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47)화 (47/306)

#47

“누나!”

쿵, 쿵!

민주는 안간힘을 다해 무너진 게이트 내벽을 두드렸다.

주먹이 욱신거릴 만큼 두드렸지만 은하의 목소리가 되돌아오기는커녕 산처럼 쌓인 잔해는 1cm도 움직이지 않았다.

새까맣게 뒤덮인 어둠은 얼마나 짙은지 자신의 발조차도 내려다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바주카를 사용해 이 공간 자체를 날려 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밀폐된 공간에서 바주카포를 사용하면 자신의 사지 또한 펑 날아갈 것이다. 당연히 콩알탄을 사용할 수도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누나, 거기 있어요?”

쿵쿵!

쿵!

쿵…….

스르륵.

“으…….”

벽을 두드리던 작은 주먹이 힘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공기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허, 윽…….”

정신이 아득해지고 점차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과호흡 증상. 그 와중에도 민주는 안간힘을 다해 내벽을 향하여 손을 뻗었다.

드륵, 드르륵.

더 이상 주먹을 쥘 수 없었던 민주는 손톱으로 내벽을 긁어 댔다.

손가락마다 피멍울이 맺히고 손톱이 갈려 나갔지만 아랑곳 않고 단단한 내벽을 긁고 또 긁었다.

그러다가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은 민주가 파르르 어깨를 떨었다.

어둡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변하지 않는 새까만 풍경.

그 잔인하고 두꺼운 어둠으로 인해 잊고 있던 기억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그리고 그 파도는 어린 소년을 꿀꺽, 단숨에 삼켜 버렸다.

‘민주야.’

일.

‘여기서 눈 감고 백까지 세는 거야. 절대 눈 뜨면 안 돼, 알았지?’

이.

‘엄마랑 아빠는 저기 가서 숨어 있을게. 우리 민주가 좋아하는 숨바꼭질이야.’

삼.

‘그럼, 우리 아들…….’

사.

‘엄마랑 아빠, 숨을게.’

오, 육, 칠, 팔…….

아득히 번져 가는 정신 속에서, 민주는 차라리 안심했다.

‘다행이다.’

이곳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이런 모습은 누구에게도, 설령 군단의 길드원에게도 보여 줄 수 없었다.

S급 헌터 트릭스터, 군단의 주인이 이런 나약한 트라우마가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진 않았다.

알려져서는 안 됐다.

***

여덟 살.

십 평짜리 반지하의 집에는 엄마, 아빠, 민주, 그리고 엄지손가락만 한 바퀴벌레가 살았다.

집에는 창문이 없었다. 그래서 겨울에는 덜 추웠고, 여름에는 덜 더웠다.

집에 따듯한 물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 조금 흠이었지만 그것도 괜찮았다. 엄마는 늘 민주의 몸집만 한 가마솥에 뜨거운 물을 팔팔 끓여 주었으니까.

굶는 일도 크게 없었다. 매달 나라에서 일정량의 쌀과 라면을 가져다주었으니까.

그 당시 민주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는 케첩 밥이었다. 이름 그대로 맨밥 위에 케첩을 뿌리고 비비는 것이었다. 케첩 밥 한 그릇이면 저녁까지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날은 웬일인지 케첩 밥 위에 반숙 계란프라이가 올라와 있었다.

“엄마, 이거 정말 먹어도 돼요?”

“그럼. 하나 더 구워 줄까?”

“네!”

행복했다.

한 끼에 계란프라이를 무려 두 개나. 그래도 되는 걸까? 그런 호화를 누린 것은 정말이지 여덟 해 인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날은 아빠도 출근하지 않았다. 일요일도 거르지 않고 매일 꼭두새벽마다 집을 나갔던 아빠가, 그날은 정오가 넘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맞은편에 앉아 민주의 식사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 민주, 또 먹고 싶은 거 없어?”

“으음…….”

민주는 입가에 밥풀을 묻힌 채 도르륵 눈을 굴렸다. 동그란 눈매는 어머니를 닮았고, 그 아래 작은 눈물점은 아버지와 같았다.

“없어요. 이게 제일 맛있어요.”

“그렇구나.”

아빠와 엄마가 동시에 웃었다. 지금이라면 그 미소가 어떤 의미인지 단번에 눈치챘겠지만, 그 당시의 민주는 그런 것 따위 몰라서 그저 “에헤헤.” 하고 따라 웃었다.

“그럼, 이거 먹고 엄마 아빠랑 같이 숨바꼭질할까?”

“숨바꼭질?”

“그래. 일요일이니까 가족끼리 노는 거야. 어떠니?”

“……!”

숟가락을 들고 있던 민주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민주는 밥을 다 삼키지도 않은 채 기쁜 듯이 헤벌쭉 미소 지었다.

“좋아요……!”

그때는 몰랐다.

어째서 그날, 엄마는 계란프라이를 두 개나 구워 줬는지.

어째서 그날, 아빠는 출근하지 않고 숨바꼭질을 하자고 말했는지.

“민주야, 여기서 눈 감고 백까지 세는 거야. 절대 눈 뜨면 안 돼, 알았지?”

밥을 다 먹고 민주는 주방 쪽 벽을 본 채로 섰다. 그리고 두 손으로 꽁꽁 눈을 가렸다.

“네, 알겠어요.”

“그럼 엄마랑 아빠, 숨을게.”

일, 이, 삼, 사, 오…….

민주는 설레는 마음으로 숫자를 세어 갔다. 뒤에서 철컥, 하는 소리가 난 것이 이상했지만 절대 눈을 뜨지 않기로 약속했다. 민주는 눈을 꼭 감고 셈을 이었다.

칠십이, 칠십삼, 칠십사…….

이번에는 또 어디선가 쿵! 소리가 났다. 순간적으로 깜짝 놀란 민주가 딸꾹, 셈을 멈추었다.

하마터면 눈을 뜰 뻔했지만 괜찮았다. 민주는 약속을 잘 지키는 착한 어린이였다.

‘어디까지 세었더라.’

맞다. 칠십오, 칠십육…….

구십칠, 구십팔, 구십구.

──백.

“이제 눈 뜰게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으나 잔뜩 신이 난 민주는 번쩍 눈을 떴다. 그런데.

“……어.”

집이 이상하게 캄캄했다.

일부러 겁을 주기 위해 불까지 끈 것일까? 민주는 벽을 더듬어 조명 스위치를 눌렀다.

딸깍.

딸깍딸깍.

그런데 아무리 눌러도 불이 켜지지 않았다. 갑자기 고장이 났을 리는 없었다. 아까 밥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잘만 켜졌으니 말이다.

아마 일부러 장난을 친 것이 틀림없었다.

‘나도 이제 초등학생이라고.’

이런 것에 겁을 먹을 나이는 지났단 말씀. 민주는 재빨리 주변을 훑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었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자 눈도 어둠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그러나 열 평짜리 반지하 집에 성인 남녀가 숨을 만한 공간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건 여덟 살 민주도 알 만한 사실이었다.

민주는 재빨리 현관 쪽으로 향했다. 엄마 아빠는 아마도 바깥에 숨었을 것이다.

덜컥.

덜컥덜컥.

덜컥덜컥덜컥.

문이 열리지 않았다. 수십 번 당기고 밀어 보아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 엄마……?”

뒤늦게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민주는 조그마한 머리통을 굴려 상황을 파악했다. 설마,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부모님께서 날 여기 가두고 떠난 것은 아닐까?

‘아냐, 그럴 리 없어.’

민주는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아마 숫자를 너무 빨리 셌던 모양이다. 성큼성큼 걸어 주방 벽에 다시 이마를 딱 붙였다. 그리고 고사리 같은 손을 들어 눈꺼풀을 꾹 눌렀다.

“일, 이, 삼, 사, 오…….”

일부러 소리를 내어 숫자를 세었다. 아까보다 더 또박또박하게, 더욱 천천히.

“구십팔, 구십구, 백……!”

번쩍! 민주가 눈을 떴다.

여전히 집 안은 캄캄했다. 창문 하나 없는 집이었기에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알 수도 없었다.

현관으로 쪼르르 달려간 민주는 다시 문고리를 돌렸다.

철컥철컥.

열리지 않았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민주의 두 눈에 울컥 뜨거운 눈물이 샘솟았다.

“엄마! 아빠!”

가능한 한 가장 큰 목소리로 부모님을 불렀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눈가를 손등으로 세차게 비빈 민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금 벽에 이마를 가져갔다.

“일, 이, 삼, 사, 오…….”

한 번 더.

“십일, 십이, 십삼, 십사…….”

또다시 한 번.

“이십사, 이십오, 이십육…….”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그러나 아무리 숫자를 세어도 가라앉은 어둠은 밝아지지 않았다.

어둠은 작은 소년의 희망도, 기대도, 배고픔도, 이윽고는 절망조차 좀먹었다.

빈껍데기만 남은 소년에게 찾아온 것은 사라진 부모님도 무관심했던 담임 선생님도 가난뱅이라 놀려 대던 친구들도 아니었다.

띠링.

십이신수 ‘달을 노니는 토끼’가 당신에게 계약을 제안합니다. 승낙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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