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누나, 기다려 봐요. 이번에 보여 줄 게 엄청난 대박작이거든요.”
식사가 끝난 후.
민주는 지치지도 않고 자신의 역작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정확히 89번째 대박작이었다.
“대단하네.”
“그렇죠? 역시 누나는 말이 잘 통한다니까. 또 있어요. 잠깐만요.”
……그리고 90번째 대박작을 찾기 위해 또다시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다람쥐처럼 제조실을 빨빨 돌아다니는 민주 너머, 은하는 벽에 걸린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아마 지금쯤 제휘의 피가 바싹바싹 마르고 있을 것이다. 슬슬 돌아가는 편이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음, 내가 그걸 어디 뒀더라?”
제조실을 뒤적이는 민주가 몹시 들떠 보여서 돌아가겠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아, 유라 씨.”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길드원 수현이 은하에게 불쑥 캔 하나를 건네 왔다.
“목마르죠? 이거 맛스타라는 건데 마셔 보세요. 꽤 먹을 만하답니다.”
“아, 괜찮은데요.”
“우리 마스터를 상대하느라 고생하시는데 이거라도 챙겨 드려야죠.”
수현은 찡긋 윙크를 하며 은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경호 녀석 몰래 훔쳐 왔어요. 아, 석경호요. 군수 담당인데 생긴 것만큼 쪼잔한 놈이거든요.”
“……고마워요.”
은하는 그녀가 건넨 캔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옆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탁자 위에는 이미 음료나 과자들이 수두룩했다. 모두 지나가던 군단 패밀리들이 하나씩 건넨 것들이었다.
조금 곤란한 눈빛으로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준환이 넉살 좋게 웃으며 다가왔다.
“하하. 남으면 다 가지고 돌아가셔도 됩니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네요.”
은하가 차분하게 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민주는 어디 갔죠?”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다음 컬렉션을 자랑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는데.
“아. 급한 연락을 받고 잠시 상층에 올라가셨습니다. 금방 돌아오실 겁니다.”
준환은 그리 말하며 자연스럽게 은하 곁에 앉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부품, 피규어, 그리고 정체 모를 각종 장치들로 너저분한 제조실 가운데 나란히 앉아 건빵 봉투를 뜯었다.
건빵의 맛은 은하의 기억 속 그대로였다. 목이 턱 막힐 것처럼 뻑뻑한 식감. 그럼에도 꼭꼭 씹다 보면 어느새 고소하면서도 달큼한 맛이 올라오는 점이 말이다.
바스락─
곁에서 봉지 소리가 들려왔다.
은하를 따라 건빵 봉지를 뜯은 준환이 내용물을 먹지는 않고 별사탕을 하나하나 솎아 내고 있었다.
“요즘 건빵은 별사탕이 별개 포장되어 나온다던데, 업체를 바꿔야 하나.”
투덜대던 준환은 미리 준비한 작은 유리병에 별사탕을 따로 담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지? 빤히 그를 주시하고 있자,
“아.”
시선을 느낀 준환이 머쓱하게 웃었다.
“저희 마스터는 건빵보다 이 별사탕을 더 좋아하거든요.”
“아…… 네에.”
“거의 다 찾은 것 같습니다.”
준환은 다시 건빵 봉투를 유심히 살피며 마지막 별사탕 한 알까지 찾아냈다.
그런 준환을, 은하는 곁에서 조금 신기한 눈빛으로 관찰했다.
“매번 그렇게 따로 챙겨 두나요?”
“네, 뭐. 어려운 일도 아니고요.”
준환은 쑥스러운 듯 콧잔등을 비비며 부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참 오랜만인 것 같네요. 이곳에, 저희 7명 외에 다른 사람이 본부에 방문한 것 말입니다.”
“그런가요?”
은하는 모른 척 그의 화제 전환에 응해 주었다.
“아마 3년…… 아니, 4년도 넘은 것 같아요. 마스터를 처음 만난 것도 그쯤이었죠. 그때 마스터의 나이는 고작 11살이었습니다.”
……11살. 은하가 시선을 들어 천장을 응시했다. 11살이라면 초등학교 4학년인가? 까마득한 시절이었다.
다시 준환에게로 시선을 돌렸을 때, 준환은 어쩐지 가라앉은 얼굴로 유리병 속 별사탕을 응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안타깝더라고요. 원래라면 캐릭터가 그려진 책가방을 메고 학교를 다닐 초등학생이, S급 판정을 받고 작은 어깨에 감당하지 못할 짐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요.”
“…….”
“가족이 반대하지는 않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제가 처음 헌터가 되겠다고 했을 때,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저희 어머니께서는 식음을 전폐하고 결사반대를 하셨거든요.”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그리 덧붙이며 준환이 낮게 웃었다.
“그런데 마스터께서는 그냥 짧게 답하시더군요.”
준환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 거 없다, 고요.”
“…….”
입술을 분명 곡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가라앉아 있었다. 은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제가 되어 주자고 생각했습니다. 이 소년의 새로운 가족이요. 뭐 거창한 일이겠습니까. 매일 같이 밥을 먹고 슬픈 일도 기쁜 일도 함께 나누다 보면 그게 가족이겠지요.”
문득 그의 눈매가 둥글게 휘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패밀리라 부릅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은하는 준환에게 대답하는 대신 탁자 위에 수두룩하게 쌓인 간식 더미를 가만히 응시했다.
‘여기 이 누나도 오늘부터 우리 패밀리야.’
“…….”
은하는 쥐고 있던 음료를 천천히 입에 가져갔다.
곁에서는 준환이 별사탕으로 가득 채운 유리병을 주머니 속에 소중히 챙기고 있었다.
***
급한 연락을 받고 상층으로 올라갔다던 민주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약 30분 후였다.
“아, 짜증 나.”
투덜투덜하며 지하 제조실로 돌아온 민주는 어쩐지 굉장히 기분이 저조해 보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마스터?”
준환이 민주의 눈치를 살피며 다가갔다.
“몰라. 포항 가래.”
“포항이요?”
준환이 고개를 갸웃했다. 갑작스레 민주에게 호출된 다른 길드원들도 마찬가지로 의아한 표정이었다.
“지금 당장 말입니까?”
“어.”
뺨을 뾰로통하게 부풀린 민주가 탐탁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은하에게 장난감들을 미처 다 선보이지 못했는데. 약속했던 피규어 조립은 시작조차 하지 못한 상황.
평소 민주에게 신상 군 제품들을 선물해 주는 로제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벌써 거절했을 테다.
“……금방 다녀오지 뭐.”
민주는 얼마 전 로제가 보내온 독일제 미니어처를 꺼내 보더니 푹 한숨을 쉬었다.
“여기는 한 명만 지키고, 다섯 명은 날 따라와.”
“네?”
준환이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다섯 명씩이나? 도대체 포항에 무슨 볼일이 있기에.
그러나 민주는 자세한 상황 설명을 생략한 채 은하를 향해 빙글 몸을 돌렸다.
“누나, 금방 다녀올 테니까 며칠 뒤에 또 놀러 오면 안 돼요? 음, 토요일! 토요일이 좋겠어요!”
은하는 제게 매달린 채 눈을 반짝이는 민주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자 다른 길드원들도 삼삼오오 모여 은하 곁에 섰다.
“아, 좋아요! 그럼 커피 머핀을 준비하겠습니다. 건푸로스트 먹는 법도 그때 알려 드리면 되겠어요.”
“오오, 괜찮은데?”
“토요일이 기대되네요!”
그 사이에 우두커니 선 은하는 멋쩍은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응, 토요일.”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인 은하가 천천히 민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드레스 소매 자락을 뒤적여 가느다란 소원 팔찌를 꺼내었다.
“그리고 이거.”
줄곧 타이밍을 잡지 못했던 까닭에 이제야 건네게 된 선물이었다.
“선물이야. 소원 팔찌.”
잠시 손목 줘 봐. 은하는 민주의 왼쪽 팔목에 직접 그것을 매달아 주었다.
“……비싼 건 아니지만, 이걸 가지고 있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어.”
은하의 말을 들은 건지 듣지 못한 건지, 민주는 신기한 듯 오렌지색 소원 팔찌를 빤히 응시했다.
도토리같이 동글동글한 눈매에 일순 여러 감정이 깃드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민주는 부모님에게도 이런 것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한참 그것을 들여다보던 민주의 입가에 배시시 웃음꽃이 만개했다.
“이거, 누나랑 똑같은 거다. 맞죠?”
헤헤, 기분 좋은 듯이 웃은 민주가 오른손으로 살며시 오렌지색 소원 팔찌를 매만졌다.
“고마워요, 누나. 절대 안 잃어버릴게요.”
그 후 민주는 토요일 꼭 다시 보자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한 뒤에야 본부를 나섰다.
***
경북 포항시.
비학산 근처 한 저수지에 도착한 민주는 눈앞의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이게 뭐야?”
고오오오─
수면 위로 커다란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다. 한 개가 아니었다. 저수지 전체에 자리 잡은 수십 개의 소용돌이는 불길한 기운을 내뿜으며 빙글빙글 돌아갔다.
“아씨, 나 환 공포증 있는데.”
뒤따라온 길드원 경호가 투덜댔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부길드장 준환 역시 걸음을 멈추고 일렁이는 저수지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닥터 플랜트의 말은 사실이었나 보군요.”
셀 수 없을 만큼의 게이트를 토벌한 그들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전조 현상.’
이곳에 곧 게이트가 나타난다.
민주를 포함한 5명의 헌터들은 저마다 장비를 꺼내 들었다.
“아무래도 큰 싸움이 될 것 같습니다.”
민주가 직접 만들어 준 무기 ‘뾰로롱 나이프’를 허리춤에 맨 준환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지원군을 요청할까요? 인연 길드의 본부가 대구였죠, 아마? 지금 연락하면 금방 도착할 텐데요.”
“뭐 하러? 여기 이미 5만 대군이 있는데.”
톡, 톡, 톡…….
민주는 짧은 손가락으로 분주하게 휴대전화 액정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