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은하가 훈련소에 들어가고 1개월 하고도 반이 흘렀을 무렵.
낮게 깔린 구름 아래, 그날도 은하는 허수아비가 박살 날 때까지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고생했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 훈련소장 견원철이 등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지금 이 시간까지 은하가 이곳에 남아 훈련을 이어 간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원철은 잿더미가 된 가엾은 허수아비를 힐끔 바라보았다.
“군수 장교가 또 투덜대겠군.”
나무라는 듯한 말투와는 달리 그는 반질반질한 사과 하나를 은하를 향해 툭 던졌다.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아 낸 은하가 물끄러미 사과를 응시하자, 그가 픽 웃으며 말했다.
“저녁도 굶지 않았느냐.”
은하는 그제야 해가 저물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턱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서울에서는 볼 수 없었던 별 무리가 밤하늘에 빼곡했다.
“……감사합니다.”
짧게 고개를 숙인 은하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적당히 달고 아삭한 식감이 퍽퍽하게 말라붙은 입안을 가득 채웠다.
“어떠냐?”
“달고 맛있습니다.”
“그래, 그렇지?”
원철이 껄껄 웃었다. 잘 익은 사과를 한 입 더 베어 문 은하도 무심코 따라 웃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나란히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밤하늘을 바라봤다.
문득 원철이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줄기만 앙상하게 남은 사과를 쥔 은하의 손은 얼핏 보아도 상처투성이였다. 계속된 훈련으로 상처는 늘어만 가 자가 치유력이 따라붙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엉망진창인 그녀의 손을 바라보던 원철이 한숨 섞인 어조로 말했다.
“그 손으로는 젓가락도 제대로 쥘 수 없겠구나.”
“…….”
은하는 무심하게 자신의 손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것을 사과 줄기와 함께 뒤로 숨겨 버렸다.
“그렇게 혹독하게 훈련하는 이유가 있느냐. 어차피 이곳에서의 훈련이 끝나면 싫어도 목숨을 건 싸움을 반복해야 할 텐데.”
“이곳을 나가면 제가 걸어야 할 건 제 목숨만이 아니잖아요.”
할 수 있는 준비는 이곳에서 모두 끝내고 나갈 생각이었다. 이제 더는 내 눈앞에서 누군가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도 제 몸도 돌볼 줄 알아야 한다. 그게 우리 의무이기도 하거든. 1997년 9월, 세상이 변한 날. 우리는 살아남았지 않느냐.”
“…….”
은하는 아무 대답도 없이 그저 조용히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습기 하나 머금지 않은 퍼석한 흙 속을 이름 모를 벌레들이 파고들고 있었다.
1997년 9월.
그때의 악몽을, 은하라고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다시금 떠올린 은하는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역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 그녀에게는 녀석들을 죽일 만한 ‘힘’이 있었다. 그러니 그 힘을 갈고닦아 종래에는 녀석들을─.
“그날, 나 역시 딸을 잃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
문득, 등 뒤에서 원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은하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메마른 바람이 둘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같은 방향으로 휘날렸다.
앞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낸 그는 두툼한 담배를 한 개비 입에 물었다.
치익.
불을 붙이는 소리와 함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집이 무너지고 불길한 소용돌이가 생겼는데, 거실에 드러누워 책을 읽고 있던 딸이 쑥 빨려들어 갔다. 내 눈앞에서.”
마치 하수구에 빨려 내려가는 물처럼 말이다. 원철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눈앞에서 어린 딸이 게이트에 휘말리는 광경을 목격한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소용돌이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곳에서 낫을 든 악마형 몬스터를 조우했고, 죽기 직전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창으로 돌연 각성했다고 했다.
“덕분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마는.”
……결국 딸은 구하지 못했지. 그는 참담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이후 딸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아내는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는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아들을 모른 체하고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고.
“내 인생은 거기서 끝인 줄 알았다. 이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거든.”
은하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집, 가족 그리고 꿈마저 한순간에 잃어버린 은하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렇게 살 바에는 그냥 몬스터와 싸우다 배를 뚫려 죽어 버리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어.”
거기까지 이야기한 원철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느 날, 아들 녀석이 꾸깃꾸깃한 진로 희망서를 들고 왔단다.”
다니던 고등학교는 무기한 휴교에 재택 수업마저 불가능한 상황. 아들이 들고 온 진로 희망서는 악몽이 시작되기 직전 학교에서 배부받았던 것이었다.
“소방관이 되고 싶다더군.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 주는 영웅, 그게 동생의 꿈이었으니 제가 그것을 대신 이루어 주겠다고.”
재앙의 날, 누구보다 빠르게 각성한 원철과는 달리 그의 아들은 비각성자였다.
비각성자가 헌터가 될 수는 없을 테니, 언젠가 평화가 찾아오면 자신은 헌터 대신 소방관이 되어 사람들을 구출하고 싶다고.
“그 어린 녀석이 나보다 낫지.”
나지막이 웃은 그가 담배 연기를 훅 내뿜었다.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매캐하고 독한 그것은 그의 속을 한껏 휘젓고 나서야 공중으로 사라졌다.
은하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널 보니 마치 그때의 날 보는 듯해. 그런데 말이다.”
잠시간의 침묵 후 아직 남은 담뱃불을 흙에 꾹 눌러 끈 그가 한층 가벼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살아 보니 사람은……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한 그루 나무와 같더구나.
큰바람이 불 때마다 하나씩, 또 하나씩 잎사귀를 떨어트리곤 한단다. 그래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차갑고 혹독한 겨울이 오면 앙상한 가지만 남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은하야.”
이것만은 기억했으면 좋겠구나. 그가 조용히 덧붙였다.
“───.”
은하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소장님은 그때 결국 무슨 말을 했었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웃었다.
흑백의 하늘 아래서도, 그저 웃었던 것 같다.
***
새하얀 근조 화환이 즐비한 복도.
상념에 잠겨 있던 은하는 스르륵 고개를 들었다.
〈장례식장〉
故 견원철 / 상주:견두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