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흑염의 프린세스 (1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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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99 흑염의 프린세스 (1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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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前 K-디오니소스
2022.11.10.
불멸 길드 본부.
“도착했군, 도성윤.”
응접실 근처를 서성이던 재민은 동상처럼 한 자리에 우뚝 서 있는 성윤을 발견했다.
“그자는?”
“안에.”
성윤은 맞은편의 문을 향해 턱짓했다. 한국 도깨비 문양이 빼곡하게 새겨진 그 목조 문은 성인 남자가 한 손으로 열지 못할 정도로 두껍고 거대했다.
재민은 성윤을 지나쳐 문에 손을 갖다 댔다.
“사부, 허재민입니─.”
“무슨 짓이야.”
성윤이 그를 재빨리 막아섰다.
“사부와 그분께서는 중요한 이야기 중이시다. 방해하지 마.”
방해? 재민은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이거, 아직 전달하지 않았잖아.”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천을 슥 들어 보였다.
테라포사의 실. 재민의 손에 들린 그 천은 통칭 은닉사(隱匿絲)로 불리는 귀한 실로 짜낸 물건이었다.
민무늬의 검은 천은 언뜻 평범하게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자체적으로 어슴푸레한 빛을 발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별한 스킬을 가진 일류 재단사만이 제작할 수 있다고 알려진 그것은, 몸에 걸치는 것만으로도 착용자의 고유 능력 사용을 일시적으로 제한할 수 있었다.
그 이유로 은닉사는 보통 각성한 범죄자의 죄수복으로 제작되거나 국제 정상 모임 등에서 안전과 신뢰를 위해 망토 형식으로 착용하는 일이 대다수였다.
“이 안에는 사부와 그자밖에 없는 거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이걸 입혀 둬야 해.”
─그러므로 길드에 정식으로 초대받은 손님에게 은닉사 착용을 강요하는 일은 없었다. 적어도 성윤의 상식으로는 그랬다.
성윤은 재민을 향해 경고하듯 말했다.
“정식으로 초청받고 오신 분이야. 그런 분께 은닉사 아이템을 건네다니, 실례되는 행동이란 생각은 안 드나?”
“짧게라도 늑대에 몸을 담았던 자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허재민, 몇 번이고 말했지. 그분은 우리 불멸에게 큰 도움을 주셨다. 그리고 이번 계획에서도 큰 힘이 되어 주실 거야. 그렇기 때문에 사부께서도 그분을 애타게 찾으신 거고. 생각을 좀 해라.”
성윤의 말에 재민은 짜증스럽게 미간을 좁혔다. 평소 죽마고우 사이인 그들이었지만 이럴 때면 정말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생각은 너나 해. 여긴 불멸의 심장부야. 그자가 혹시라도 마음먹고 날뛰기 시작하면? 그래서 사부와 다시 한번 맞붙는다면?”
이 건물은 가루가 될 거야.
그리 덧붙인 재민은 자갈치시장에서 벌어졌던 두 사람의 주먹다짐을 떠올렸다.
무기 없이 맨주먹으로만 진행된 결투였지만 어떻게 되었던가. 불멸 측에서 지불한 보수 비용만 수억 원대였으며 그 때문에 자갈치시장이 한 달간 폐쇄됐던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재민은 인정했다.
흑염의 프린세스, 그자는 평범한 F급 컨셉 헌터가 아니라는 것을. 그렇기에 더더욱 본부 한가운데에 사부와 단둘이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만약 그자가 사부를 상대로 능력을 사용할 생각이 없다면, 이깟 천쯤 몸에 두르고 있는 것 따위 개의치 않겠지.”
재민은 성윤의 어깨를 강하게 밀어냈다.
“비켜.”
“아니, 못 비켜.”
그러나 성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 둘 사이에 거센 스파크가 튀었다.
“한번 해보자는 건가?”
재민이 눈을 번뜩이는 순간 양어깨 위로 떠오르는 붉은 칼날. 서늘한 칼끝이 성윤에게 향했다.
“이 건물을 가루로 만들고 싶은 건 다름 아닌 너인 듯한데.”
차분한 목소리와는 반대로 성윤은 허공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손아귀 속 대기가 진동하며 하얀 빛줄기가 곧 백색의 화살이 되었다.
“두, 두 분!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다들 뭐 해! 말리지 않고!”
지나가던 길드원들이 부리나케 뛰어와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그러나 누구도 먼저 무기를 거두지 않았다.
한편 위태위태한 바깥 공기와는 달리 응접실 내부에서는…….
“으핫핫─!”
유환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 내 초대에 응해 주었으니 이번 일에 너도 참여할 생각이 있는 거라고 판단해도 되겠지?”
은하는 그의 물음에 부정의 뜻을 표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유환이 기분 좋게 술을 따랐다.
“자, 사양 말고 마셔. 오늘은 기념할 만한 날이니까. 아, 혹시 부족하면 말하고. 이 뒤에 있는 것들 전부 다 술이거든.”
……저게 다 술이라고? 은하는 잔을 홀짝이며 유환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유환은 앉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태백산 같은 거구를 자랑했는데, 그곳의 박스 더미들은 그런 그의 덩치를 훌쩍 넘을 정도로 높게 쌓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쪽 벽은 아예 전면에 술병이 진열되어 있었다.
‘굉장해.’
은하의 무심한 눈빛 속 그 어딘가, 순수한 감탄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크흠, 언니? 눈빛이요, 눈빛 하며 당신의 옆구리를 쿡쿡 찌릅니다.]
아, 그제야 은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위험했어. 하마터면 넋을 잃을 뻔했다.
“이곳이 마음에 드는가?”
은하의 표정 변화를 읽은 유환이 피식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은하는 술병이 진열된 벽에서 시선을 거두고 그를 바라보았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찾아와.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가 먼저 연락을 준 것보다, 오랜만에 좋은 술친구를 만났다는 사실이 더 기쁘군그래.”
콸콸─
유환은 잔에 술을 폭포처럼 들이부은 뒤 그것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크으, 바로 이거다. 기분 좋게 콧잔등을 찌푸린 그가 이번에는 은하의 잔을 채워 주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마실 필요는 없고.”
유환의 사이즈에 맞춰 제작된 술잔은 일반 맥주잔의 두 배 정도 되었는데, 크기도 중량도 일반 사람은 양손으로 들기에도 버거운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그곳에 넘칠 만큼 술을 갖다 부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웬만한 아령급의 무게가 되었다.
“……이 정도는 거뜬해.”
작게 입술을 달싹인 은하는 단숨에 잔을 탈탈 비워 버렸다.
탁!
보란 듯이 테이블 위에 기세 좋게 빈 잔을 올려 둔 은하는 손등으로 입가를 가볍게 닦아 내기까지 했다.
“호오?”
유환의 눈썹이 둥글게 올라갔다.
파직─
그때 은하의 피부 위에 날카로운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무언가가 닿은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강한 적의(敵意)였다.
“…….”
은하가 힐끗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 적의의 근원지는 도깨비가 새겨진 커다란 문 너머였다.
“아아, 내버려 둬.”
유환이 휘휘 손을 내저었다. 그도 역시 느낀 모양이었다. 그는 상자에서 새 술을 꺼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뭐, 부부 싸움 같은 거니까.”
“부부가 있나?”
같은 길드에서 활동하는 부부 헌터라니. 은하가 신기하다는 듯 묻자 유환은 씩 웃으며 답했다.
“비슷한 거지. 그만큼 녀석들의 싸움이 칼로 물 베기란 소리기도 하고.”
그런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도 문 밖에서는 챙, 챙, 챙! 휘리릭, 쾅! 하는 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환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 치고받다 보면 더 가까워지고 그러는 거 아니겠나? 특히나 저 나이 때는.”
퐁!
맑은 소리와 함께 병을 딴 그가 다시금 잔을 채웠다. 은하는 문 밖의 요란한 소리에서 관심을 끄고 그가 새로 꺼낸 술에 주목했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진한 술 향이 코를 찔렀다. 모르긴 몰라도 저건 상당한 독주인 듯했다.
“이놈은 그 뭐냐, 저어기 중국에 호접 길드에서 몇 년 전에 보내온 술이다. 바로 오늘을 위해 그간 아껴 둔 것 같군.”
받아라. 호쾌한 웃음과 함께 그가 술병 주둥이를 불쑥 내밀었다.
“고마워.”
은하는 쓱 잔을 내밀며 단조롭게 답했다. 술을 따르던 유환이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 보니 너, 내게 반말을 하는군.”
건방지다거나 꼬투리를 잡을 생각은 아니었다. 얼핏 보아도 이십 대 초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녀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반말을 하는 모습이 신기할 뿐.
잔을 비운 은하가 힐긋 시선을 들었다.
“그쪽도 마찬가지니까.”
“흠. 나이가 어떻게 되지?”
“글쎄. 아마 비슷할 거 같은데.”
뭐……? 유환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무릎을 탁 치더니 어깨를 떨어 가며 웃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약 1시간 뒤.
마주 앉은 그들의 곁에는 어느덧 빈 술병이 셀 수 없을 만큼 굴러다니고 있었다. 단둘이서 1시간 만에 마셨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개수였다.
“…….”
탁, 잔을 테이블 위에 올린 유환이 스르륵 고개를 들었다. 그만큼의 술을 비워 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멀쩡한 낯빛.
당연했다. 그는 이 정도로는 취할 위인이 아니었으니까.
유환에게는 제천대성 말고도 또 하나의 숨겨진 이명이 있었다. 한국의 술신, 즉 K-디오니소스.
술깨나 마신다는 성윤조차 유환과 잔을 나눌 때면 네 발로 도마뱀 흉내를 내며 본부를 기어 다닌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유환은 맞은편에 앉은 은하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는 현재까지 유환의 속도를 잘 따라오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칭찬해 줄 만한 일이었다.
‘이제 슬슬.’
알코올도 꽤 들어갔겠다, 조금 더 있으면 상대가 인사불성이 될지도 모르니 속내를 캐내기엔 지금이 딱 좋았다.
유환은 태연한 얼굴로 잔에 술을 따르며 말문을 열었다.
“내가 말이지, 줄곧 궁금했던 게 있는데. 그 정도 실력을 가지고도 대체 왜 컨셉 헌터를 자처하는 거지? F급 판정은 또 뭐고.”
세상에 취중 진담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필요한 정보를 얻기에, 또 신뢰와 우정을 쌓기에 술만 한 것이 없었다.
유환의 물음에 은하는 잔을 홀짝이며 초연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 계획을 진행하는 데에 그런 이야기까지 필요해?”
멈칫.
유환은 잔을 입에 가져가다 말고 짐짓 굳어 버렸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놀랍도록 멀쩡해.’
그제야 그녀의 얼굴색이 처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쯤 마셨으면 보통 사람은 혀가 꼬인다거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선천적으로 술에 취해도 얼굴에 티가 나지 않는 사람이야 간혹 있었지만, 유환의 질문을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되받아치는 것을 보아하니 그것도 아닌 듯했다.
“…….”
유환은 가만히 은하를 뜯어보았다.
그녀가 F급 이상의 실력자라는 것도 이제는 알고, 이번 계획에 꼭 필요한 화속성과 암속성을 동시에 지닌 헌터라는 것도 알았다.
다만 유환 입장에서는 여전히 그녀에 대한 의문이 남아 있었다. 술의 힘을 빌려 조금이라도 입을 열게 할 셈이었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이 술도 질렸으니 새로운 놈으로 대접하지.”
벽장에서 새 술을 꺼내는 손길이 상당히 비장했다.
그가 꺼내 든 술을 시야에 담은 은하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과연, 이번 술은 디자인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자잘한 다이아몬드가 유리병 표면에 빼곡하게 박힌 그것은 한 병에 약 3억 원을 호가하는, 최고급 중에서도 최고인 술이었다. 술에 돈을 아끼지 않는 유환에게는 그저 조금 더 예쁘고 맛있는 술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또 약 30분이 흘렀다.
“하고많은 길드 중에 왜 하필 늑대였지?”
시가 3억 원 상당의 술을 몇천 원짜리 소주 마시듯 입에 털어 넣은 유환이 슬슬 다시 입을 열었다.
“우연히 연이 닿은 것뿐이야.”
“어떻게?”
“그냥, 말 그대로 우연히.”
……아직인가. 유환은 눈썹을 씰룩였다.
이렇게까지 술을 먹었는데 상대는 취기가 오르기는커녕 점점 더 냉정해지는 것 같은 건 과연 기분 탓일까.
‘어쩔 수 없지.’
유환은 굵직한 손가락으로 허공을 툭툭 건드렸다. 인벤토리 오픈. 이어서 그의 빈 손바닥 위로 번쩍! 빛의 구체가 떠올랐다.
이윽고 빛무리가 사라진 그곳에 복숭앗빛 호리병이 나타났다.
몽유주(夢遊酒).
서왕모가 곤륜산 요지의 이슬을 담아 직접 빚었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술. 4년 전 헌터 옥션에서 치열한 경매를 벌인 끝에 무려 9만 코인에 입찰한 진귀한 물건이었다.
‘이건 언젠가 그녀와 함께 마시려고 아껴 둔 거지만…….’
에라, 모르겠다. 유환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열었다. 뽁! 하는 소리와 함께 달큼한 복숭아향이 코에 닿았다.
어쩌면 그때부터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던 걸지도 몰랐다.
* * *
달칵.
영영 열릴 것 같지 않았던 응접실 문이 드디어 열렸다. 주변을 지키고 있던 성윤이 후다닥 그곳으로 달려갔다.
재민과의 혈투 끝에 그들은 결국 가위바위보로 누가 그곳을 지킬지를 결정했고, 승리한 성윤이 남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제천대성 유환이 아닌 검은 드레스의 여인, 흑염의 프린세스였던 것.
“이제 돌아가시는 겁니까?”
“아, 네.”
성윤은 짧게 대답하는 그녀를 힐끗 살폈다.
이 정도 거리에서도 술 냄새가 코를 찌를 정도였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그녀의 얼굴색은 방 안쪽에 들어갈 적에 비교하여 달라지지 않은 채였다. 마치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사람처럼.
‘그럴 리가.’
이 방은 일반 응접실이 아닌 유환의 술 창고. 불멸 길드 설립 이래 이 방에서 두 발로 걸어 나온 사람은 유환 외엔 없었다.
“조만간 다시 들르겠습니다. 오늘 못다 한 이야기는 그때 다시 듣겠다고 그에게 전해 주세요.”
“아, 네에, 언제든지…….”
눈을 끔뻑이며 답하는 성윤에게 짧게 묵례한 은하는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헛.”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던 성윤은 뒤늦게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방 내부로 들어섰다. 그리고.
“사, 사부?!”
바닥에 대자로 뻗어 누운 제천대성(前 K-디오니소스)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