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어제 이후 시우는 발걸음을 뚝 끊어 버렸다.
아무래도 갑작스런 이야기였던 만큼 그로서도 생각할 것이 많은 거겠지.
은하는 무릎에 올려 둔 책을 펼쳤다. 지루해할 은하를 배려하여 입원 첫날 제휘가 가져다준 것이었다.
팔랑─
무심히 책장을 넘겨 가던 손이 어느 순간 멈칫 굳었다.
‘그러고 보니.’
만일 시우와의 계약을 파기한다면 박 매니저와도 이별이겠구나.
그와는 꽤 정이 들었다. 쓸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박 매니저를 포함하여 지금 거주 중인 오피스텔, 휴대전화, 노트북 그 모두가 시우에게 제공받은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즉, 결론만 말하면 이랬다.
‘빈털터리가 되겠네.’
현대에서 살아가기 위해 지금 은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역시 돈이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려거든 역시나 돈이 필요했다.
은하는 자신의 두 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 두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불멸에 들어오지 않겠나?’
……유환. 그의 제안도 염두에 두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책 한 권을 거의 다 읽어 갈 때쯤,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선배, 접니다.”
시우의 목소리였다.
은하는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런데.
“……무슨 일 있어?”
은하는 문고리를 쥔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반면 시우는 태연하게 말문을 열었다.
“계약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왔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은하의 새까만 눈동자가 빤히 시우를 관찰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먼지 묻은 뺨은 물론이거니와 입고 있는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피까지 묻어 있었다.
“꼴이 왜 그래?”
“아…… 좀, 넘어졌습니다.”
“S급이?”
“S급도 가끔 넘어지곤 합니다.”
시우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은하를 슥 지나쳐 병실 내부에 들어섰다. 그리고 창틀에 살짝 기대앉은 채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건 그렇고 선배, 계약 파기에 대한 이야기 말입니다.”
금방 화제를 전환하는 것을 보아하니 시우는 아무래도 자세한 사정을 설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굳이 캐묻는 것도 좋지 않겠지. 은하는 시우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갑작스러웠다는 건 나도 동의해. 급한 건 아니니 천천히 생각해도─.”
“아뇨.”
은하의 말꼬리를 단호히 잘라 버린 시우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우는 오늘따라 어딘가 지쳐 보이는 푸른 눈동자를 두어 번 깜빡이더니 말했다.
“선배 말이 맞습니다. 계약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죠.”
이번에는 은하가 눈을 깜빡였다. 기묘한 얼굴을 한 그녀를 바라보며 시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선배 쪽이잖아요.”
시우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시우는 계약 파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었는데…….
“생각해 보니 이쪽도 손해가 큰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룻밤 사이에 마음이 확 바뀌기라도 한 것일까? 급작스레 달라진 태도가 의아하게 느껴졌다.
“입원비 지원도 이 이상은 힘듭니다. 이래 봬도 이 병원, 진료비나 입원비가 비싸서요.”
창틀에 걸터앉은 시우는 스르륵 팔짱을 끼며 덧붙였다.
높낮이 없이 차갑기만 한 목소리.
기분 탓일까.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미끄러지는 바람에서마저 옅은 한기가 느껴졌다.
사르륵─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같은 방향으로 휘날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늘 그렇듯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깊고 검은 눈동자.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은하는 놀라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시우의 태도가 하루 만에 돌변했으니 말이다.
‘흔들리지 마.’
스스로에게 되뇐 시우는 팔짱을 낀 두 팔이 혹여나 풀어질까 단단히 힘을 주었다.
이마가 찢어져 피를 흘리던 제휘의 모습이 뇌리를 스친다. 다행히 큰 상처는 없었지만 만일 자신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죽었을 거야.’
시우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귀훈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가 은하에게까지 손을 뻗는 것은 시간문제일 테다.
게다가 이곳은 늑대가 운영하는 병원.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일을 실행할 수 있을 것.
“죄송한 이야기지만 내일 당장 퇴원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시우는 팔짱을 낀 상태로 덤덤하게 말했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 후 돌아온, 마찬가지로 덤덤한 대답.
“……알았어.”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이쪽이니 이제 와서 도로 주워 담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일 바로 나갈게.”
“…….”
그런데 이번에는 시우가 입을 다물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푸른 시선이 은하에게 닿았다가 머지않아 도로 멀어졌다.
“박 매니저는 사정이 있어 당분간 근무가 불가능합니다. 그 대신 내일 아침엔 택시를 불러 두도록 하죠.”
거기까지 말한 시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대로 병실을 나가 버리려는 그를, 은하가 뒤에서 붙잡았다.
“잠깐.”
시우가 뒤돌아보기도 전에 은하가 먼저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이거 받아.”
시우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가 내민 물건을 건네받았다.
“뭐죠, 이건?”
“연고야.”
그건 보면 안다. 시우는 기묘한 눈빛으로 제 손바닥 위 오도카니 놓인 연고를 응시했다.
“난 쓸 일이 없어서.”
시우 역시 연고 따위 그다지 쓸 일은 없었다. 여전히 연고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시우를 향해, 은하가 다시 한번 짧게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고마웠어.”
“…….”
연고에게서 시선을 뗀 시우는 은하를 바라보았다. 은하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얼굴이었다.
제자리에 서서 침묵하던 시우는 이내 천천히 다시 등을 돌렸다. 어쩐지 그 움직임이 상당히 느릿했다.
문고리에 손을 올린 시우는 다시 은하 쪽으로 힐끔 시선을 던졌다.
할 말이 더 남았냐는 듯 자신을 응시하는 새까만 눈동자. 그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던 시우는 결국 아무 말 없이 문을 닫고 그곳을 벗어났다.
***
다음 날.
퇴원 절차를 마칠 때까지 시우는 은하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제휘도 마찬가지였다. 시우의 말대로 병원 앞에 미리 택시가 대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택시를 탄 은하는 곧장 오피스텔로 향했다.
‘이제 이곳에 오는 것도 마지막이려나.’
꽤나 쾌적한 주거 공간이었는데 말이다.
은하는 새삼스런 기분으로 호화찬란한 로비를 지나 17층으로 향했다.
1702호.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현대에서 처음으로 가진 자택이 바로 이곳이었다.
‘당장 내일부터는 어떡하지.’
수익은 둘째 치고 가사와 잡일을 도맡아 주던 매니저도, 편히 누워 잘 수 있는 집조차도 사라질 판국이었다.
유환의 제안을 고려해야겠다고는 했지만 생각해 보니 은하는 그의 연락처조차 알지 못했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걱정할 필요 하나도 없다며, 언니에게는 이 귀엽고 유능한 고양이가 붙어 있다며 어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