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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99 흑염의 프린세스 (68)화 (68/306)

#68

웨더와 시우의 전투를 지켜보던 귀훈은 슬그머니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시우의 말은 거짓이었다.

얼음과 물 양쪽을 다 다룰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으나 거기에는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물의 온도를 내리는 것은 가능하지만 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 하지만.

‘그런 것까지 적에게 말할 필요는 없지.’

만족스러웠다.

생각한 것 그 이상으로.

물론 이것은 목숨을 건 전투가 아니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커맨더와 웨더 두 헌터를 시우가 홀로 제압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휠체어에 앉은 귀훈은 스르륵 시선만 돌려 제 옆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스냅백을 뒤로 쓰고 웃통을 입는 둥 마는 둥 다 풀어 헤친 단추. 언뜻 보이는 복근이 꽤나 다부진 그는 여름 바다라도 다녀온 듯 피부가 새카맸다.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만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모습이 과연 주변에서 괴짜로 오해받을 만도 했다.

그러나 그는 사실 수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남자의 정체는 귀훈이 초빙한 한국의 A급 헌터. 세계 랭킹은 100위 밖, 그러나 한국 A급 헌터 중 S급 승급이 가장 유력하다는 평이 자자한 ‘엔지니어’ 표의혁이었다.

커맨더와 웨더.

두 헌터를 상대했으니 남은 건 이제 의혁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는 선글라스 너머로 물끄러미 시우를 응시할 뿐,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백야. 죄송하게 됐습니다만 이 결투, 전 빠져야겠습니다.”

불쑥 의혁이 입을 열었다.

시우와 귀훈이 동시에 미간을 좁혔다.

“그게 무슨 소리지?”

시우가 와륵 인상을 구기며 의혁에게 다가왔다. 의혁은 그런 시우를 삐딱하게 바라보다가 불편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너, 서 있는 게 고작인 것 같으니까.”

“지금 날 배려라도 하는 건가?”

“아니. 내 도덕성의 문제야.”

“난 싸울 수 있다.”

“……그래?”

의혁이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살짝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콰직─!!

시우에게 번쩍 벼락이 떨어졌다.

그것은 상처투성이에 체력이 거의 바닥난 시우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속도였다.

“큭……!”

쿨럭, 피를 토한 시우가 제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의혁은 시선만 떨구어 그런 시우를 무심히 응시했다.

“미안하지만 한 대 툭 치는 걸로 끝날 것 같은 녀석을 상대로 전투 따위를 하고 싶진 않은걸.”

“…….”

바닥에 엎어진 시우가 분한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표면이 모래자갈 위를 거세게 긁으며 핏자국을 내었다.

아무래도 상대는 시우와 같은 자연계, 그중에서도 전기를 다루는 헌터인 듯했다.

의혁이 목뒤를 느릿하게 쓸었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파지직, 퍼런 스파크가 일어났다.

“……당신 입장에서도 상성이 너무 좋지 않잖아?”

의혁은 A급 헌터고 시우는 S급 헌터. 분명 두 등급 사이의 격차는 엄청났다.

하지만 현재 컨디션과 각자 고유 능력의 상성, 그리고 현장에서의 경험치를 따져 보자면 둘 싸움에선 시우보다 의혁이 훨씬 우세했다.

“굳이 해야겠어?”

의혁이 내키지 않는 듯 말했다.

제아무리 실전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보아라. 시우의 상태는 이미 걸레짝이었다. 여기서 만일 의혁과 또 한 번의 전투를 치른다면 아마도 이 청년은 중상을 면치 못하리라.

“이미 당신은 저 두 S급 헌터를 상대로 힘을 증명해 보였어. 나 같은 A급 헌터와 겨루지 않아도 충분한 거 아닌가 싶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백야. 의혁이 귀훈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 순간, 잠자코 있는 듯했던 시우가 휘청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글라스 너머 의혁이 눈이 사뭇 커졌다.

“상성이고 나발이고 그딴 건 상관없어.”

비틀비틀 제자리에 선 시우가 시퍼런 눈매를 세웠다.

난 너와 싸워야겠다.

그래서 이 빌어먹을 증명을 끝끝내 해 보이겠어.

작게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새하얀 입김이 연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

“하아…… 하아…….”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걸어가던 시우가 근처 벤치에 쓰러지듯 걸터앉았다.

등을 기대고 목을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트러진 머리 사이로 초점을 잃은 푸른 홍채가 드러났다. 시우는 문득 양손을 들어 제 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열 손가락 중 한 손가락도 성한 곳이 없었다. 고유 능력을 최대치 이상 무리하여 사용한 반동으로 양손에는 이미 감각이 없었다. 마치 동상에 걸린 것처럼.

시우가 느릿느릿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오른쪽 앞주머니에서 꺼내 든 것은 엉망으로 구겨진 연고였다.

뚜껑을 열고자 했지만 맘처럼 손이 움직여 주지 않았다. 젠장, 낮게 욕설을 내뱉은 시우가 이로 뚜껑을 깨물어 억지로 비틀다시피 해서 기어코 그것을 열었다.

꾸욱…….

손등, 손바닥, 팔목, 팔꿈치. 곳곳에 보이는 상처마다 조금씩 연고를 짜내어 갔다.

“……아.”

그러다가 툭, 연고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벤치 아래로 볼품없이 추락한 연고. 시우는 물끄러미 그것을 응시했다.

이미 늦은 시각, 주변을 활보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 가로등 불빛만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한참을 가만히 굳어 있던 시우는 연고를 줍지 않고 상체를 세웠다.

그리고 그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은은한 쓰르라미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밤바람에 가로수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 어딘가 가지에 앉아 있던 새가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 따위를 듣고 있자니 귀가 먹먹해졌다. 그래서일까.

‘시우 도련님. 여기 계셨습니까.’

괜한 환청을 들은 것도 같았다.

바보 같은 짓인 줄 알면서도 슬쩍 고개를 들어 보았다.

역시 그곳에는 아무도──.

“……선배?”

까만 머리카락에 그보다 더 까만 눈동자. 은하였다.

시우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 은하는 벤치 앞에 우두커니 서서 시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몇 번이고 눈꺼풀을 감았다 들었다 반복하던 시우가 이내 와륵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서 뭘 하고 계신 겁니까?”

단단히 입매를 굳힌 채 가능한 한 날카롭게 가시를 세웠다. 그러나 은하는 여전한 무표정으로 담담히 입을 열었다.

“널 찾고 있었어. 연락이 안 되길래.”

새까만 눈동자가 스르륵 시우의 얼굴을 훑었다.

“……또 넘어지기라도 했나 봐?”

시우는 그런 은하의 말을 들은 척 않고 반대편으로 시선을 홱 돌렸다.

“무슨 볼일이시죠? 계약 파기 통보는 분명히 드렸을 텐데요.”

“알아.”

“혹시 이제 와서 아쉬워지신 겁니까? 돈이 부족했던 건가요?”

“그런 거 아니야.”

은하가 나지막이 부정했다. 담백하고 초연한 목소리. 그 반면 시우는 격양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요? 다시 제 앞에 나타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미안하지만 이미 계약이 끝난 이상 선배와 얼굴을 마주할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요. 앞으로도 쭉, 말입니다.”

그러길 바랐다.

그 방법밖에 없으니까.

안 지 오래된 사이는 아니었지만 시우는 은하가 싫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도 일석처럼─.

“그냥.”

은하가 나지막이 입술을 달싹였다.

“밥이나 먹으러 갈까 해서.”

시우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은하를 바라보았다.

멍하게 벌어진 입술. 어쩐지 조금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아니,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그는 그런 묘한 표정으로 은하를 빤히 응시할 뿐,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은하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앞으로 볼일이 없을 테니까.”

“…….”

“그동안 신세도 많이 졌고. 따로 해 줄 수 있는 건 없지만 마지막으로 밥 한 끼 정도는 내가 사고 싶어서.”

“…….”

푸른 시선은 한참 동안 은하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열렸다 닫혔다 반복하던 입술 사이로는,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긍정의 뜻도, 그렇다고 부정의 뜻도 말이다.

“…….”

조금 뒤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시우가 떨떠름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막 주문을 끝낸 은하가 힐끔 시우를 바라보았다.

“국밥집으로 갈 줄 알았어? 거기, 이 시간까지 안 열어.”

“…….”

“왜? 포장마차 싫어해?”

“아뇨.”

시우가 옅게 고개를 저었다.

곧이어 두 사람의 테이블 위로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다. 계란말이, 골뱅이무침, 두부김치……. 끊임없이 올라오는 음식들 가운데 시우가 한곳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입에 맞았으면 좋겠네. 시간이 덜 늦었더라면 좀 더 비싼 음식을 대접할 생각이었는데.”

잠시 망설이던 시우는 수저를 쥔 손을 더듬더듬 뻗었다. 얇게 썰린 녹색과 적색의 고추가 둥둥 뜬, 맑은 국물.

‘이런, 홍합탕에도 청양고추가 많이 들어가 있네요. 음, 이럴 줄 알았으면 맵지 않은 걸 주문할 걸 그랬습니다.’

늦은 시간에도 시끌벅적한 주변.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린 주홍빛 조명. 사방에 가득한 숯불 연기에 깊게 밴 술 내음. 하얀 주제에 더럽게도 매운 국물.

모든 것이 기억 속 그대로였다.

“…….”

말없이 국물을 한 숟갈 넘긴 시우가 입을 닫았다. 맞은편에서 맥주병을 따던 은하가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국물이…….”

툭. 그가 수저를 내려 두었다.

솨아아─

바깥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국물이, 조금 맵네요.”

시우를 물끄러미 주시하던 은하가 테이블 구석에서 냅킨을 몇 장 뽑아 그의 앞에 두었다.

“고추가 많이 들어가 있으니까.”

“…….”

“…….”

시끌벅적한 주변과는 어울리지 않는 적막이 둘 사이에 흘렀다.

투둑투둑.

포장마차 천막을 두들기는 빗소리. 그 가운데 문득 시우가 입을 열었다.

“선배.”

탁 하고 테이블 위에 놓인, 볼품없이 구겨진 연고.

“돌려드리겠습니다.”

“…….”

은하의 새까만 시선이 연고에 고정되었다. 잠깐의 침묵 후, 은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왜?”

물음은 짧았다.

그러나 대답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런 건, 나보다는 선배가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으니까.”

밤이 깊어 갔다.

둘 사이에 놓인 버너 위로, 홍합탕이 담긴 냄비가 보글보글 끓었다.

뿌연 수증기 탓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시우는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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