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65)화 (65/306)

#65

바람이 매서운 한겨울 날이었다.

혹독한 훈련을 견디다 못한 시우는 그날도 맨발로 저택을 뛰쳐나왔다.

“시우 도련님. 여기 계셨습니까.”

전봇대 근처에 쭈그려 앉아 코를 훌쩍이는 시우 위로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단정한 유니폼 차림에 인자한 주름을 가진 노년의 남성, 나일석.

시우가 어디에 숨어 있든 가장 먼저 찾아내어 손을 내밀어 주던 이로, 그는 늑대의 길드원이 아니라 오랫동안 저택에서 일한 사용인이었다.

“할아범…….”

일석을 알아본 시우가 무릎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눈물범벅인 얼굴을 확인한 일석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지저분한 시우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잘생긴 얼굴이 엉망이잖습니까. 자, 얼른 돌아가시죠.”

“안 갈 거야.”

시우는 일석의 손길을 홱 뿌리친 다음 다시금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일석은 곤란한 얼굴로 시우를 내려다보다가 무릎을 굽혀 작은 도련님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래요? 그럼 우리, 밥이나 먹으러 갈까요?”

“먹고 싶지 않아…….”

“입맛이 없어도 밥은 먹어야죠.”

영차.

일석은 가뿐히 시우를 안아 올리고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 할아범─!”

버둥대는 시우를 들쳐 안고 그가 향한 곳은 근처의 소박한 포장마차였다.

일석은 홍합탕과 파전, 계란찜을 차례로 주문했고 맞은편에 앉은 시우는 뚱한 얼굴로 일석을 응시했다.

“도련님은 이런 곳 한 번도 와 본 적 없으시죠? 참, 여기 파전에는 고추가 들어가 있으니…….”

일석은 파전에 콕콕 박힌 고추를 젓가락으로 일일이 뺀 다음, 먹기 좋은 크기로 찢어 시우의 입 앞에 가져갔다.

“자, 드셔 보십시오.”

“…….”

“아, 뜨거울까 봐 그러십니까? 잠시 기다려─.”

“그냥 줘.”

시우는 못 이기는 척 입을 열어 그것을 받아먹었다. 바삭한 반죽과 아삭아삭한 파, 짭조름한 간이 꽤 괜찮았다.

말없이 꿀꺽 파전을 삼키는 시우를 보며, 일석은 안심한 듯 빙긋 웃었다.

“할아범 성의를 봐서 먹은 거야. 나 정말 하나도 배 안 고프다고.”

“예, 그럼요.”

“…….”

시우는 부루퉁한 얼굴로 일석을 응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석은 흐뭇한 얼굴로 버너의 불 세기를 줄였다.

“이런, 홍합탕에도 청양고추가 많이 들어가 있네요. 음,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걸 주문할 걸 그랬습니다. 도련님은 아직 어리시니 이렇게 매운 건…….”

“나 못 먹는 거 없어.”

“예?”

“아무거나 먹을 수 있다고.”

시우는 보란 듯이 수저를 들어 홍합탕을 한 숟갈 떠서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

“콜록……!”

“도,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괘, 괜찮아. 이것쯤.”

“당장 다른 걸로 주문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니, 정말 괜찮다니까.”

시우는 끝까지 일석을 만류하였지만 일석은 결국 거의 대부분의 메뉴를 다시 주문했다.

시우가 더 이상은 먹지 못하겠다고 백기를 들 때가 되어서야 일석은 시우를 데리고 저택으로 되돌아왔다.

“어디 갔다 이제 오시는 겁니까?”

시우의 귀가를 귀신같이 알아챈 부길드장 하균이 현관에 불쑥 나타났다. 그는 늘 쓰고 다니는 민무늬의 검은 가면을 그날도 착용하고 있었다.

“저녁을 거르신 것 같아 식사를 챙겨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식사?”

“예. 부마스터, 도련님께서는 아직 성장기이십니다. 훈련도 좋지만 무엇보다 잘 챙겨 먹고 잘 쉬시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

하균은 검은 가면 너머로 일석을 빤히 응시하다가 이내 시우에게 힐끗 시선을 돌렸다.

시우는 일석의 뒤에 반쯤 몸을 숨긴 채 하균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은 시간도 늦었으니 이만 쉬시게 하는 것이 어떨까요?”

일석의 제안에 하균이 다시금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침묵하던 하균은 이내 빙글 몸을 돌렸다.

“……훈련 일정은 내일 아침 6시 반으로 잡아 두겠습니다, 도련님.”

하균이 사라지고 일석은 시우를 방으로 데리고 왔다. 깨끗하고 폭신한 침대 위에 시우를 앉히고, 구급상자를 챙겨 와 뺨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이런 거 바르지 않아도 몇 시간이면 나아. 난 각성자잖아.”

시우는 볼멘소리를 내면서도 얌전히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뺨을 간질이는 부드럽고 상냥한 손길이 그다지 싫지는 않았다.

“알다마다요.”

탁.

구급상자를 닫은 일석은 빙긋 웃었다.

“하지만 금방 낫는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잖습니까?”

“…….”

그 앞에서 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석은 시우를 침대에 눕힌 뒤 대신하여 불을 꺼 주었다.

방이 캄캄해지자 조금 무서웠던 걸까, 시우의 작은 손의 일석의 옷자락을 슬며시 움켜쥐었다.

“그러지 않으셔도 아무 데도 안 갑니다.”

“……진짜?”

“암요.”

일석은 이불 위로 시우의 가슴을 상냥하게 토닥여 주었다. 시우는 도르륵 푸른 눈동자를 굴리다가 슬그머니 말문을 열었다.

“할아범.”

“예.”

“할아범은 왜 날 혼내지 않아?”

“도련님을 왜 혼냅니까?”

“매일 훈련을 팽개치고 도망가잖아.”

“저는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걸요.”

“……뭐?”

이불을 덮고 있던 시우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동그란 눈으로 일석을 바라보았다. 일석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시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도련님이 싫은 걸 싫다고 표현하실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

“자, 얼른 주무십시오.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제일입니다.”

일석은 시우의 턱 끝까지 이불을 올려 주었다. 이불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시우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곡선을 그렸다.

“할아범.”

“예.”

“……그냥 불러 봤어.”

홱!

시우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 버렸다.

사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나를 혼내지 않아서. 밥을 사 줘서. 뜨거운 음식을 후후 불어 줘서. 자기 전까지 곁에 있어 줘서, 고맙다고.

그런데 좀처럼 입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내일 일어나면 꼭 말해야지.

그래, 내일 일어나면…….

***

“…….”

스르륵 눈을 떴다. 커튼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이 눈부셨다. 벌써 아침인 모양이다.

무심코 머리를 쓸어 넘기려던 손이 허공에서 우뚝 굳었다. 커다랗고 다부진 손. 더 이상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자 벽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작았던 소년은 어느새 훌쩍 자라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일석이 시우를 떠난 지도 말이다.

그날 아침, 시우의 곁을 지키겠다던 일석이 모습을 감추었다. 다른 일을 하러 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일석은 십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시우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저택 사용인이나 길드원들에게 물어보았을 때, 그저 잠시 멀리 출장을 갔다고 했다. 당시 어렸던 시우는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1년, 그리고 2년이 흐른 뒤에도 일석은 돌아오지 않았다.

의문을 품은 시우는 일석의 행방을 끊임없이 수소문했다. 그리고 그 결과, 일석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시체조차 온전히 남지 않았을 정도로 큰 사고였다고 했다.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였다.

“……후.”

침대에서 일어난 시우는 병실을 빠져나왔다. 바깥바람을 좀 쐬고 싶었다.

‘왜 갑자기 이런 꿈을 꿨지?’

성큼성큼 복도를 걷던 시우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어제 은하에게 계약 파기 선언을 들었던 탓일까?

만일 그렇다면 모르긴 몰라도 은하의 선언이 다소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안 꾸던 꿈까지 꾸는 걸 보면 말이다.

‘네겐 많은 도움을 받았어. 오피스텔도 그렇고 박 매니저도 그렇고. 이 이상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아.’

‘걱정 마. 위약금은 어떻게든 보상해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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