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82)화 (82/306)

#82

아연은 패배자였다.

게이트 사고로 부모님을 잃었을 때도, 보육원 파산으로 다른 낯선 보육원으로 옮겨졌을 때도, 동급생들에게 지독한 따돌림을 당했을 때도, 아연은 스스로를 패배자라고 생각했다.

결국 갖고 태어난 놈이 전부였다. 돈이든 능력이든 가족이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것들을 가지고 있는 자들. 또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런 것들을 갖지 못한 자들 또는 잃어버린 자들.

아연이 바라본 세상은 그렇게 승리자와 패배자로 구분되어 있었다.

아연은 어느 날 우연한 기회로 승리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아주 쉽게 손에 넣은 ‘승리’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다지 달콤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뒤늦게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아연은 천천히 눈을 떴다.

“…….”

“…….”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까만 눈동자. 고요한 적막 속에서, 은하가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일어날 수 있겠어?”

무심히 내밀어진 하얀 손.

순간 아연은 그런 생각을 했다. 아, 내가 원하던 것은 그다지 큰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젖은 땅에서 상체를 일으킨 아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베르데와 그의 동료들, 그리고 이곳을 빼곡하게 둘러싸고 있던 사나운 개들마저 어느덧 연기처럼 사라져 있었다.

아연은 멍한 얼굴로 은하의 손을 응시하다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것을 맞잡았다.

“사과를 받긴 했지만 신고도 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엉망진창인 아연의 모습을 보며 은하가 말했다.

엎드려 절받기식으로 받은 사과는 소용이 없었다. 언제 어떤 식으로 보복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신고는 안 돼요.”

쫘악. 상의를 쥐어짜 흙탕물을 한껏 뽑아낸 아연이 말했다.

“도리어 내가 잡힐지도 모르니까.”

“……뭐?”

은하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히힛. 귀엽게 웃은 아연이 공중을 살짝 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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