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05)화
(105/306)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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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군단의 눈물
2022.11.13.
“언니…… 나 서운행.”
영화를 보러 가는 길. 영화관 근처 공원을 걷던 중 아연은 시무룩한 얼굴로 그리 말했다.
반걸음쯤 앞서 걸어가던 은하가 휙 뒤돌아보았다. 걸음을 멈춘 아연이 팔자 눈썹을 하고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털 복숭…… 아니, 제천대성 아재랑 친하다는 소리 나한테 한마디도 안 했잖아요.”
“친하다니.”
“다 들었어요. 그 털…… 아니아니, 제천대성이 언니한테 아우라고 하는 거요.”
은하가 불멸 본부에서 나온 순간, 아연은 보았다. 본부 입구까지 따라 나와 양손을 흔들며 은하를 배웅하던 털보의 모습을.
‘그럼 잘 가게, 아우여─!’
또 보자고! 털보는 호탕하게 웃으며 은하가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 곁에서 도복 차림의 우락부락한 길드원들이 “안녕히 가십쇼, 형님!” 하고 90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했다. 느와르 영화에서나 보던 풍경이었다.
제천대성이 흑염의 프린세스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길드원들의 태도 역시 달라진 것이었다.
어쨌든 그 점에서 아연은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꼈다. 뭐랄까, 이건 마치 매일 나랑만 점심을 먹던 단짝 친구가 말도 없이 다른 애랑 급식실로 가 버린 기분이었다.
“다 필요 없으니까 언니, 그런 냄새나는 곳 가지 마요.”
“냄새?”
“지독하잖아요. 그냥 입구에만 서도 땀 냄새랑 술 냄새가 진동하던데.”
어휴, 진짜. 아연은 질색한 얼굴로 손부채질을 했다. 그런 그녀의 말에 격하게 공감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이야, 간만에 말 통하는 인간을 다 본다며 고개를 연신 끄덕입니다.]
[저기에 갈 때마다 코를 찌르는 구린내를 참을 수가 없다며, 당신의 불멸 길드 재방문을 반대합니다.]
고양이는 거의 대부분의 은하 주변인을 싫어했다.
그런 고양이가 신기하게도 아연에게는 조금 유한 편이었다. 어쩌면 둘이 죽이 잘 맞는 것일지도 몰랐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고양이의 응원을 등에 업은 아연은 속에 품고 있던 불만을 폭포수처럼 토해 내기 시작했다.
“중요한 일이라고 하더니 난 또 뭐라고. 남해안에 게이트가 터진다고 해도 뭐 어쩌라고? 아니, 그거 한다고 돈은 준대요? 절대 안 주지. 내가 협회를 잘 아는데 등골까지 쏙 빼먹고 애국심이니 뭐니 핑계 대면서 훈장이나 하나 던져 주고 끝일걸요?”
헌터는 자원 봉사자가 아니다. 아연은 영웅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니고 명예를 가지고 싶지도 않았다.
혹자는 이기적이고 비도덕적이라 욕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호구가 될 생각 따위 없으니까.
게다가…….
“GIA인지 CIA인지 뒤에 숨어서 영웅 놀이나 하는 녀석들 말은, 애초에 난 믿을 생각도 없고요.”
아연이 인도 위의 돌멩이를 퍽 걷어찼다. 공원의 자그마한 연못에 퐁! 하고 떨어진 돌에 의해 수면에 둥그런 물결이 일었다.
그리고…….
“…….”
“…….”
이상한 침묵이 감돌았다.
‘헛.’
수면 위 굽이치는 물둘레를 응시하던 아연이 돌연 아차 하는 얼굴로 시선을 들었다.
은하가 빤히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새까만 동공은 마치 이렇게 묻고 있는 듯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현재 협회는 괜한 불안의 씨앗이 피어나지 않도록, 남해안 게이트 작전에 대해 대중에게 알리지 않은 상황이었다.
대중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헌터 중에서도 4대 길드를 포함한, 엄선된 일부에게만 알려진 사안. 일반 헌터들은 이 사실에 대해 모르고 있고, 아는 자들도 쉬쉬하고 있는 상황인데…….
“어…… 음…… 사실 나한테도 연락이 왔거든요.”
“……너한테?”
“아하하. 내가 말 안 했던가? 나 사실 암속성 헌터거든요.”
머쓱하게 웃은 아연은 주변을 힐끔 돌아보았다.
“언니도 들었죠? 협회가 화속성, 암속성 헌터를 혈안 돼서 찾고 있다는 거.”
아연이 속삭였다. 그리고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꼼꼼히 확인한 후에야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스스스…….
인도 위에 드리웠던 아연의 그림자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가로등만큼 길어진 아연의 그림자가 붕붕 손을 흔들더니 돌연 연못 속으로 쑤욱 빠져 버렸다. 정작 그림자의 주인인 아연은 이곳에서 가만히 서 있는 상태였다.
실루엣 트랩(Silhouette trap). 아연의 고유 스킬 중 하나였다.
“그림자 관련 스킬을 조금 가지고 있는데, 이게 암속성이거든.”
빛 한 줄기 없는 깜깜한 공간에서나 비가 올 때는 사용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아연의 전투 스타일과 최적화된, 그야말로 ‘완소 스킬’이었다.
은하는 시선을 내리깔아 연못 속을 헤엄치는 아연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마치 의지를 가진 듯 자유로이 움직이는 그것을 지켜보며, 은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너도 작전에 참여하는 거야?”
“그럴 리가요.”
아연이 허공에 스윽 손짓하자 연못 속에서 헤엄치던 그림자가 쏙 돌아와 그녀의 발에 다시 달라붙었다.
“협회에서 생명 수당에 위험 수당까지 짭짤하게 챙겨 준다고 해도 갈까 말까인데. 난 원래 밑지는 거래는 시작도 안 해.”
거기까지 말한 아연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은하를 바라보았다.
“언니, 설마해서 묻는 건데 거기 참여할 생각이에요?”
“…….”
은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진짜로? 아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내 말 허투루 들은 거 아니죠? 거길 왜 가? 혹시 그 털보가 꼬셨어요?”
맞네, 맞아! 아연은 콧김을 뿜으며 허리춤에 손을 짚었다.
아연이 보기에 은하는 은근히 세상 물정을 모르는 구석이 있었다. 제천대성이 우리 순진한 언니에게 바람을 넣은 것이 분명했다.
“관두지 그래요. 다른 게이트보다 공략도 성가실 게 분명한 데다 보수도 짤 텐데.”
비록 은하에게 대놓고 말은 할 수 없지만 걱정되는 점도 있었다.
랭크로 서열을 매기는 건 헌터 간의 불문율이나 다름없었다. 진짜 실력이 어찌 됐든, 그들은 드레스 차림의 F급 헌터를 비웃을 것이 뻔했다.
우리 언니가 그런 취급을 받게 내버려 둘 순 없지. 아연은 필사적으로 은하를 막을 생각이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적당한 B급 게이트 낙찰해서 영웅 등급 아이템 하나라도 더 챙기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라니까.”
그런데 아연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은하가 짧게 입을 열었다.
“갈 거야.”
은하는 눈빛 하나 바꾸지 않고 이렇게 덧붙였다.
“헌터잖아.”
“아니, 그게 왜…….”
아연은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은하를 향해 입술을 뻐끔거렸다.
헌터이기 때문에 협회의 호출에 응해야 한다? 그건 옛날이나 그랬지. 이 언니는 아직 헌터가 된 지 얼마 안 된 걸까. 그런 거라면 단단히 일러 줄 필요가 있었다.
“언니, 요즘 시대에 헌터는 전문직이에요. 의사가 돈이 없는 환자를 치료해 주는 일이 없는 것처럼, 헌터 역시 돈이 되지 않는 일에 굳이 목숨을 걸 필요가 없다고요.”
헌터는 직업이다. 즉 돈을 벌어 먹고사는 것이 목적이지, 운 좋게 얻은 능력을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세상이 알아줄 것 같은가? 아니, 절대.
당연하게 생각하면 했지, 오히려 여론 몰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인 수준일 것이다. 심지어 F급이 작전에 공헌한다면 더더욱 말이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왜 굳이 하려는 거예요? 자원봉사자가 되고 싶은 건 아닐 거고.”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묻자 은하가 초연하게 입을 열었다.
“세상에는 돈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어.”
아렴풋한 옛 기억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듯 새까만 눈동자 깊은 곳이 가라앉아 있었다.
“게이트가 열리면 몬스터가 쏟아질 거야. 그리고─.”
은하는 자신의 두 손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이내 꾹 주먹을 쥐었다.
“난 그 몬스터 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수 있어.”
짧은 순간, 아연은 그녀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새까만 눈동자에 스쳐 지나간 것은 분노? 혐오? 아니, 어쩌면 고대(苦待).
“이전에는 그러지 못했지만 지금의 나라면 뭐라도 지킬 수 있을 테니까.”
불어오는 바람에 새까만 머리카락이 나부낀다. 다시 드러난 은하의 눈매가 희미하게 휘었다.
“그게 이유야.”
“…….”
아연은 멍하니 벌어져 있던 입술을 스르륵 닫았다. 더 이상 그녀를 설득시킬 필요는 없었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아연이 이끌리듯 공원 연못을 향해 시선을 움직였다.
수면에 비친 그들의 모습. 바람에 잔잔히 물결치는 표면 위로 자신의 얼굴이 구불구불 일렁이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었다.
그 옆에 비친 은하의 모습은, 어째선지 하나도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 * *
“마스터께서는?”
병원을 찾은 수현은 준환을 보자마자 거두절미 민주의 상태를 물었다.
며칠 전, 민주가 잠깐이나마 눈을 떴다. 그러나 그 연락을 받고 모두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민주는 다시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픽시 파우더로 저주를 해제하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아직 저주의 잔재가 체내, 정확히는 혈관과 혈액 중에 남아 있다는 것.
여기서부터는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닥터 플랜트는 말했다.
준환은 수현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병실 침대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민주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직 눈을 뜨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나 불행 중 다행히도 작은 몸을 뒤덮었던 검은 반점은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어젯밤 수액을 갈러 들어왔던 간호사의 말에 따르면 이제 잠꼬대도 하신다나 봐. 알지? 마스터 잠꼬대 엄청 많이 하는 거.”
수현은 준환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힘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너라고 걱정되지 않을까. 분명 그는 수현보다도, 패밀리의 누구보다도 민주의 완쾌를 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앞에서 더 이상 우울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준환은 병상에 누운 민주를 대신하여 협회에 출석하는 등 크고 작은 업무를 홀로 소화해 내고 있었으니까.
얌전히 준환 곁에 앉은 수현은 한층 차분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그 고약한 잠버릇이야 당연히 알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마스터를 재웠는데 그걸 모를까.”
중학생 정도의 남자아이니 혼자서 못 잘 나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민주는 유독 밀폐되고 어두운 곳을 꺼렸던 것.
물론 불을 켜고 자면 될 일이었지만, 막상 그렇게 되면 무기를 제조하거나 피규어를 만든다고 꼬박 날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런 마스터가 최근에는 불을 끄고도 곤히 잘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이전보다 의젓해진 까닭일지도, 어쩌면 민주에게 어떤 긍정적인 계기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수현은 병실 침대 위 민주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협회에서는 별말 없고?”
“뭐 똑같지. 마스터는 좀 어떠냐고 묻고.”
협회는 확답을 받고 싶은 걸 테다. 남해안 게이트 작전에 대한 군단의 참여 여부를 말이다.
“그쪽도 꽤 초조한가 봐. 우선 마스터를 제외한 우리 6명은 작전 참여 의사를 확실히 밝히기는 했는데─.”
준환은 머리를 긁적이며 덧붙였다.
“뭐, 성에 차지 않는 거겠지. 그들이 정말 필요한 건 B급도 A급도 아닌 S급 트릭스터일 테니까. 더군다나 우리 마스터께서는 화속성 헌터잖아. 간절할 수밖에.”
이런 중대 사항은 내가 대리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보류하고는 있지만. 준환이 덧붙였다.
한편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현이 스르륵 고개를 들었다.
“……난 역시 반대야.”
단호한 목소리. 준환이 수현을 향해 눈을 돌렸다. 수현은 병실 침대 위에 누운 민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포항 언노운 게이트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아무리 픽시 파우더로 저주를 해제했다고는 해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저주인 만큼 당분간은 지켜봐야 해.”
픽시 파우더는 저주를 해제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지만, 말 그대로 해제를 할 뿐 저주 자체를 분석하는 용도는 아니었다.
따라서 닥터 플랜트와 군단 패밀리들은 아직까지도 민주의 저주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수현의 시선이 정확히 민주의 목덜미로 향했다. 가느다란 민주의 목에 빨갛게 부어오른 자국이 선명했다. 벌에 쏘인 것 같기도, 뱀에 물린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준환의 말에 따르면, 언노운 게이트 토벌 당시 민주가 몬스터에게 쏘이거나 물린 일은 없다고 했다. 어쩌면 저 특이한 흉터가 저주의 힌트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마스터에게는 휴식이 필요해. 당장 내일 눈을 뜬다고 해도, 병상에서 일어나자마자 전투에 참여하다니 중학생 남자아이에게도 환자에게도 가혹한 일이야. 협회가 아니라 닥터 플랜트의 부탁이라고 해도 이번에는 난 결사반대라고.”
석경호도, 다른 패밀리들도 나와 같은 의견이야. 수현은 민주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준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넌 어떻게 생각해, 배준환?”
“나는─.”
준환이 입술을 벙긋거리는 순간이었다.
“우, 으…… 시끄러어…….”
병실 침대 쪽에서 투정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같은 방향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마스터……?!”
“마, 마스터!”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소리쳤다.
마치 단잠에서 깨어난 듯 눈을 비비던 민주가 그들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이쪽을 바라보았다. 까치집을 지은 머리가 더듬이처럼 뿅 솟아났다.
“아, 깜짝이야. 뭐야? 둘이 거기서 뭐 해?”
민주는 머리가 지이잉 울리는 듯한 감각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준환은 붕어처럼 입술을 뻐끔거렸다. 놀라움, 기쁨, 안도, 그리움, 온갖 감정이 울컥 차올라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마, 마스터…… 모, 몸은…….”
“몸?”
침대로부터 스프링처럼 튀어 오른 민주가 맨발로 바닥에 서서 양어깨를 빙빙 돌렸다.
“으으으음, 무거운 것 같기도 하고 괜찮은 것 같기도─.”
와락!
민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대한 몸집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준환은 민주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키로 작은 주인을 힘껏 껴안았다.
“저는, 저는 정말 마스…… 끄흡, 마스터가 죽어 버리는 줄 알고오오…….”
“악! 징그럽게 왜 이래?!”
“정말 다행입…… 흑, 정말…… 정말로…….”
다 큰 성인이 엉엉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광경에 당혹감이 물밀 듯 닥쳤다.
“으허어어어, 마스터어어…….”
정수리에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뜨끈한 액체가 닿았다. 민주는 펄쩍 뛰어오르며 꽥 소리를 질렀다.
“수현 누나! 준환이 형 왜 이러는 거야? 아, 쫌! 떨어지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