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74)화 (74/306)

#74

의료용 이동 침대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민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침대 시트 전면이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것 모두가 민주의 피였다.

“마스터……!”

놀란 수현이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참혹한 민주의 모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벌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

곁에 선 다른 군단 길드원들도, 하물며 평소 원체 표정 변화가 없는 은하조차 마찬가지였다. 새까만 동공을 크게 확장한 채, 은하는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보, 보호자분. 지금은 안─.”

이송 요원을 제치고 수현이 터벅터벅 민주에게 다가갔다.

피가 스며든 붉은 붕대는 소년의 자그마한 머리 전체를 감싸고도 모자라 두 눈까지 가리고 있었고, 그 아래로 겨우 보이는 콧대 주변엔 구슬 같은 식은땀이 흥건했다.

의학에 대해 지식이 전혀 없는 이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상태는 최악이었다.

“마스…… 미, 민주…….”

수현이 덜덜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 손이 채 닿기도 전에 스르륵, 민주가 두르고 있던 망토가 땅에 힘없이 떨어졌다.

피에 절어 붉다 못해 거무튀튀하기까지 한 녹색 망토. 금실로 수놓인 별들이 까맣게 져 있었다.

“읏…….”

수현은 입을 틀어막은 채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미처 가두지 못한 눈물방울이 투둑투둑, 굵은 빗줄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송하겠습니다.”

무겁게 입을 연 구급대원이 침대 손잡이를 잡았다. 그런데 그때.

“……나.”

꿈틀.

죽은 듯이 꼼짝 않던 민주가 미세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쌔액, 위태로운 숨을 내뱉은 민주는 아주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누……, 피… 규허…….”

“예, 마스터. 유라 씨가 도착했습니다.”

한껏 억눌린 목소리. 준환이었다. 아랫입술을 세게 깨문 그가 은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짓을 받은 은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민주에게 다가갔다.

“…….”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은하는 그대로 굳은 채 입술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가까이서 본 민주의 상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으므로.

바스락─

이불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붕대를 두른 민주가 안간힘을 써서 손을 뻗었다.

직접 제조한 소총을 야무지게 만져 대던 작은 손은 마치 썩어 버린 낙엽처럼 변모해 있었다.

제 새끼손가락보다 두꺼워 보이는 바늘을 손등에 꽂은 채, 민주는 정처 없이 허공을 더듬었다.

“누, 나…… 거기… 있어, 요?”

“……응.”

은하가 나직이 답했다.

목소리가 너무 작았던 걸까. 민주는 시트 표면을 더듬거리다가 다시 한번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누…… 나, 와…… 어, 요?”

“응, 나 여기 있어.”

이번에는 조금 더 크게 답했다. 그러나 민주의 손은 여전히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준환, 형…… 누… 나, 느…….”

─마치 은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처럼.

민주는 두 번 다시 작은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실금이 번진 얼굴로 뻣뻣하게 굳어 버린 은하는 작은 손이 꼬옥 움켜쥐고 있는 가느다란 실타래를 뒤늦게 발견했다.

흙이 잔뜩 묻어 더러워져 있었지만 은하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원래 귤색이었다.

귤색의, 소원 팔찌였다.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적막한 복도. 분노를 억누른 수현의 목소리가 파르르 울려 퍼졌다.

면목 없는 듯 툭 고개를 떨군 길드원들 사이로 준환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진정해. 지금은 마스터의 회복이 우선이야.”

회복? 준환의 말에 수현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를 들은 양 인상을 찌푸렸다.

수현은 이미 민주의 상태를 확인한 뒤였다. 그것은 과연 회복을 바랄 수야 있는 수준이었던가.

아니. 절대.

이미 수술을 마친 상태였으나 민주의 상태는 수술 전보다 더욱 참혹해져 있었다.

온몸에 덕지덕지 붙은 심전도 케이블, 기도 확보를 위해 벌어진 입술 새를 비집고 들어간 굵은 튜브, 얇은 손등 피부를 가차 없이 뚫은 링거 바늘. 그 외에도 이름 모를 의료 장치들이 저 작은 몸에 빼곡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마스터는 독감에 걸려도 병원 한번 간 적 없잖아. 그렇게나 주사를 싫어하는데…….”

질끈, 아랫입술을 깨문 수현이 번뜩 눈매를 세웠다.

“말해. 지금 당장.”

다 죽여 버리겠어. 그리 덧붙인 수현의 망토 아래로 무언가 미끄러지듯 떨어져 내렸다.

꼬리. 붉은 털의 여우 꼬리였다.

잠자코 그녀를 묵시하고 있던 준환이 그제야 나직이 입을 열었다.

“관둬. 뭐 어쩔 건데? 이미 언노운 게이트는 닫혔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마스터의 회복을 기도하는 일뿐이라고.”

“대체……!”

울컥 소리친 수현이 준환의 멱살을 홱 낚아챘다. 꾹 쥔 주먹 위로 푸른 혈관이 도드라졌다.

“대체 너흰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뭘 하고 있었길래 마스터가 저 지경이 됐느냔 말이야!”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마스터의 명령으로 우린 먼저 게이트를 탈출했다.”

“뭐?”

수현이 기가 찬 듯 눈을 깜빡였다.

“마스터를 두고 먼저 줄행랑을 쳤단 말이야, 지금?”

멱살을 잡은 수현의 손을 팽개치지 않은 채, 준환은 그 상태 그대로 수현과 시선을 맞추었다.

“게이트 내 보스를 포함해서 모든 네임드를 쓰러트렸어. 클리어 메시지도 확인했고 분명 출구도 열렸지. 다만 드랍된 아이템이 하나도 없었을 뿐, 그건 정말 토벌 성공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 준환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준환은 한 글자 한 글자 토해 내듯 읊조렸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마스터가 저 지경이 될 때까지?”

수현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준환은 멱살을 잡힌 채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그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리 대신에 마스터가 혼자서 저렇게 되셨으니까.”

그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그래서,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됐던 거야.”

“…….”

“……미안하다.”

수현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그렇게 말하는 그의 두 눈이─.

“정말… 미안, 하다…….”

너무나도 붉었으니까.

스르륵, 준환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던 수현의 손이 아래로 천천히 추락했다.

“당신, 의사 아니야?”

닫힌 문 너머로 경호의 고함이 들려왔다. 수현 못지않게 흥분한 목소리였다.

준환은 흐트러진 망토를 가다듬지도 않은 채 수현에게서 조용히 등을 돌렸다.

달칵.

문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의사를 상대로 핏대를 세우는 경호가 보였다. 당장 진료실 전체를 뒤엎을 듯한 기세로 그가 핏대를 세웠다.

“뭐? 게이트에서 입은 상처는 일상생활에서 얻게 되는 부상과는 다르다? 그래서? 그럼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거야?”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저주’에 관련된 경우 현대 의술로는 대처가 어려운 면이…….”

의사는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고 있었다.

진료실 구석 벽에 등을 기댄 은하는 딱히 나서지도, 그렇다고 그곳을 벗어나지도 않은 채 구석에서 그들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사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민주가 저렇게 된 것은 의사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젠장! 당신 의사잖아.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거 아니냐고!”

누군가에게 이 통탄을 부딪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는 것이리라.

그런데 경호가 덥석 의사의 멱살을 쥐어 잡는 순간,

“그만둬.”

또각, 낯선 구두 소리가 다가왔다.

“의사라고 신은 아니야.”

멈칫한 경호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삐거덕삐거덕 고개를 돌렸다.

“……닥터 플랜트?”

대한민국의 S급 헌터 중 하나이자 가장 유명하고 뛰어난 치유 헌터.

장미의 주인, 금로제였다.

숨 막히는 정적 가운데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차분히 이어지다가 한 곳에서 우뚝 멈추었다.

탁.

로제는 의사의 멱살을 잡고 있던 경호의 손등을 가볍게 쳐 냈다.

“아무리 뛰어난 의사여도 모든 환자를 살릴 수는 없어. 헌터가 모든 일반인을 구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야.”

“…….”

“더군다나 당신도 들었을 것 아니야. 트릭스터의 부상은 저주야. 그러니 엄한 사람 잡고 화풀이하는 건 그만둬.”

로제의 말에 경호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원래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경호는 결국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으흑……!”

어린아이처럼 꺽꺽 울어 대는 경호를 뒤로한 채, 로제는 움찔대는 의사에게로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잘 알고 있겠지만 트릭스터 건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닫아야 할 거야. 특히 기자들. 한 시간도 안 돼서 공중파 뉴스 보도에 실검까지 아주 난리가 날 테니.”

“예, 명심하겠습니다.”

의사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협회에는 내가 따로 연락을 넣어 둘게. 너희는 우선 트릭스터의 치료에만 몰두하도록 해.”

“예? 하지만 저주는…….”

“최대한 악화만이라도 멈춰 보란 말이야. 장미에서도 사람을 보낼 테니까. 우선 여기 이 병동, 모조리 싹 다 비우고. 의료진과 보호자 외에는 출입 금지 시켜. 철저하게.”

그럼 나가 봐. 로제가 문을 향해 턱짓하자 의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책상에 살짝 걸터앉은 로제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그곳에 남은 인물들을 한 명씩 천천히 훑어보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실성한 듯 통곡하는 경호. 팔짱을 끼고 무거운 얼굴로 침묵을 지키는 준환. 그리고─.

“……?”

로제의 눈빛이 일순 바뀌었다.

벽에 기댄 채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한 헌터.

검은 드레스에 검은 양산. 로제의 기억에도 확실하게 남아 있었다.

“……그렇군요. 당신이.”

은하를 바라보는 로제의 시선이 알 수 없는 빛으로 물들었다.

로제가 은하를 향해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려던 찰나였다.

“당신이 마스터를 언노운 게이트에 처넣어서 그런 거야.”

바닥에 주저앉은 경호가 어느새 원망이 담긴 눈초리로 로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로제의 시선이 은하에게서 경호에게 스르륵 옮겨 갔다.

“그만해. 석경호. 어쨌든 S급 중 누군가는 언노운 게이트에 갔어야만 했어.”

보다 못한 준환이 경호를 말렸으나 그는 로제를 향해 매섭게 뜬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게 왜 하필 우리 마스터여야 했냐고!”

그 곁에서 로제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하고 싶은 말도, 해야 할 이야기도 없다는 듯이 가만히.

“닥터. 마스터를 고칠 방법은…… 전혀 없는 겁니까?”

준환이 로제에게 물었다.

경호에 비하여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는 준환이었으나, 속은 경호와 같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모든 것을 뒤엎고 어떻게든 민주를 살려 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로제의 말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았다.

“저주에 효과가 있을 법한 아이템을 닥치는 대로 조제해서 먹이는 방법밖에는. 저주의 내용은 그 저주를 건 장본인만이 알 수 있으니까.”

“구해 오겠습니다. 그게 뭐든지.”

결연한 얼굴을 한 준환을 빤히 응시하던 로제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가운 주머니를 뒤적였다.

“정말 할 수 있겠어?”

이윽고 그녀가 꺼내 든 것은 정갈한 글씨체가 빼곡한 종이 한 장이었다. 그녀가 기록한 약제 조합표인 듯했다.

“여기 이것들을 구해 오면 되는 겁니까?”

준환이 헐레벌떡 그 종이를 받아 내용을 확인했다. 하지만.

“어때? 힘들겠지?”

“…….”

툭.

준환은 절망에 젖은 얼굴로 종이를 땅에 떨어트렸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