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시우의 푸른 눈이 재빨리 병실 내부를 훑었다. 이준의 어깨 너머로 새하얀 이불을 덮은 채 곤히 잠든 은하의 모습이 보였다.
시우는 다시 이준에게 시선을 옮겼다.
무표정한 얼굴의 이준이었으나 결코 숨길 수 없는 것이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 정돈되지 않은 호흡 따위가 그랬다.
마치 금방 문을 열고 들어온 시우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초조하고 긴박한 모습이었다.
‘뛰어온 건가?’
선배를 걱정하기라도 한 거야? 그가 왜? 어쩐지 기분이 언짢아진 시우는 이준을 향해 필요 이상으로 날카롭게 눈매를 세웠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지?”
시우가 던진 물음에 이준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힐끗 눈을 돌려 잠든 은하를 바라볼 뿐.
수면 유도제를 먹고 깊게 잠든 은하는 평소와는 달리 대화 소리에도 쉽게 깨지 않았다.
“왜 여기에 있냐고 물었습니다.”
“…….”
“선배가 입원했다는 것, 그리고 이곳 병원에 있다는 것까지. 어떻게 안 겁니까?”
시우가 취조하듯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이준에게서 돌아온 것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보아하니 별다른 외상은 없는 모양인데. 혹시 들은 것이 있나?”
시우의 눈썹이 크게 꿈틀댔다. 이준의 태도를 보아 방금 전 시우의 물음에는 전혀 대답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시우 역시 그의 물음에 대답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당신에게 전달할 정보는 없습니다.”
물론 시우 역시 방금 병원에 도착했기에 은하의 상태에 대해 전달받은 바는 없었다. 그러나 만일 정보가 있다고 해도 그에게 알릴 생각도, 필요도 없었다.
시우는 성큼성큼 걸어 이준과 은하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섰다.
척!
마치 그 이상의 접근을 차단한다는 듯, 시우는 팔을 뻗어 둘 사이를 막았다. 후드 아래로 살짝 보이는 그의 머리카락이 서서히 백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선배는 내가 보호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를 당신에게는 그 어떠한 관련 정보도 줄 수 없어.”
“보호?”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준이 하,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비틀어진 입매 사이로 그가 이상한 말을 했다.
“네가 은하를 보호하고 있다고?”
은하?
낯선 이름에 시우의 눈빛이 일순 바뀌었다. 시우의 변화에도 아랑곳 않고, 이준은 단정하게 맨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그렇다면 넌 잘못하고 있는 거군. 제대로 보호하고 있었다면 저 애가 이딴 곳에서 환자복을 입고 누워 있을 리는 없었을 테니까.”
사락…….
향수 냄새. 시우는 본능적으로 코를 막았다.
워낙 미미한 향이라 일반인이라면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워낙 후각에 예민한 시우는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건 향수 냄새가 아니다. 피 냄새도 아니다.
‘페로몬 향.’
어쩌면 체취라고도 할 수 있겠다.
코에 손을 갖다 댄 시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할 권리는 없지 않습니까?”
시우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이준의 이름을 입에 담았을 때 은하의 얼굴. 버스트 게이트 수색 당시, 멀리서 이준을 응시하고 있던 은하의 눈빛. 과거 이준과의 일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들려주던 은하의 목소리.
말로는 능숙하게 형용할 수 없지만, 모든 것이 평소와는 아주 조금 달랐다. 그것은 몹시 미세한 차이였으나 시우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선배는 당신을 만나고 싶어 했어.”
푸른 눈동자에 희미한 언짢음이 서렸다. 시우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희미하게 미간을 구겼다. 어렴풋이 주먹에 힘을 준 채 다시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
순간적으로 이준의 얼굴에 묘한 빛이 감돈다. 아주 한순간이었지만 시우는 그 찰나의 변화를 분명히 발견했다.
어느새 병실 내부를 가득 채웠던 진한 향기도 연기처럼 사라져 있었다.
동요하고 있기라도 한 걸까. 모르겠다. 시우는 다시 한번 일격을 가했다.
“이제 와서 동료인 척 굴 생각입니까? 그렇다면 좀 우스운데. 안 그렇습니까? 마에스트로.”
은하와 이준은 격변의 시대 당시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동고동락하던 동료 사이라 했다.
그러나 이준이 은하에게 보이는 태도는 결코 친애하는 동료에게 보이는 그것이라 할 수 없었다. 듣자하니 이번에 선배가 활동 중지 처분을 받은 것도 그의 입김이라 하지 않았던가.
목숨을 구해 주고 대신 게이트에 갇힌 사람을 상대로 그 무슨 배은망덕한 행동머리인가.
‘아니, 그것보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일전에 다짜고짜 찾아와 그녀와의 해약을 요구한 그의 태도.
뒤를 캐내어 보아도 마에스트로라는 헌터 자체가 워낙 베일에 싸여 있는 데다 국적도 달랐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정보도 한정적이었다.
결론은 이렇다. 신시우는 백이준을 신뢰하지 않는다. 설령 그가 대한민국 최초의 S급 헌터이며 은하와 같은 1세대 헌터라고 할지라도.
“…….”
“…….”
침묵이 흘렀다.
고요한 병실 내부에는 잠든 은하의 희미한 숨소리만이 유일한 백색 소음이었다.
이준은 물러서지 않았고, 시우 역시 그랬다. 불편한 공기 속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
곧이어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해당 병원의 의사였다.
병실 내부로 들어오려던 의사는 건장한 남자 둘이 살벌하게 대치하는 모습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도련님? 그리고 이쪽은…….”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
의사의 등장에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준이 생각보다 쉽게 물러섰다.
저벅저벅 걸어 문고리를 잡는 이준을 향해 시우가 물었다.
“이 일을 협회에 알릴 생각입니까?”
은하가 입원했다는 사실을 이준이 알고 있었다. 그것도 시우보다 먼저.
그 말은 즉 이준은 은하가 활동 정지 처분을 무시하고 부산 언노운 게이트에 출입했다는 사실마저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
현재 협회 소속인 이준이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라면, 은하에게 돌아올 불이익을 계산해야만 했다.
문고리를 잡은 이준이 힐끗 뒤돌아보았다.
불현듯 마주친 잿빛 눈동자가 싱긋 곡선으로 휘어졌다.
“글쎄.”
달칵.
애매한 대답만을 남긴 채, 이준은 그렇게 사라졌다.
***
“실례합니다, 대표님. 박제휘입니다.”
“들어와.”
시우의 허가가 떨어지자 제휘는 슬그머니 병실 문을 열었다. 그곳은 은하의 병실 바로 옆, 810호실이었다.
“당분간 이 헌터님과 함께 병원에 머무르신다는 이야길 듣고 필요하신 것들을 챙겨 와 보았습니다.”
“거기 대충 둬.”
시우는 소파 옆 테이블을 향해 턱짓했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제휘는 시우의 눈치를 살피며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짐을 올려 두었다.
“저어…… 도련님.”
그대로 방을 나가지 않고 제휘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헌터님은 좀, 어떠십니까?”
“…….”
힐끗.
푸른 시선이 제휘에게로 향한다. 그곳에 마치 가시라도 박혀 있는 양, 제휘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풀이 죽인 제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시우는 이내 시선을 거두며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두 차례나 큰 전투를 치른 것치고는 놀랍도록 멀쩡하다더군.”
“그, 그게 정말입니까?”
“온몸의 상처가 흉터도 없이 말끔히 나아 있었다던데.”
시우의 말에 제휘는 안심한 듯 긴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 정말로 다행이었다.
안도감이 물밀 듯 밀어닥친 까닭일까, 붉어진 눈시울을 벅벅 문지르는 제휘를 향해 시우가 툭 던지듯 물었다.
“동생은.”
“……네?”
다리를 꼬고 앉은 시우는 턱을 괸 채 비스듬히 제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생은 어떻냐고.”
“아.”
제휘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동생…… 이라 함은 아마도 제림에 대해 묻는 것이겠지.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합니다. 지금은 본격적인 서울 생활을 준비하기 위해서 아르바이트 처를 알아보고 있답니다.”
“그래?”
시우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휙 시선을 돌려 버렸다.
제휘는 그런 시우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련님께선……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이곳에 머무르시는 것 말입니다. 불편하시다면 대표님을 대신하여 제가 남아 있겠습니다.”
S병원에는 귀훈이 장기 입원하고 있었다. 물론 병동은 달랐지만 말이다.
귀훈이라면 질색하는 시우가 스스로 이곳에 머무르겠다고 결심한 것이, 제휘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은하를 염려하여 판단한 일이라면, 대표님을 대신해 자신이 이곳에서 그녀를 보살펴도 될 일이었다.
“그럴 거면 사표는 왜 냈고.”
시우가 차갑게 툭, 한마디를 던졌다.
“…….”
할 말이 없어진 제휘가 복잡한 얼굴로 시선을 떨구었다.
“선배와 알게 된 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알게 된 점이 있어.”
발끝을 까딱이던 시우가 문득 입을 열었다.
“선배는 받은 것을 돌려줄 줄 아는 사람이야.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말이야.”
“…….”
“분명 네게 받은 것이 있었던 거겠지. 돌려주고 싶었던 걸 거야. 녹화를 펑크 내면서도, 게이트에 뛰어들면서도. 그러니 이번엔 다시 네 차례야.”
거기까지 말한 시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도 사표로 끝낼 셈인가?”
정적이 앉았다.
시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푸른 시선을 제휘에게 고정한 채, 그의 대답을 줄곧 기다렸다.
“저는…….”
이윽고 제휘가 슬그머니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는 계속 헌터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요.”
어디선가 피식,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힐끗 다시 고개를 들자 이제야 조금은 표정을 푼 시우가 보였다.
“그러든가.”
“……대표님.”
울컥. 눈가가 붉어진 제휘가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시우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병원에 있는 동안은 내가 선배 곁에 있겠어. 오래 있는 것도 아니고 일주일 정도니까 문제 될 것 없으니. 그리고─.”
잠시 말끝을 길게 늘어뜨린 시우는 괴고 있던 턱을 들었다.
“아버지가 여기 있는 것이야말로 내가 이곳에 있는 게 나은 이유지.”
게다가 선배가 입원한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예를 들면, 마에스트로와 같은 불청객이 또다시 방문한다든가.
“……예, 대표님.”
제휘는 시우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럼 나가 봐.”
“아.”
“왜?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나?”
제휘는 목뒤를 긁더니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머뭇거렸다.
이 이야기를 대표님에게 해도 될까 싶으면서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결국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실은, 제천대성과의 전투 때 이 헌터님의 팔찌가 끊어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팔찌?”
시우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네. 헌터님께서 늘 왼쪽 팔목에 차고 다니시던 팔찌요. 자세한 건 모르지만 굉장히 소중히 여기시는 것 같았거든요.”
팔찌가 끊긴 순간 돌변했던 은하의 태도가 아직도 눈에 선연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끊어진 팔찌를 내내 응시하던 눈빛도.
“똑같은 것을 구해 드리고 싶은데 액세서리점이나 인터넷 쇼핑몰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정말 쉽지 않더라고요. 그, 그래서…… 혹시 대표님은 팔찌를 구할 만한 장소를 아실까 해서요.”
“몰라. 난 그런 거에 관심 없어서.”
“여, 역시 그러시겠죠? 죄송합니다. 괜한 말씀을 드렸네요.”
제휘는 머쓱하게 웃었다.
하긴 시우가 팔찌를 팔 만한 장소를 알 리가 없었다. 차라리 여동생에게 묻는 편이 빠를 테다.
“그런데 그걸 굳이 사야 하나.”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던 시우가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무, 물론 똑같은 것을 구한다 하더라도 아끼던 팔찌와 완전 같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아니.”
시우가 고개를 들어 제휘를 쳐다보았다.
“직접 만드는 게 빠르지 않을까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