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40)화 (40/306)

#40

한국에는 여섯 명의 S급 헌터가 있다.

장미 길드의 지도자이자 자타 공인 한국 최고의 힐러, ‘닥터 플랜트’ 금로제.

육체강화계의 거장이자 모든 헌터들의 큰형이라 불리는, ‘제천대성’ 유환.

최연소 S급 헌터이자 소문난 밀리터리 마니아, ‘트릭스터’ 송민주.

무소속을 고집하며 버스트 게이트를 쓸어 담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괴도’ 강아연.

가장 최근 발표된 신예 S급 헌터지만 관련 정보가 전무한 수수께끼 랭커, ‘백랑’ 신시우.

그리고 늑대의 진정한 주인이자 한국의 첫 번째 S급 헌터, ‘백야’ 신귀훈.

하지만 사실 한국에는 일곱 명의 S급 헌터가 ‘있었다’.

‘마에스트로(Maestro) 백이준.’

이윽고 캐서린에 뒤이어 이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슈트 상의를 넓은 어깨에 살짝 걸쳐 올린, 수려한 이목구비의 남자. 구김 하나 없는 흰 셔츠에 무심히 넘긴 금발이 깔끔한 인상을 준다.

“이분이 이전에 말씀드렸던 제 상사, 마에스트로십니다.”

월드 랭킹 5위 이내의 유일한 동양인.

헌터 아카데미에서도 아직도 첫 번째로 언급되는 유명 헌터 1위.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 최초의 S급 헌터.’

늑대의 주인, 신귀훈보다 앞서 S급 판정을 받았던 ‘한국인’.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여섯 명의 S급 헌터에는 그가 포함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한국이 아닌 미국을 선택한 그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세계 공인 최고의 헌터’ 중 하나라는 것을 부정하는 이는 현재까지도 없었다.

‘그런 남자가 왜 여길.’

시우는 자리에 앉은 채 그를 묵묵히 올려다보았다. 도저히 상냥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이준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르륵 눈매를 휘며 웃기까지 했다.

“좀 앉아도 될까?”

반말. 기분이 썩 유쾌한 건 아니었지만 지적할 필요는 없었다. 젊은 외모 뒤에 숨겨진 그의 실제 나이를 시우는 알고 있었다. 그가 아득히 먼 선배라는 사실도 말이다.

“……그러시죠.”

“고마워.”

자리에 앉은 이준이 힐끗 캐서린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꾸벅 고개를 숙인 캐서린이 등을 돌렸다.

“……그럼 저는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아, 피,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불러 주십시오. 대표님.”

덩달아 눈치를 살핀 제휘도 캐서린을 따라 방을 나섰다.

“보아하니 이곳은 그쪽 저택인 것 같은데.”

이준은 널찍한 방 안을 크게 한 번 훑고선 말했다.

“굳이 늑대 본부가 아닌 이곳으로 날 불러도 괜찮았나? 아니면 그럴 이유가 있었던 걸까?”

적막이 짙게 깔린 방 안에서, 색이 다른 두 눈동자가 마주쳤다.

시우는 이준의 말에 대답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그저 날이 선 눈빛으로 그를 빤히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준이 조금 장난스러운 빛으로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왜, 생각보다 너무 젊어서 놀랐나?”

“…….”

시우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푸른 두 눈은 이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랭크가 높은 헌터일수록 일반인과 비견할 수 없을 정도의 능력을 가진다. 비단 시스템이 부여한 고유 능력만이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스스로 상처를 회복하는 자가 치유력, 그 외에도 민첩함이나 파괴력, 단순하게는 청력이나 시력까지도 엄청나게 진화한다. 노화가 느려지는 것도 상위 랭커의 특징 중 하나였다.

하지만.

‘……보통 수준이 아닌데.’

눈앞의 남자, 백이준은 젊어도 너무 젊었다.

사진으로 그의 얼굴을 본 적은 있었지만 젊은 시절의 사진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직접 만나 본 그는 사진 속 모습과 같은, 영락없는 젊은 남자였다.

좋게 보면 이십 대 후반. 고작해야 삼십 대 초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정도면 노화가 느려진 정도가 아니라 거의 회춘한 수준이 아닌가?

이준은 까만 가죽 장갑을 벗어 유리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수려하게 뻗은 손가락으로 무심히 머리를 쓸어 넘긴 그가 빙긋 웃었다.

“마음은 알겠지만 그만 쳐다봤으면 좋겠는데. 너무 뜨거워서 말이야.”

“……왜 찾아온 겁니까?”

시우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야기라면 이전에 그녀와 끝낸 셈입니다만. 제 쪽에서 덧붙일 이야긴 없습니다.”

과연. 캐서린이 실패한 까닭이 있었다. 저 확고하고 단호한 태도는 어지간해서는 흔들릴 것 같지 않았다.

“알아. 나도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는 취미는 없거든.”

“그러면─.”

“줄곧 만나 보고 싶었어. 너를.”

“…….”

시우의 인상이 와륵 구겨졌다. 지금 장난하자는 것인가.

“……왜.”

그러자 이준이 픽하니 작은 웃음을 흘렸다.

“왜긴. 직접 물어볼 것이 있어서.”

하지만 그 웃음은 아주 찰나일 뿐이었다. 웃음이 아지랑이처럼 사라진 그곳에, 딱딱하게 굳은 입술이 움직였다.

“흑염의 프린세스와 왜 계약했지?”

시우의 눈썹이 꿈틀 반응했다. 원인은 그 소름 끼치도록 낮은 목소리 톤이 아니었다. 흑염의 프린세스. 그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이름 탓이다.

“……대답해야 합니까?”

“물론.”

이준은 의자 손잡이에 팔꿈치를 대고 손을 올려 비스듬히 턱을 괴었다. 색소가 옅은 금발 아래, 회색 눈동자가 서늘한 안광을 머금었다.

“그 이유에 따라서, 내 앞으로의 행동이 달라질 테니.”

그 순간, 시우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눈빛에 담긴 그것은 협박이나 경고의 뜻이 아니었다.

‘적의.’

그것도 꽤 사나운.

그러나 어째서?

어째서 미국에서 온 마에스트로가 생전 처음 보는 자신에게 적의 따위를 품고 있는 것인가.

시우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와는 무슨 관계입니까?”

“그걸 물어볼 권리가, 네게 있다는 건가?”

“그럼 당신에게는 있습니까?”

시우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당신은, 무슨 권리로 나를 찾아와서 그녀에 대한 것을 묻는 건지?”

“…….”

“…….”

숨 막힐 듯한 정적이 그들을 옭아맸다. 그들은 눈조차 깜짝하지 않고 서로를 응시했다.

‘성가시군.’

시우의 잇새로 으득,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웃고 있는 낯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다.

‘얼마 전 트릭스터도 그렇고, 이번에는 마에스트로인가.’

대체 왜 이렇게 귀찮은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앞으로 더 귀찮은 일이 일어나더라도 시우는 이 계약을 파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결코 말이다.

“나와 그녀의 계약에 대해 궁금하다면 이미 한 번 거절의 의사를 비친 내가 아닌 그녀를 직접 찾아가도 됐을 겁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러지 않고 기어코 다시 한번 날 찾아왔지.”

거기까지 말한 시우가 스르륵 고개를 들어 맞은편의 그를 응시했다.

“그렇다면 즉,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죠.”

두 시선이 맞부딪치는 순간, 시우가 희미하게 눈매를 휘었다.

“당신은 그녀를 직접 만날 수 없는, 그녀에게 직접 물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푹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 검은 슈트 상의에 가려진 어깨가 희미하게 떨리는 듯싶더니.

“하핫. 재밌네.”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원하는 답은 얻은 것 같군.”

시우가 입매를 굳혔다. 자신은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을 전한 기억이 없었다.

“무슨 답을─.”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백 헌터님. 한국 헌터 관할 협회로부터의 연락입니다.”

닫힌 문 너머로 캐서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알았어.”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래서 한국에 오기 싫었는데 말이지.”

나직이 중얼거린 그가 벗어 두었던 가죽 장갑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한쪽씩 차례로 장갑을 낀 이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장신인 남자라 몸을 세우자 훨씬 더 위압적이었다.

“…….”

그러나 시우는 전혀 위축되지 않은 얼굴로 그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짧은 시선 교환 후, 이준이 빙그레 입꼬리를 올렸다.

“실례가 많았군.”

이준은 까만 가죽 장갑을 낀 손을 팔랑팔랑 흔들고는 문고리를 잡았다.

“조만간 다시 보도록 하지, 백랑.”

“……!”

달칵.

시우의 눈이 크게 뜨였을 때, 문은 이미 굳게 닫힌 뒤였다.

그로부터 몇 분 후, 문이 다시 열렸다.

“대, 대표님.”

제휘였다.

한눈에 보아도 기분이 바닥에 추락한 듯한 시우를 보며, 제휘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커피를…… 내왔는데…….”

“치워. 이미 돌아갔으니.”

“넵.”

제휘는 티 세트가 올라간 트레이를 그대로 가지고 몸을 빙글 돌렸다. 후다닥 방을 빠져나가려는데, 서늘하게 식은 목소리가 그의 목덜미를 잡았다.

“차 빼놓고.”

“차…… 요? 어디 가시게요?”

벌떡.

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후드를 뒤집어썼다. 얼굴에 드리운 옅은 그늘 속에서, 파란 눈동자가 휙 움직였다.

“선배 집.”

***

딩동─

벨이 울리는 소리에 문득 잠에서 깨어난 은하가 고개를 들었다. TV를 보다가 깜빡 잠든 모양이었다.

‘누구지?’

은하를 찾아올 만한 사람은 두 사람뿐이었다. 신시우 그리고 박제휘.

아니나 다를까 인터폰 화면으로 보인 것은 진청색 후드를 뒤집어쓴 시우였다.

열림 버튼을 누르자 인터폰 화면에서 시우의 모습이 휙 사라졌다.

그리고 조금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17층에 도착한 시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야?”

문을 열고 그를 바라보았다. 집으로 들어선 그는 나른해 보이는 은하를 한 번 쳐다보더니 이번에는 대뜸 말을 걸었다.

“선배.”

“응.”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응, 잠깐.”

“그렇습니까.”

시우는 낮게 읊조리면서도 빠르게 집안 내부를 확인했다. 확실히 누군가 들렀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확인한 후에서야 시우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은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 톡에는 왜 답장해 주시지 않고요.”

“아아.”

은하는 주머니를 뒤적여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휴대전화가 이래서.”

“…….”

시우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은하의 손에 들린 휴대전화는 불에 타기라도 한 듯이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 액정을 톡톡 건드리며 은하가 말했다.

“얼마 전에 휩쓸렸던 버스트 게이트에서 이 꼴이 났어.”

그 시점에서부터 휴대전화가 망가진 것이라면 시우가 보낸 메시지도 애초에 확인하지 못했을 테다.

“고칠 수 있을까?”

“그냥 새로 사는 편이 빠르겠습니다.”

“그래…….”

은하는 조금 아쉬운 듯 자신의 휴대전화를 가만히 쓸었다.

“식사는요?”

“아직.”

“주방 좀 빌리겠습니다.”

시우는 후드를 벗고 성큼성큼 주방으로 향했다. 그 뒤로, 조금 못 미더운 은하의 눈빛이 따른다.

“……음식, 할 줄 알아?”

“간단한 것은.”

짤막하게 대답한 시우는 우선 벽에 걸려 있던 앞치마를 맸다. 식자재는 제휘가 알아서 채워 넣어 두었을 테니 문제없었다.

냉장고를 뒤적이던 시우가 스르륵 고개를 돌렸다. 식탁에 우두커니 앉은 은하가 보인다.

“……선배.”

잠시 망설이던 시우는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혹시 마에스트로를 아십니까?”

“마에스트로?”

고장 난 휴대전화를 매만지던 은하가 힐끗 이곳을 바라보았다.

“아니. 처음 듣는데.”

시우는 가만히 은하를 응시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오래 본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녀가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요?”

시우는 다시 냉장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근, 대파, 감자……. 이 재료들이라면 카레라이스가 무난하겠다.

탁, 야채를 한 아름 품고 냉장고 문을 닫은 시우가 흘러가듯 입을 열었다.

“그럼 백이준과는 아예 안면이 없다는 소리군요.”

“백이준?”

등 너머로 은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윽 고개를 돌린 시우의 품에서 툭, 감자 한 알이 떨어져 내렸다.

그를 안다는 듯한 은하의 반응 때문이 아니었다.

“네가 어떻게 그 애를 알아?”

은하의 낯선 얼굴을 마주한 시우는 그곳에서 쩍 굳어 버렸다.

마치 반갑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뜬 은하. 그녀는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과연 알고 있을까.

“아뇨, 저는…….”

그 앞에서, 어쩐지 시우는 다음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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