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04)화 (104/306)


#104. 제천대성의 제안
2022.11.12.


뿅뿅뿅…….

은하가 불멸 길드 본부에 있는 동안, 아연은 근처 나무 그늘 아래 쭈그리고 앉아 모바일 게임을 하고 있었다.

“아.”

짧은 신음과 함께 액정 속 캐릭터가 죽어 버렸다. 게임 오버. 액정 가득 떠오른 새빨간 문자를 빤히 응시하던 아연은 그곳에서 시선을 거두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급한 일이라서. 영화는 다음에 보자.’

언니가 말한 급한 일이라는 게 이곳에 오는 일이었다니.

아연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본부 입구가 보였다. 근처에는 불멸 길드원으로 보이는 자들이 우르르 모여 있었다.

도복 차림의 그들은 목에 건 수건으로 얼굴이나 목을 닦고 있었는데, 여기까지 땀 냄새가 풍기는 기분이었다. 아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어라?”

도복 무리 중 한 명이 아연을 발견하고는 저벅저벅 걸어왔다. 근처 수련장에서 이제 막 돌아온, 불멸의 2인자 허재민이었다.

누가 불멸 길드원 아니랄까 봐, 우람한 그의 덩치가 아연의 시야 전체를 어둡게 가려 버렸다.

“여긴 웬일이야? 땀 냄새가 진동하는 곳에는 발도 들이기 싫다더니.”

반가운 얼굴로 다가온 재민과는 달리, 아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

아연은 별다른 대꾸 없이 팽 고개를 돌려 버렸다. 완전 무시였다.

두 사람은 같은 보육원에서 자란 사이였지만 자그마치 11살 터울이었다.

재민이 성인이 되어 보육원을 나갔을 당시 아연은 고작 9살 꼬마였다. 하지만 9살이란, 아주 기억 못 할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아연은 그 당시의 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설마 나 보고 싶어서 왔냐?”

재민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웃었다. 아연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빽 소리를 질렀다.

“미쳤어?! 내가 왜?”

“아오, 깜짝이야. 녀석, 목청은 여전하네.”

재민은 능청스레 웃으며 두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아연은 그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못 본 사이 왼쪽 뺨에 흉터가 생겼다. “그거…….” 하고 입을 달싹이던 아연은 이내 도로 침묵했다. 그리 물어보는 것 자체가 아연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재민은 보육원의 그 누구보다 키가 크고 힘도 셌던 오빠였다. 바퀴벌레가 나오면 선뜻 맨손으로 잡아서 저 멀리 치워 주는 용감한 사람이기도 했다.

9살 꼬마였던 아연은 그런 재민을 아주 좋아했다. 언젠가 어른이 되면 재민 오빠와 결혼하는 것이 장래 희망이었던 시절.

‘흑역사야.’

무엇보다 짜증 나는 건, 아직도 아연이 저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듯한 재민의 태도였다.

붕붕 고개를 가로젓는 아연을 보던 재민이 본부 입구를 휙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고 있지 말고 들어오지 그래.”

“됐거든.”

“센 척은. 거기 있으면 벌레 나와. 네가 싫어하는 벌레 말이야.”

“아, 괜찮다니까. 그냥 가라고요, 아저씨.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거니까.”

“기다려?”

재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불멸에 나 말고도 아는 사람이 있었던가?”

“뭐래. 불멸 사람 아니거든.”

퉁명스레 중얼거린 아연이 돌연 홱 시선을 들었다. 아니, 잠깐만. 어쩌면 재민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혹시, 우리 언니가 왜 여기 온 건지 알고 있어?”

“우리 언니?”

“흑염의 프린세스. 유라 언니 말이야.”

아연의 입에서 ‘흑염의 프린세스’라는 이명이 나오자 재민의 표정이 달라졌다.

“……너 그자랑 아는 사이였어?”

“아는 사이 정도가 아니지. 아주아주 특별한 사이거든?”

어째선지 팔짱을 끼고 거들먹거리기 시작하는 아연. 그 앞에서 재민은 생각에 잠겼다.

헌터 동료를 만들긴커녕 길드 가입조차 하지 않고 외로운 한 마리의 늑대 신세를 자처하던 녀석에게 갑자기 친구라도 생긴 건가?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검은 여자?

“언제부터?”

“아니, 묻는 말에나 대답해, 이 아재야. 우리 언니가 왜 이런 냄새 나는 곳까지 온 거냐고.”

“…….”

재민이 물끄러미 아연을 바라보았다.

흐응. 가늘어진 눈매가 짓궂게 휘었다.

“협회 호출에 나 몰라라 콧방귀만 뀌더니 소식 못 들었나 보네.”

“협회 호출?”

아연이 딱 움직임을 멈추고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윽고 도달한 결론은 이것이었다.

“……설마 남해안인가 동해안인가 뭐, 그 게이트 일로 언니가 여기 온 거란 소리야?”

“글쎄다. 자세한 건 ‘너희’ 언니한테 직접 물어보지 그러냐.”

그럼 간다. 재민은 더 설명할 의사가 없는지 휙 뒤돌았다. 그리고 몇 걸음 걸어가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자신의 왼쪽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아. 참고로 너, 여기 벌레 붙어 있다.”

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 소리에 나무에 앉아 있던 새들이 푸드덕 날아올랐다.

* * *

한편 그 시각 불멸 본부 내부에서는…….

“오, 아우님 왔는가.”

길드장 유환이 직접 나서 흑염의 프린세스의 두 번째 방문을 환영했다. 은하는 그대로 응접실 의자에 앉으려다 주춤거렸다.

“……아우님?”

“술잔을 함께 나누면 다 형제라는 말이 있지 않나. 우리 길드의 슬로건이기도 하지. 뭐 해? 어서 앉아.”

이전보다 훨씬 친근한 태도. 은하는 자신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리라 생각했지만, 어쩌면 겨우 얻은 제대로 된 술친구가 순전히 기쁜 것일지도 몰랐다.

“그날은 잘 들어갔나?”

유환의 물음에 은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덕분에. 좋은 술은 숙취도 덜하다던데, 맞는 말인가 봐.”

“하하, 뭐 그렇기도 하지.”

유환은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속으로는 놀란 상태였다.

‘그렇게 퍼부어 마시고도 괜찮았다고?’

주당으로 유명한 유환조차 익일에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숙취에 시달렸는데 말이다.

설마 이자가 허세를 부리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했지만 도로 접었다. 필름이 끊기기 직전의 기억까지도, 유환이 본 은하는 놀랍도록 멀쩡했다. 성윤의 말에 따르면 멀쩡히 두 발로 걸어 돌아갔다고도 했고.

거기까지 생각한 유환의 낯빛이 심각해졌다. 유환은 웃음기 없는 눈으로 은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 녀석…….

‘……대단한데?’

자존심이 상하기보다는 순수하게 놀라웠다.

승부욕을 자극하기도 했다. 이자와 다시 한번 주먹다짐, 아니 술 대작을 벌일 날이 고대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 응접실 테이블 위에는 술 대신 프로틴이 함유된 특제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미적지근한 눈빛으로 그것을 응시하던 유환이 주둥이를 툭 내밀며 말했다.

“아쉽게 됐지만 오늘은 술을 준비하지 못했다. 도성윤 그 녀석이 워낙 시끄러워서 말이지.”

유환은 팔짱을 낀 채 어울리지 않게 투덜거렸다. 하여간 술이 원수라는 둥 어쩌고저쩌고.

유환에게 그러한 잔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둘뿐이었다. 금로제와 도성윤.

뭐 어쨌든…….

“두 번이나 발걸음 하게 만든 일에 대해서는 사죄하지.”

양 무릎에 터억 손을 올린 유환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 F급 헌터이건 컨셉 헌터이건, 그녀는 정식으로 초청받아 불멸에 방문한 손님이었다.

성윤의 말대로, 술에 취해 정작 중요한 이야기를 시작조차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돌려보낸 것은 자신의 불찰이었다.

“상관없어. 그제는 나도 좋은 술을 대접받았으니까.”

평생 먹어 볼 일이 없을 것 같았던 아주 비싼 술을 거의 물 마시듯 마셨지. 은하의 담백한 대답에 유환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 말해 주니 다행이군.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

낮게 웃은 그가 자세를 고쳐 앉고 눈빛을 바꾸었다.

“우선은…… 그렇지. 지난 8일, 한국 협회에 GIA가 보낸 전서구가 도착했다는 이야기부터 해야 할까.”

“그거라면 대충 전해 들었어.”

남해안 부근에 거대 게이트가 출현할지도 모른다는 예언에 대해서도, 협회가 암속성과 화속성을 가진 헌터를 찾고 있다는 것도 이미 준환에게 들은 내용이었다.

“그래? 대화 진행이 빠르니 좋군.”

송곳니를 내보이며 웃은 유환이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손잡이를 톡톡 건드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협회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암속성과 화속성 헌터는 물론, 쓸 만한 헌터들을 모조리 그러모으고 있지. 다만 너도 한국인이니 대충 알고는 있을 거야. 이 조그만 나라에 몇 없는 S급들이 대부분 제멋대로라는 거 말이다.”

의자 손잡이를 건드리던 손가락이 문득 멈추었다.

“……늑대에 있던 몸이니 백야의 몸 상태에 대해서야 말할 필요도 없겠고, 트릭스터도 병원 신세지. 다른 두 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데다, 마에스트로는 영 신뢰가 가지 않아서.”

미간을 좁힌 유환이 무거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뭐,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고급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라고 할까. 그래서 말이다.”

유환의 상체가 기우뚱 은하 쪽으로 기울었다. 농담의 기색 하나 섞이지 않은 붉은 눈이 은하를 똑바로 담았다.

“아우여. 네가 괜찮다면 나는, 그리고 닥터 플랜트는 우리가 가진 권한으로 협회에 너를 전투 인원으로 추천할 생각이다.”

─짐작대로였다.

하지만 여기서 확실히 해야 하는 점이 있었다.

“내가 F급 랭크 판정을 받았다는 건 알고 하는 소리겠지?”

“물론 알다마다. 네가 내 주먹을 맨손으로 받아 낸 헌터라는 것도 말이야.”

망설이지 않고 답한 유환은 붉은 눈으로 은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네 입으로 듣고 싶군. 너는 F급 헌터인가?”

“기계는 그렇게 말했지. 하지만.”

은하 역시 유환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동공와 홍채의 경계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새까만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그날 난 너에게 질 것 같진 않았어.”

“뭐……?”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유환은 돌연 배를 잡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

재밌다. 역시 재밌어.

한국에 주먹다짐으로 제천대성을 이길 생각을 하는 헌터가 또 있겠는가. 적어도 유환은 그런 패기 있는 헌터를 처음 마주한 상황이었다.

등을 젖혀 가며 숨이 넘어가도록 웃은 유환은 두꺼운 손바닥으로 이마를 쓸었다.

“뭐, 질 것 같지 않은 건 이쪽도 마찬가지지만 확실히 나는, 그리고 로제는 네 실력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협회는 다르지. 그리 덧붙인 유환이 의자 손잡이에 팔을 대어 턱을 괴고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협회는 눈에 보이는 랭크를 맹신하니까. 국민도 마찬가지고.”

만일 흑염의 프린세스를 협회에 추천하게 되면 대윤은 의심부터 하고 볼 것이다. 그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인 양반은 F급 컨셉 헌터를 이런 중대한 일에 끼워 넣는다는 것 자체에 의문을 느낄 것이 분명했다.

“협회 측에서 꽤 성가시게 굴 게 뻔해. 전투원 하나하나가 절실한 이런 와중에도 조건이나 랭크 따위를 따질 놈들이니까. 물론 나와 로제가 최대한 설득하겠지만 말처럼 쉬울 거란 보장은 없다.”

그놈의 얼어 죽을 ‘원칙’. 협회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지. 유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표면상 흑염의 프린세스는 F급이었으니까.

랭크에 따라 투입되는 게이트 난이도도 상이한 시대. F급 헌터는 언노운 게이트는커녕 A급 게이트에도 진입할 수 없는 것이 헌터법이었다.

제아무리 유환과 로제의 보증 수표가 따라붙는다 한들, 협회는 어떤 형태로든 그녀의 실력을 확인하려 들 것이다.

“그런 점을 감안하고서도 우리를 도와줄 수는 없겠는가? 흑염의 프린세스.”

유환의 말에 줄곧 침묵하고 있던 은하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 예언이라는 거.”

우선 확인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남해안 게이트에 언노운 게이트가 발생한다는 건 확실한 건가?”

“GIA의 예언 따위 난 믿지 않아. 내가 믿는 건 오직 닥터 플랜트의 연구 결과뿐이다. 그녀는 한국에 곧 동시다발적으로 언노운 게이트가 출현할 것이라 추측하고 있어.”

유환이 오른손을 쫙 펼쳐 보였다.

“최대 다섯.”

무표정을 일관하던 은하의 얼굴에 작은 균열이 일었다.

짧은 정적. 유환은 왼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벽면에 붙은 한반도 지도. 남해안 부근에 꽂힌 빨간 압정을 응시하며 그가 입을 열었다.

“만일 GIA가 말하는 남해안 거대 게이트와 로제가 예측한 다섯 개의 언노운 게이트가 같은 것을 말하는 거라면…….”

다시금 은하에게로 눈을 돌린 유환이 무겁게 덧붙였다.

“─90년대 말의 악몽이 되풀이되겠지.”

90년대 말. 그 말 한마디로 눈앞에 선연하게 떠오르는 풍경.

누군가의 아득한 비명,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짙은 피 냄새,

깨진 유리 조각,

찌그러진 자동차,

도로를 뒹구는 상가 간판.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찢어진 옷가지들이 낙엽처럼 걸린 가로수.

그것들을 지나 은하는 집으로 뛰어갔다.

“…….”

습관처럼 왼쪽 팔목에 손을 가져갔다. 손끝에 닿는 팔찌의 감촉.

눈앞에 박살 난 피아노의 잔상이 떠오른다. 그 아래 깔려 있던 엄마의 왼쪽 팔. 바람에 날아가던 대학 합격증.

“하지만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에는 우리에게 대비할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이지.”

유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상념에 잠긴 듯한 은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소집은 일주일 후다. 너에겐 결정할 권리가 있어. 어떻게 하겠는가?”

팔찌를 매만지던 손을 멈춘 은하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유환의 눈썹이 작게 움찔거렸다.

새까만 동공을 중심으로 은하의 검은 홍채가 황금빛으로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유환은 흔들리지 않는 그 눈동자 속에 무언가가 일렁이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득하게나마 예측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신념(信念).

스르륵 입꼬리를 말아 올린 유환이 은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해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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