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67)화 (67/306)

#67

텅 빈 복도를 걷던 시우가 걸음을 멈추었다.

811호실. 이유라.

정돈이 끝났을 터인데 아직 팻말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시우는 쥐고 있던 주먹을 스르륵 펼쳐 보았다. 손바닥 위에는 꾸깃꾸깃 구겨진 연고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휘이이잉…….

어디선가 차가운 밤공기가 흘러들어 온다. 달빛을 싣고 다가온 바람이 훅, 뺨에 앉았다.

‘도련님이 싫은 걸 싫다고 표현하실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할아범.

그건 정말이었어?

정말 그래서 다행이었던 걸까.

이제는 잘 모르겠다. 싫은 걸 싫다고 표현하는 게 그저 어린 아집이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아집이 할아범을, 제휘를, 은하를, 벼랑 끝에 몰고 갔던 것이 아니었을까.

사실은 고집 따위 부리지 않고 수긍하면서 살아가야만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사실은 모두 내 탓이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스스로에게 던지는 의문. 그리고 끊임없는 의심.

‘보호? 네가 그녀를 보호하고 있다고?’

귓등을 스치는 비웃음. 손바닥 위 연고를 감싸 쥔 시우가 눈을 감았다.

나는 어디에 숨고자 했는가.

누구를 지키고자 했는가.

그저 누군가의 등 뒤에 숨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롯이 ‘나’를 지키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어리석게도.

‘이제는.’

꾹, 다시 주먹을 말아 쥔 시우는 서서히 감았던 눈을 떴다.

푸른 눈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

늑대 소유 서울 야외 훈련장. PM 9:52

“벌써 끝난 건가?”

싱가폴 출신 A+급 헌터, 월드 랭킹 72위 ‘커맨더(Commander)’는 훈련장 가운데서 싱겁게 중얼거렸다.

그의 능력은 소환 및 조작. 인간 형태의 갑옷 병사를 불러내어 전투하는 헌터였다.

그가 동시에 소환할 수 있는 갑옷 병사는 최대 일천. 소환 능력을 가진 헌터들 중 가장 많은 수였다. 그 덕분에 S급 승급을 눈앞에 두고 있는 헌터기도 했다.

이런 곳에서 최대치를 소환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결론은 그의 승리였다.

한국 최고 길드 늑대가 비밀리에 키우고 있는 인재라더니, 고작 이 정도라니 조금 김이 새기도 했다.

“이것도 이제 필요 없겠군.”

커맨더는 왼쪽 가슴에 부착해 두었던 배지에 손을 가져갔다. 늑대에서 제공한 것으로 통역 기능이 달린 편리한 물건이었으나, 상대가 쓰러졌다면 더는 쓸모가 없었다.

그런데.

배지를 떼어 내려던 커맨더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챙─!

무언가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챙, 채쟁, 챙, 챙─!

근원지로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정체불명의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곧 커맨더는 깨달았다.

얼어붙고 있었다.

자신이 소환한 일천 명의 갑옷 병사들이 모조리, 차례로.

“──.”

쨍그랑!

얼어 버린 갑옷 병사가 바닥으로 쓰러지며 사기그릇처럼 산산조각 나 버렸다.

넋이 나간 얼굴로 그곳을 바라보던 도중, 쓰러지는 갑옷 병사들 사이에서 누군가 스르륵 일어났다.

“…….”

하늘에 드리운 새하얀 광휘의 장막. 그 아래로 천천히 길어지는 백색의 그림자.

백랑(白狼).

한기를 머금은 늑대의 하울링이 귓등을 스친다. 환청, 어쩌면 영창.

시우가 바닥에 대고 있던 손바닥을 거두자 표면에서 후드득, 하얀 얼음 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말도 안 돼.

지면을 통해 이 많은 개체들을 한 번에 얼려 버렸다는 소리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커맨더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또 한 가지 사실에 대해 깨달았다. 자신이 뒷걸음질 치고 있는 이 길조차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미끄러운 빙판길이 되어 있다는 것을.

스사아아…….

온몸을 감싸는 한기.

저벅, 저벅─

시우가 그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똑같은 거리만큼 커맨더가 뒤로 물러났다.

‘젠장.’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진 커맨더가 질끈 어금니를 무는 순간,

쿠구구구구─!

땅이 거세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갑옷 병사 하나를 다시금 소환한 것이었다.

끼기긱, 끼기기기긱…….

열 개의 개체를 합한 것만큼이나 거대한 크기의 병사가 검은 연기와 함께 나타났다.

시우에게 보이지 않게끔 손을 뒤로 숨긴 커맨더가, 휘익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휘익!

거대 병사가 커맨더와 비슷한 움직임으로 한 손에 시우를 낚아챘다. 마치 손으로 파리를 잡듯이 말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채애앵─!

갑옷 병사의 손등 위에 날카로운 얼음 가시가 무수히 돋아났다. 3초도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주먹 속에 갇히는 찰나 온몸을 재빠르게 얼음으로 감싼 것이었다. 순간적인 판단력과 그것을 따라올 만한 속력이, 그에게는 있었다.

“……하.”

커맨더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제야 늑대의 교묘한 거짓말을 눈치챈 듯했다.

늑대에서 훈련 중인 A급 헌터는 무슨. A급에 오랜 시간 머무른 커맨더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눈앞의 이 젊은 청년은 결코 A급이 아니었다.

비밀리에 키운 인간 병기. 그래, 차라리 그 말이 더 신빙성 있겠다. 모의전(模擬戰)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녀석과 싸움을 붙이다니. 마치 실험 쥐가 된 기분이었다.

저벅.

시우가 다시 한 걸음 커맨더에게 다가왔다. 커맨더는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그가 거대 갑옷 병사의 주먹을 꿰뚫은 그 순간 이미 결판은 났다.

시우는 그의 오른쪽 팔목을 잡았다.

스스스…….

맞닿은 손바닥으로부터 새하얀 얼음이 피어났다. 그렇게 온몸을 뒤덮을 것만 같던 얼음은 어깻죽지쯤에서 뚝 멎었다.

만일 이것이 모의전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커맨더는 꼼짝없이 뇌까지 꽁꽁 얼어 버렸을 테다.

“다음은 누구지?”

시우는 커맨더에게서 손을 떼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랑의 명백한 승리였다.

“생각보다 꽤 재밌는 구경을 했어.”

짝짝짝, 박수 소리와 함께 나타난 새로운 인영. 커맨더와 같은 싱가폴 출신의 S급 헌터이자 월드 랭킹 56위 ‘웨더(Weather)’였다.

실전 경험이 없는 A급 헌터를 상대로 모의전을 한다는 것은 S급인 그에게는 꽤 지루한 이야기였다. 응당한 보상이 아니었더라면 거절할 만큼의.

그러나 방금 전 커맨더와 시우의 전투를 지켜보다가 흥미가 돋았다.

커맨더와 같은 생각이었다. 상대가 A급 헌터 따위가 아니라는 것에 전 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한국 헌터 협회의 측정기가 아주 고장이 났거나.

“한국에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그리 중얼거린 웨더는 검지를 허공에 빙글빙글 돌렸다. 그러자 어디선가 불어온 모래바람이 그가 손가락을 휘두르는 방향으로 훈련장을 휘감는 듯했다.

웨더는 그 이명대로 날씨를 조종하는 능력을 가진 헌터였다.

사실 한 국가나 지역을 대상으로 날씨를 조종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이곳 야외 훈련장 정도의 크기는 충분히 그의 영역으로 설정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설정은 이제 막 모두 끝났다.

이제 이곳은 물기 하나 없는 사막으로 바뀔 예정이었다. 제한 시간은 10분. 하지만 충분했다.

웨더는 눈앞의 청년, 시우를 빤히 응시했다.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다지만 사실 방금 전투로 많이 지친 상태임이 분명했다.

일천이나 되는 갑옷 병사를, 더구나 이 정도 넓은 평야를 삽시간에 얼려 버리는 것은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을 터.

웨더가 팔짱을 낀 채로 살짝 검지만 들어 휙휙 지휘하듯 움직였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을 따라 거대한 모래 폭풍이 일었다. 바람이 거셀 뿐 죽지 않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그런데.

“……?”

휘익!

재빠른 속도로 모든 공격을 회피하는 시우를 보며, 웨더는 사실 조금 놀랐다.

아직 저만큼의 체력이 남아 있었던 걸까. 고유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오로지 신체 능력만으로 제 영역에서 뛰어다니고 있는 것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사막화된 훈련장에는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만큼 거센 모래바람이 일고 있었고, 타오르는 듯한 열기 탓에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턱턱 막힐 텐데.

그런데도 저자는 괴로운 기색 하나 없이 제게 날아드는 모든 공격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회피‘만’ 할 뿐이었다.

피슈우우우…….

시우의 오른쪽에서 날아든 물줄기는 웨더에게 닿기도 전에 그대로 수증기화 되어 증발해 버렸다.

이러한 열기 속에서 얼음을 소환하는 것도 단연 쉬운 일이 아닐 테다.

‘하지만 칭찬할 만한 재능이야.’

이 정도라면 늑대에서 꽁꽁 숨기고 싶어 할 만도 했다. 어느 길드든 조커 카드 한 장쯤은 준비해 두고 싶을 테니 말이다.

만일 국적이 같았더라면 당장 제 밑으로 데리고 오고 싶을 정도였다.

휘오오오─!

거대한 모래 소용돌이가 하늘을 뚫을 기세로 휘몰아쳤다. 가까스로 피하는 것에 성공했으나 다음 공격이 쉴 새 없이 날아들었다.

퍼어어억─!!!

모래 해일이 단숨에 시우를 덮쳤다. 이번에는 미처 피하지 못했다.

“크읏……!”

반사적으로 얼음 방벽을 만들어 피해를 최소화하긴 했으나 뜨거운 모래에 닿자마자 얼음이 순식간에 녹아 버렸다.

물리적 피해만 최소화했을 뿐, 시우는 꼼짝없이 모래에 뒤덮여 버렸다.

그렇다. 얼음과 물을 다루는 시우에게 있어서 이곳의 환경은 극악의 상성이었던 것.

촤악!

몸을 옭아매는 모래를 거세게 쳐 낸 시우가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 버린 푸른 눈이 주변을 재빨리 훑었다.

‘대기 중의 수분을 이용할 수는 있겠지만…….’

만일 그렇게 한다면 영역 내의 공기가 바싹 말라 버릴 것이다. 즉, 그 방법을 쓰는 순간 다음 기회는 없다는 소리였다.

그래서는 위험성이 너무 크다.

이미 시우는 일천의 갑옷 병사를 상대하는 동안 체력을 많이 소진한 상태였다.

게다가 웨더를 쓰러트리더라도 아직 한 명의 헌터가 더 남아 있다. 마지막 전투까지 최대한 체력을 보존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생각보다 오래 버티네. 사실 이보다 더 강도를 높일 수는 있지만 나도 그러고 싶지는 않아. 살인자라는 수식어는 원하지 않아서.”

이건 모의전이잖아? 멀리서 웨더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시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우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등 뒤로 또다시 모래 해일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시우를 덮쳐 버리기 직전.

파앗!

시우가 사라졌다.

아니, 정확하게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도약한 것이었다.

“……!”

시우를 지켜보고 있던 웨더조차 눈을 커다랗게 뜰 속도였다.

하지만 결코 위협적일 수는 없었다. 이 환경 속에서 물과 얼음을 다루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테니까.

덥석!

어느샌가 웨더 코앞까지 다가온 시우가 그의 오른쪽 팔목을 움켜쥐었다. 아까 커맨더에게 그러했듯, 같은 자세였다.

“내 팔도 얼려 버릴 생각인가?”

“…….”

“해 보지, 왜. 할 수 있다면 말이야.”

웨더가 태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시우는 웨더의 팔목을 세게 쥘 뿐 얼음을 만들어 내진 못하고 있었다.

시우의 가슴팍이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검푸른 머리카락은 모래알에 뒤덮여 있었고 찢어진 옷가지 사이로 보이는 얕지 않은 상처들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팔목을 움켜쥐고 있는 정도가, 지금 녀석에겐 고작이겠지.’

웨더는 승리를 확신했다.

만일 이 경기에서 승리한다면, 마에스트로가 약속한 유물급 아이템 ‘침묵의 시계’는 제 것이 될 테다.

“자, 팔목을 잡았으니 이제 다음은? 어떻게 할 거지? 보다시피 여긴 물 한 방울 없는데.”

웨더가 물었다.

그의 팔목을 잡은 시우는 미동도 없었다. 다만,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신체의 70%는 수분이라는 거, 몰라?”

“……뭐?”

“난 네 몸에 흐르는 모든 액체를 순식간에 역류시킬 수 있어. 단순히 온도를 높일 수도 있지.”

웨더는 팔목이 잡힌 채로 멈칫 굳었다.

그리고 불현듯 깨달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흐트러져 있던 시우의 호흡이 벌써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다는 것을. 정말 말도 되지 않지만, 마치 숨이 가쁜 척을 하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다.

“한 가지 더 알려 주자면 급속도로 뜨거워진 물은 엄청난 속도로 팽창해.”

이 녀석, 지금 무슨 말을…….

굳어 버린 웨더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반면 시우의 눈매는 점점 곡선으로 휘어 갔다.

달빛을 등지고 선 시우는 슬쩍 상체를 굽혀 웨더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보여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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