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03)화 (103/306)


#103. 재방문
2022.11.11.


“아, 헌터님. 여깁니다!”

불멸 길드 본부를 나오자, 입구 쪽에서 기다리던 제휘가 손을 붕붕 흔들었다.

성윤의 조언으로 미리 제휘에게 이곳 주소를 알려 두었으나 이렇게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더라면 굳이 그를 부르지 않았을 텐데. 조수석에 올라탄 은하는 안전벨트를 매며 그런 생각을 했다.

운전석에서 액셀에 발을 올리려던 제휘가 킁킁 코를 움직이며 홱 돌아보았다.

“우와, 술 냄새. 대체 술을 얼마나 드신 겁니까?”

“모르겠어요.”

예? 제휘가 눈을 끔뻑였다. 모르겠다니, 그 정도로 많이 마셨다는 소리일까?

하긴. 제천대성이 엄청난 술고래라는 건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은하가 불멸 길드 본부 주소를 메시지로 보내 왔을 때, 제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부리나케 달려온 것이다.

‘선배가 어딜 갔다고?’

‘부, 불멸 길드에 가셨다고…….’

‘왜?’

‘그건 저도 모르겠…… 히익!’

은하의 불멸 방문 사실을 알게 된 시우가 눈을 사납게 뜬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헌터계의 내로라하는 주당들도 제천대성과 한번 술자리를 가졌다 하면 며칠 밤낮은 꼬박 숙취로 앓아눕는다던데. 오죽하면 애주가로 소문난 협회장마저 제천대성과의 술자리는 기피한다는 소문마저 떠돌 지경.

“…….”

제휘는 은하의 얼굴을 살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불멸 길드에서 빠져나온 은하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차 전체로 퍼지는 이 알코올 냄새만 제외하면 말이다.

“헌터님, 술을 좋아하시는 줄은 알았지만 주량도 대단하신 모양입니다.”

핸들을 잡으며 너스레를 떨 듯 입을 열자, 은하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답했다.

“예전에는 술을 마실 일이 많았거든요.”

“그러셨군…… 요?”

“네.”

언제 어떻게 죽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던 시절. 제정신으로 버텨 내기 힘들 때에는 동기들과 쏟아부어라 술을 마셔 댔었지. 종래에는 그것이 분대 안에서 일종의 행사가 되어서, 게이트 토벌이 끝날 때마다 술판을 벌이곤 했었다.

‘뭐 어쨌든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긴 한데…….’

제휘는 안심하면서도 중간중간 신호에 걸릴 때마다 휴대전화를 들어 열심히 액정을 두드렸다. 그의 보고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한 사람을 위해서였다.

[나] [오후 9:49] 방금 이 헌터님을 태우고 오피스텔로 향하는 길입니다.

[나] [오후 9:49] 겉보기에는 멀쩡하십니다.

그러자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답장이 도착했다.

[신 대표님] [오후 9:49] 거긴 왜 갔대?

역시 그게 궁금하시겠지. 제휘는 은근슬쩍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으며 은하를 힐끔 바라보았다.

“흠흠…… 그런데 헌터님, 갑자기 불멸 길드에는 왜 방문하신 겁니까? 혹시 자갈치시장 언노운 게이트의 일이라든가…….”

“아뇨. 다른 일이에요.”

은하는 고개를 저은 후, 불멸 본부를 나오기 직전 보았던 유환의 모습을 떠올렸다.

‘우으으, 로제…… 거긴 안 돼…….’

바닥에 대자로 뻗은 그는 시뻘건 얼굴로 히죽대고 있었다. 그 모습이 꽤나 꼴사나웠던지 고양이가 면전에 대고 신랄한 욕설을 퍼부었지.

은하는 그의 의외의 모습을 뇌리 한구석에 고이 접어 둔 채 입술을 달싹였다.

“……오늘은 제천대성이 뻗어 버리는 바람에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어요. 조만간 다시 방문해서 마저 얘기해야죠.”

“예?”

깜짝 놀란 제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불멸 길드를 또다시 방문하겠다는 말도 그러했지만…….

‘뻗어? 누가?’

제천대성이? 제휘의 머릿속에 무수한 물음표가 가득 떠올랐다.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뒤쪽에서 빵! 하는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덧 신호가 초록 불로 바뀌어 있었다.

‘아, 아니 그것보다…….’

제천대성이 뻗었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제휘는 핸들을 꺾으며 은하를 떠보기로 했다.

“그…… 조만간 다시 들리시는 건 언제가 되겠습니까?”

“그쪽에서 다시 연락을 주기로 했어요. 빠르면 내일, 늦어도 며칠 안에는요. 그건 그렇고 매니저님.”

거기까지 말한 은하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제휘를 향해 휙 시선을 돌렸다.

“엉따가 뭐예요?”
 

* * *

다음 날, 불멸에서 연락이 왔다.

제천대성이 지독한 숙취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성윤은 연신 죄송하다는 사과와 함께 내일 다시 연락드리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또 다음 날. 이번에는 불멸이 아닌 아연에게서 연락이 왔다.

「언니, 지난번에 언니가 보고 싶다고 했던 영화 있죠? 나 공짜 표 생겼는데 같이 갈래요?」

아연은 들뜬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아연이 말한 영화관은 은하의 오피스텔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래, 좋아.”

「아싸! 그럼 언니, 지금 나올 수 있어요?」

“지금?”

「네. 영화 시간까지 아직 시간도 많이 남았으니까 쇼핑이나 갈까 해서요. 뭐, 오락실 같은 곳도 괜찮고. 아! 요즘 유행하는 VR 놀이터 가 볼래요? 나 거기 할인 되는데.」

은하는 휴대전화를 쥔 채 벽면의 시계를 힐끔 확인했다. 주말 오후 4시 반. 어딜 가든 사람이 붐빌 것이다.

“영화관이 이 근처니까 우리 집으로 와.”

「네……? 정말요……?」

돌연 수화기 너머로 감격에 겨운 신음이 들려왔다.

「저, 정말 가도 돼요……?」

“응. 별건 없지만, 네가 괜찮다면.”

「갈래요! 갈 거예요! 지금 당장! 롸잇 나우!」

벼락처럼 전화를 끊어 버린 아연은 약 30분 만에 초인종을 눌렀다.

“헬로!”

“이게 다 뭐야?”

현관문을 연 은하는 아연이 양손 가득 들고 있는 봉투들을 보며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으음, 칫솔이랑 잠옷이랑 컵이랑…… 아! 혹시 몰라서 스킨로션도 챙겨 왔어요. 나 여기 브랜드만 쓰거든.”

아연은 식탁 위에 주섬주섬 물건들을 꺼내서 진열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무척 신이 난 듯 보였다.

은하는 아연이 사 온 물건들을 떠름하게 응시했다. 이 말을 할까 말까……. 깊게 고민하던 은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자고 가란 말은 한 적 없는데.”

“에이, 혹시 모르잖아요? 미리 챙겨 놔야지. 짠! 언니 잠옷도 사 왔어요. 난 도널드덕, 언니는 데이지! 예쁘죠?”

“…….”

“…….”

은하의 침묵에 아연이 손에 들고 있는 잠옷과 은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언니가 도널드덕 할래요?”

그로부터 약 10분 뒤.

양손 가득 챙겨 온 물건들을 모두 정리한 아연은 그제야 은하의 집을 둘러보았다.

통유리로 된 베란다 창문에서 눈부시게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 대리석으로 된 바닥이 해변의 모래처럼 반짝였다. 거실에 달린 조명마저 분위기 좋은 카페를 연상시키듯 고풍스러웠다.

고급 가죽으로 된 소파에 벽면을 가득 덮은 거대한 TV, 폭신하고 부드러운 카펫까지. 오피스텔 입구에서부터 돈 냄새가 난다 싶더니 내부는 더했다. 그런데.

“언니 여기 산 지 얼마 안 됐어요? 왜 이렇게 휑하지?”

딱 필요한 가구 외에는 생활감을 느낄 만한 물건들이 없었다. 뭐랄까, 이건 마치 보기 좋게 꾸며진 모델 하우스를 보는 기분이었다.

“앉아. 뭐라도 꺼내 줄게.”

“에이, 됐어요. 냉장고도 텅 비었을 것 같은─.”

……데? 아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냉장고 내부에는 각종 반찬에 양념, 언제든지 꺼내 먹을 수 있는 냉동식품, 즉석요리뿐만 아니라 술, 음료가 가득했다.

그뿐이랴. 레몬청, 유자청, 매실청 등 귀여운 유리병에 담겨 색깔별로 진열된 수제 청들까지 한가득. 모두 제휘가 직접 만든 것들이었다.

하고많은 먹을거리 중에서 하필이면 즉석조리 미트볼을 꺼낸 은하는 그것을 전자레인지에 돌린 뒤 식탁 위로 가져왔다.

‘이 집에 우렁각시가 있구나.’

그 모습을 보며 아연은 확신했다. 아무리 보아도 이 언니가 저 많은 음식들을 직접 구비하고 깔끔하게 보관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학원 안 가요?”

아연의 물음에 은하는 미트볼을 포크로 쿡 찌르며 짤막하게 답했다.

“관뒀어.”

“엥? 관뒀다고요?”

미트볼을 입으로 가져가던 아연이 멈칫했다. 분명 지난번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이제부터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겠다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보다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까.”

“중요한 일…….”

중얼거리듯 되뇐 아연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 알겠다! 역시 언니, 헌터 계속하려고 하는 거죠? 진짜 잘 생각했다. 그럼 나랑 파트너로 활동하는 것도 생각해 봤─.”

Rrrrr…….

전화벨이 울렸다. 은하의 휴대전화였다.

<010-93XX-XXXX>

비록 전화부에 등록해 두진 않았지만 낯이 익은 번호였다. 아마도 불멸이겠지.

“잠깐만.”

아연에게 양해를 구한 은하는 식탁에서 일어나 휴대전화를 들고 안방으로 사라졌다.

식탁에 홀로 남은 아연은 턱을 괸 채 접시 위의 미트볼을 포크로 데굴데굴 굴리며 그녀를 기다렸다.

의미 없이 허공을 유영하던 시선이 곧 한곳에 우뚝 멈추었다. 소파 옆 스탠딩 조명 아래 덩그러니 놓인 가방.

‘뭐지?’

깔끔한 인테리어와는 어울리지 않게, 지퍼가 열린 채 아무렇게나 방치된 그 가방의 정체가 궁금했다. 아연은 식탁에서 일어나 그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강행욱 애견 미용 학원>

아.

가방 표면에 프린트된 로고를 확인한 아연은 그것이 은하의 애견 미용 학원 가방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퍼가 열린 가방 주변에는 각종 브러시와 가위, 필통이나 문제집 따위가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내 것이 아니니 함부로 건들지 않는 것이 좋겠지. 아연은 가방에 손을 대지 않고 뒤돌아섰다. 식탁으로 돌아가려는데.

“앗.”

발에 무언가 걸렸다. 공책이었다.

설마 밟으면서 찢어진 건 아니겠지? 발밑 공책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찰나, 아연은 상체를 숙인 그 상태 그대로 멈칫 굳었다.

펼쳐진 공책에는 악필로 쓰인 문자들이 빼곡했다. 얼핏 보았을 때 견종이라든지 발톱 깎기 순서 등, 학원에서 배운 내용을 적어 둔 공책 같았다.

공책 한 면을 빈틈없이 채운 글자들. 그 가장 아래, 짧은 문장이 볼펜으로 휘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화이팅.

“…….”

어째선지 그 세 글자에서 시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뻣뻣하게 굳어 있던 와중, 안방으로 들어갔던 은하가 문을 닫고 나왔다.

“미안하지만 영화 취소해야 할 것 같아. 가 봐야 할 곳이 생겼거든.”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다가온 은하는 소파 곁에서 엉거주춤 선 아연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뭐 해?”

“아하하, 공책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길래…….”

“아아.”

은하의 눈이 사르륵 가라앉았다. 입술을 달싹이려다 도로 닫은 은하는 초연한 얼굴로 뒤돌아섰다.

“이제 필요 없는 것들이라서.”

은하의 대답에 아연은 시선만 또르륵 떨구어 발밑의 공책을 다시 응시했다.

멀리서 보면 검은 종이처럼 보일 만큼 빽빽한 필기들.

은하가 학원에서 수업받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이 공책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피부로 느껴졌다.
하지만 언니는 아까…….

‘관뒀어.’

아주 담백하게 그렇게 말했다.

“아무튼 이거만 먹고 나가야겠어. 급한 일이라서. 영화는 다음에 보자.”

은하는 조금 식어 버린 미트볼을 포크로 찍으며 그리 말했다. 맞은편에 앉은 아연 역시 포크를 쥐었다.

“오래 걸리는 일이에요?”

“아니. 그냥 이야기만 나누고 올 거지만 영화 시간에 맞추지는 못할 것 같아서. 미안.”

“그런 거라면 그냥 미루면 돼요. 몇 시쯤으로 할까? 대충 밤 10시 정도면 적당하려나?”

“미루다니, 어떻게?”

“엥, 어떻게라니. 그냥 어플 들어가서 시간 변경하면 뚝딱인데?”

놀라운 세상이었다. 은하는 새삼 기술의 발전을 느꼈다.

영화 시간을 변경한 아연은 휴대전화를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다 됐다. 언니, 금방 끝난다고 했죠? 그럼 그냥 같이 갈까요? 그게 더 빠를 것 같은데.”

“난 상관없지만…… 아마 본부에 같이 들어가진 못할 텐데.”

“본부?”

아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세상에.’

약 1시간 뒤, 은하가 말했던 ‘본부’에 도착한 아연은 크게 당황했다. 빌딩 꼭대기에서 펄럭이는 빨간 깃발에는 주먹 마크가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다.

돌처럼 굳어 버린 아연을 향해 은하가 힐끔 시선을 보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고 있어. 금방 끝내고 나올 테니까.”

“…….”

아연은 대답하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아니, 잠깐만.

‘여기…… 불멸이잖아?!’

코끝을 찌르는 이 땀 냄새와 자랑스럽다는 듯이 걸어 둔 저 촌스러운 깃발도 여전했다.

“아니, 언니가 여길 왜─.”

뒤늦게 홱 고개를 돌린 아연이었지만 이미 은하는 본부 내부로 들어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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