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같은 시각, 서울 M 호텔 최상층.
“협회장님으로부터의 전달 사항은 이상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내일 미팅에서 들을 수 있으실 겁니다.”
광현은 정돈한 자료들을 이준에게 넘기며 조심스레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한쪽 다리를 꼰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이준은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나마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을 내미는 것을 보니 이야기는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광현은 후다닥 짐을 챙겨 그곳을 빠져나왔다. 이준은 가볍게 목례를 할 뿐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달칵.
문을 닫은 광현은 문고리를 잡은 그 상태로 툭, 문 표면에 이마를 갖다 댔다.
“하아…….”
그리고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숨을 참고 있었던 사람처럼 긴 숨을 토해 냈다.
마에스트로 백이준.
그가 한국 헌터 협회와 전속 계약을 한 일은 협회에 있어서 경사 중에 경사였다.
협회에 들어오고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는 엄청난 성과를 내고 있었다.
다만 그가 협회에 있어 무척 감사한 존재인 것과는 별개로, 광현은 이준이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불편했다. 어쩌면 협회장보다 훨씬 더.
‘마주 앉아 얘길 하고 있으면 자꾸 팔에 소름이 돋는다니까.’
그건 기분 탓이라고 하더라도,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는 타인의 귓가에 바람을 불어넣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을 노예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고 했다.
그 때문인지 광현은 어쩐지 이준과 눈을 마주치는 것도 조금 꺼려졌다.
한편, 광현이 떠나고 5분 정도 흐른 뒤 이준은 힐끗 캐서린 쪽을 쳐다보았다.
“데이빗은?”
데이빗 무어.
이준의 수행인으로 오랜 시간 지내 온 자였다. 그는 캐서린과 마찬가지로 미국인이었으나 14년 전 이준의 비밀 명령으로 한국에 입국했고, 그 후 지금까지도 한국에 지내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준의 물음에 캐서린은 손목시계를 슬쩍 확인하고 칼같이 답했다.
“이제 막 로비에 도착했을 겁니다. 제가 바로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이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슈트 재킷을 챙겼다. 캐서린이 뭐라 말할 새도 없었다. 재킷을 훌렁 어깨에 걸친 그가 문고리를 돌렸다.
호텔 로비로 내려오자 마침 커다란 꽃다발을 든 데이빗이 보였다.
“아, 백 헌터님.”
“오랜만이야.”
이준은 저를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이는 데이빗 앞에 멈춰 섰다.
최근에 너튜브를 시작해서 구독자 몰이를 하고 있다더니, 미국에 있을 적보다 훨씬 말끔해진 인상이 꼭 모델 같았다.
“생각보다 한국 생활이 잘 맞았던 모양이군.”
“덕분입니다.”
데이빗은 깍듯하게 답했다. 이준은 그런 그를 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가 이내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럼 가지.”
“예? 함께 가시는 겁니까?”
“그래.”
이준의 답에 캐서린과 데이빗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결국 그들은 이준과 함께 차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목적지는 해당 호텔로부터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주차를 마친 그들은 고즈넉한 언덕길을 걸었다. 비로소 걸음을 멈춘 곳은, 바로 누군가의 묘였다.
“여기 있습니다.”
데이빗은 자신이 들고 있던 꽃다발을 이준에게 조심스레 건넸다. 이준은 잠시 망설이는 듯해 보였으나 이내 그것을 받아 들고, 천천히 비석 앞에 내려 두었다.
“…….”
그렇게 세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묘비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윽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준이었다.
“묘가 무척 깨끗하군.”
“맡기신 바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처음 이준이 갑자기 한국행을 명했을 당시, 데이빗은 굉장히 놀랐다.
그럴 수밖에. 명문대를 졸업하고 매니지먼트 내에서도 승진을 앞두고 있는 그에게, 한국에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묘를 돌봐 달라는 일을 시키는데.
‘연봉 20만 달러를 약속하지.’
하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만난 적이 있나?”
한참이나 묘비를 응시하던 이준이 문득 물어 왔다. 그가 말하는 ‘그녀’가 누구인지, 데이빗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아뇨. 단 한 번도요. 애초에 이 묘비를 찾는 건 저 외에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지난 14년 동안은요.”
지난 14년 동안은. 그 마지막 말에 이준이 시선을 들었다.
“그…… 최근에 누군가 묘를 방문한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군.”
이준은 짤막하게 답할 뿐, 어떠한 말도 더하지 않은 채 다시 묘비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데이빗이 시선을 들었다.
“뒤를 캐내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응. 괜찮아.”
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자네는 여기 오지 않아도 돼.”
“예?”
“미국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말이야.”
“호, 혹시 제가 무슨 실수라도…….”
“아니. 그런 게 아냐.”
이준은 스르륵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노을빛으로 물든 구름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이끌리듯 눈을 감자, 자연스레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 이 묘비를 돌볼 사람이 돌아왔으니까.”
또한 나도 돌아왔고. 낮게 덧붙인 이준이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분께서 정말 돌아오신 게 맞아요?”
데이빗이 호들갑을 떨며 이준에게 다가섰다. 오랜 기간 묘를 돌봐 온 데이빗이었으나 그는 아직도 이 묘비의 주인이 누구인지, 어째서 이준이 이 묘비를 돌보라는 명을 내렸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여 몰래 조사를 해 볼까 싶기도 했지만, 혹여 이준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 지난 14년 내내 말이다.
이제는 조금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데이빗은 힐끔힐끔 이준의 눈치를 살피다가 은근슬쩍 입술을 달싹였다.
“그, 혹시 어떤 분입니까? 이 묘비의─.”
“데이빗.”
잠자코 자리를 지키고 있던 캐서린이 헛기침과 함께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녀’와 관련된 이야기에 이준이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캐서린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오늘의 이준은 스스럼없이 이렇게 답했다.
“글쎄. 책임감이 강한 사람?”
산 너머로 저물어 가는 노을을 좇으며, 이준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지, 그냥 강한 사람.”
데이빗은 더욱더 궁금해졌다. ‘그녀’가 누구인지. 누구이길래 이준으로 하여금 저런 날것의 미소를 띠게 하는 것인지 말이다.
***
쉬이익!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은하는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놈을 향해 돌진했다.
Lv.??? ‘자애의 현혹술사’가 화들짝 놀랍니다.
Lv.??? ‘자애의 현혹술사’가 스킬을 사용합니다. ▶유혹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