, 빨리 와요!”
민주는 문이 닫히자마자 뭐가 그리도 급한지 소매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천진하고 장난스러운 모습. 은하가 아는 민주였다.
민주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기던 와중, 문득 은하의 시야에 민주의 가느다란 목이 들어왔다. 정확히는 오른쪽 목덜미.
멀리서 보면 빨간 점처럼도 보였다. 만일 준환에게서 미리 흉터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 이거.”
은하의 시선을 느낀 민주가 자신의 목덜미를 슥슥 문질렀다.
“자는 동안 벌레에 물렸나 봐요. 간지럽진 않은데 긁으면 조금 부어요.”
“……그래? 아프진 않고?”
“전혀요!”
민주는 배시시 웃으며 침대에 철퍼덕 앉았다. 또래에 비해 조그마한 손이 야무지게 피규어 상자 포장지를 뜯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준환의 말대로, 민주는 그날의 기억을 반절쯤 잃은 모양이었다. 언노운 게이트에 들어간 것까지는 기억하지만 중간부터의 기억이 끊어져 있다고.
‘결국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은하는 준환이 했던 말을 다시금 곱씹어 보았다.
작은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지만 어쨌건 민주는 한국에 여섯 명뿐인 S급 헌터 중 하나였다. 그런 민주가 죽을 꼴을 하고 돌아왔다는 것은 분명─.
‘뭔가 있었던 거야.’
은하는 민주의 목덜미 부근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저 흉터. 오직 저것만이 유일한 힌트였다.
“왜 그렇게 봐요? 나 진짜 괜찮은데.”
줄곧 은하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던 듯, 민주는 포장을 뜯는 작은 손을 멈추지 않으며 밝은 투로 입을 열었다.
“형들한테 들었어요. 내가 자는 동안 많이 아팠다고.”
민주는 입 주변에 손을 가져가 소라고둥처럼 동그랗게 말고, 조그만 목소리로 속닥였다.
“누나가 픽시 파우더를 구해 왔다면서요?”
“…….”
준환이 그 얘기도 전한 모양이었다.
퇴원하면 더 비싼 걸로 갚을게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가슴을 통통 친 민주는 피규어 상자를 열었다.
바삐 움직이는 손, 그리고 그와 연결된 얇은 손목에는 이전에 은하가 선물한 귤색 소원 팔찌를 꼭 매달고 있었다.
한 번 끊어졌던 그것을 기어코 다시 매 달라며 수현에게 졸랐던 것이다. 급한 대로 대충 매듭지은 탓에, 소원 팔찌는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손목을 꽉 조였다.
“오오, 이 광채……!”
눈을 빛내며 피규어 파츠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민주.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알았다.
이 천진하게 웃고 있는 소년은 6만 대군의 주인이었다. 자신의 패밀리를 위해 저 몸을 기꺼이 던지는, 작지만 강한 리더.
툭.
은하는 서서히 손을 들어 민주의 머리 위에 가볍게 올렸다.
“……?”
피규어에 넋이 나가 있던 민주가 도르륵 시선을 굴렸다.
쓰담쓰담.
곱슬곱슬한 귤색 머리카락이 은하의 손길대로 흐트러졌다. 마치 포근한 양털을 만지는 듯한 감촉이었다.
“민주야, 피규어 만들까?”
민주는 갑작스러운 스킨십이 의아한 듯 동그란 눈을 깜빡였지만 은하의 손을 쳐 내지 않았다. 오히려─.
“네!”
눈을 가느스름하게 휘며 웃었다.
깨달았을 때에는 은하 역시 민주에게 이끌린 듯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지키지 못할 줄 알았던 약속.
은하와 민주는 햇살이 내리쬐는 병실 안에 마주 앉아 둘이서 함께 멋진 함선을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