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8)화 (28/306)

#28

2부 녹화가 시작되었다.

열 명의 헌터들을 소개하고 이번 특집에 대해 설명하는 위주였던 1부와는 달리, 2부에서는 Q&A를 포함한 토크쇼가 진행되었다.

“지금까지 소탕했던 게이트 중,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는 게이트가 있다면?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음…… 5년 전, 남이섬에서 열린 A급 게이트가 아무래도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오오……. 방청객이 술렁였다. 윈드메이커가 말한 ‘남이섬 A급 게이트’는 2026년 8월 7일에 출현한 게이트였다.

당시 협회는 해당 게이트를 A급으로 측정했었는데, 보스 몬스터로 등장했던 ‘악마의 눈’이 무려 Lv.76이었다.

A급 게이트 출현 몬스터의 평균 레벨은 41에서 60. 즉, 흔하다면 흔한 ‘게이트 오류 현상’이 당시에도 발생한 것이다.

레벨 70 이상의 몬스터는 최소 A급 헌터 다섯 이상이 전략적으로 싸워야만 해치울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S급 헌터의 전투 참여가 필수 불가결.

하지만 불행히도, 당시 첫 타자로 투입되었던 헌터 중에는 S급이 없었고, A급 헌터마저 셋이 전부였다.

보스전에서 엄청난 난항을 겪고 있는 와중,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 바로 ‘닥터 플랜트’. 장미 길드의 주인이자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힐러, 한국의 여섯 S급 헌터 중 한 명이었다.

“맙소사, 닥터 플랜트라고요?”

녹화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MC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대본에 없는 질문을 했다.

“닥터 플랜트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영상에서 보던 대로 무척 아름답고 기품이 넘치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능력은 상상 이상이었고요. 그분께서 피워 낸 꽃잎이 우리의 상처를 감싸 주었고, 그분께서 만들어 낸 넝쿨이 부상자들을 안전히 게이트 밖으로 이동시켜 주었죠. 굉장한 광경이었습니다.”

“역시 S급 헌터는 격이 다르군요.”

“예. 그분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곳에 없었겠죠. 저는 게이트 소탕을 마친 뒤 찾아뵈었는데 그분께서는─.”

윈드메이커는 그날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해 댔다. 닥터 플랜트와 함께 게이트를 소탕했다는 경험은 아무래도 대단한 경험인 듯했다. 지루할 법도 한데 모두가 윈드메이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여기 모인 헌터 중, S급 헌터와 임무를 함께한 헌터는 그가 유일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그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흑염의 프린세스께서는 어떠십니까?”

팟.

은하 위로 조명이 켜졌다. 뒤편 대형 LED에 은하의 얼굴이 비쳤다.

“기억에 남는 게이트는 어떤 곳이었나요?”

MC의 질문에 은하가 입을 다물었다. 스튜디오에 가벼운 정적이 흘렀다.

‘기억에 남는 게이트라고.’

짧은 찰나, 은하는 지금까지 자신이 소탕한 게이트를 떠올렸다. 문자 그대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게이트를 하나만 꼽자면, 역시 오랜 시간 갇혀 있었던 언노운 게이트겠다.

‘하지만 여기서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지.’

마이크를 쥔 채 무어라 답할까 고민하던 은하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무 많아서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피식. 누구의 것인지 모를 비웃음이 들려왔다.

“여태까지 두 번밖에 게이트를 소탕하지 않았는데, 혹시 그 두 번도 너무 벅찼다는 말씀인지?”

일반 헌터석에 앉아 있던 한 헌터가 대놓고 비아냥댔다. 그것이 방아쇠가 되어, 또 다른 헌터가 입을 열었다.

“너무 대놓고 핀잔을 주지 말아요. 컨셉 헌터에게는 그럴 수도 있죠. 그들의 주 활동은 게이트가 아니니까.”

저 멀리 작가 한 명이 PD의 눈치를 보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PD는 그들을 저지하거나 녹화를 중단하지 않고 그저 팔짱을 낀 채 녹화장을 주시할 뿐이었다.

녹화 방송의 특성상,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은 편집하면 그만일 테니.

“듣자 하니 고레벨 몬스터도 해치웠다고 하던데. 뭐가 아쉬워서 컨셉을 고집하고 있는 건가요? 어차피 돈도 안 되잖아.”

또 한 명의 일반 헌터가 물었다. 방청객석이 조용해졌다. 빙판길처럼 식은 녹화장에서, 한 헌터가 벌떡 일어났다.

“그만하시죠?”

컨셉 헌터석 가장 왼편에 앉아 있던 그는 삿갓을 쓴 헌터였다. 그가 핏줄이 솟아날 만큼 세게 쥔 주먹을 쾅! 테이블 위로 내리쳤다. 그는 불같은 제 성정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 말은 대본에 없을 텐데요.”

“대본에 있는 말만 해야 한다는 법 있어요? 그래선 방송이 재미가 없지.”

“다들 궁금하잖아요? 늑대의 신예 용병이, 왜 드레스를 입고 컨셉질을 자처하고 있는지. 안 그래?”

일반 헌터, 컨셉 헌터, 방청객, 그리고 스태프까지. 모두의 시선이 은하에게 쏠렸다.

“맞습니다. 전 두 번밖에 게이트를 소탕하지 않았죠.”

은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건 제가 컨셉 헌터여서가 아닙니다.”

은하는 가장 왼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삿갓 헌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기 이 헌터는 올해만 해도 여섯 게이트를 소탕했습니다.”

“…….”

삿갓 헌터가 쥐고 있던 주먹을 스르륵 풀었다. 저 여자는 대기실에서 지나가듯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

은하는 그에게서 거둔 시선을 이번에는 일반 헌터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슬쩍 말아 올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은 올해, 몇 개의 게이트를 소탕했습니까?”

“…….”

“…….”

일반 헌터석도, 컨셉 헌터석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들 가운데에서 그동안 침묵을 지키던 윈드메이커가 부채를 펼치고 입을 가렸다.

“개수보다 중요한 건 돈이죠. 신예 헌터라 잘 모르실까 봐 조심스레 알려 드리자면, 헌터라고 다 같은 페이를 받는 건 아니랍니다.”

“그러면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은하가 윈드메이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단 하나의 웃음기도 머금지 않은 흑염의 프린세스의 얼굴이 뒤쪽 LED에 가득 떠올랐다.

“당신은 올해, 몇 명의 사람을 구했지?”

스튜디오 전체에 다시금 적막이 감돌았다.

***

그때부터일 것이다.

일반 헌터와 컨셉 헌터 사이에 기 싸움이 시작된 것은.

때마침 3부 녹화의 주제는 ‘승부’였다. 당연히 팀은 두 개로, 일반 헌터 팀과 컨셉 헌터 팀으로 나뉘었다.

첫 번째 승부의 주제는 팔씨름이었다. 토너먼트식의 경기로 컨셉 헌터 팀과 일반 헌터 팀은 대본에 짜인 순서대로 승부를 겨루게 되었다.

일반 헌터 팀의 첫 타자는 윈드메이커였다. 그의 인기가 비단 훈훈한 외모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는 컨셉 헌터 팀을 차례로 제압해 갔다. 두 번째 일반 헌터의 순서는 돌아오지도 않았다.

“아아……. 역시 여기서 무너지나요, 컨셉 헌터 팀! 이렇게 백화점 상품권 500만 원권은 일반 헌터 팀이 가져가는 걸까요?!”

MC는 스튜디오 중앙에 위치한 점수판을 넘겼다. 3:0. 현재 득점이었다. 물론 3이 일반 헌터, 0이 컨셉 헌터였다.

“내 차례군.”

광대저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컨셉 헌터들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녀석들 치사하게 첫 타자로 윈드메이커를 내세우다니.”

“그만큼 자존심이 상했단 거겠지. 본때를 보여 줘요, 광대저씨!”

“뭐, 이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5:0이란 숫자는 딸에게 부끄러워서 보여 줄 수가 없어.”

광대저씨는 저벅저벅 중앙으로 나갔다.

“아저씨, 괜찮겠어요?”

광대저씨와 오른손을 맞잡은 윈드메이커는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의 자신만만함이 멀리 앉아 있는 은하에게까지 닿을 정도였다.

“자, 시작하겠습니다. 3! 2! 1!”

MC의 카운트가 끝나자 두 사람의 팔뚝에 우드득, 힘줄이 솟아올랐다. 이미 세 명의 헌터를 상대한 윈드메이커가 힘이라도 빠졌던 걸까, 꽤 고전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크읍!”

광대저씨는 오른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왼손으로 테이블을 부러뜨릴 듯 쥐고 있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어금니가 뿌득뿌득 험한 소리를 냈다. 한마디로 안간힘을 쓰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돈이 절실한가 봐요?”

윈드메이커의 입술이 호선을 그린 순간.

“그래도 나이에 맞게 놀아야지.”

쿠웅!

테이블에 쩌저적 금이 갔다.

순식간에 스튜디오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멍청하게 눈을 끔뻑이던 MC가 정신을 차리고 마이크를 바로잡았다.

“어, 어……. 위, 윈드메이커의 승리입니다─!”

삐익!

승부의 종료를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얼어붙어 있던 스튜디오에 울려 퍼졌다.

“본 방송은 구급차 및 응급 대원 배치 등 안전 수칙을 준수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절대 따라 하지 마세요!”

언제 넋을 놓았냐는 듯 MC는 진행을 부드럽게 이어 나갔다. 그 뒤로, 광대저씨가 터덜터덜 좌석으로 돌아왔다.

“아쉬운 승부였쀼…….”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오른손을 카메라 반대 방향으로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은하를 포함해 좌석에 앉아 있던 컨셉 헌터들은 모두 보았다. 책상 모서리에 갈린 손등에서 핏방울이 하나둘씩 올라오고 있었다.

“너무하네. 아무리 승부라고 해도 방송인데…… 대본에 이런 게 있었어?”

“테이블까지 부술 힘이 남아 있었으면서 뭐 하러 시간을 끌었지? 그냥 가지고 논 셈이야?”

컨셉 헌터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한 헌터가 번쩍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상처가 생각보다 심한데요.”

삿갓 헌터가 짐짓 화가 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MC가 당황한 눈빛으로 PD를 힐끔 살폈다. PD가 두 팔을 교차하여 크게 엑스 자를 그렸다.

스태프석에 앉아 있던 막내 작가가 눈치를 보고 후다닥 뛰어왔다.

“죄송한데, 녹화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어서요. 구급상자는 이따 챙겨 올 테니 우선 녹화 재개를─.”

“뭐? 이따? 지금 피 나는 거 안 보여?”

무명 한복의 헌터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막내 작가가 주춤했다. 결국 자리에 앉아 있던 PD가 심드렁한 목소리를 내었다.

“컨셉 헌터는 자가 치유력이 없나 보죠?”

싸아아.

스튜디오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적막을 깬 것은 광대저씨의 넉살 좋은 웃음소리였다.

“하하핫. 이 정도 상처는 게이트에서 입는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쀼. 괜찮으니 녹화를 계속해도 된다쀼!”

“하지만─.”

납득하지 못한 무명 헌터의 손목을 광대저씨가 꾹 잡았다. 광대처럼 익살스럽던 얼굴이 일순 진지하게 물들었다.

“괜찮네.”

그만이 들을 수 있게, 광대저씨가 조용히 속삭였다.

결국 녹화는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스태프들이 스튜디오 중앙에 새 테이블을 가지고 왔고 여유만만한 얼굴의 윈드메이커가 다시 그곳에 앉았다.

“얼른 끝내죠. 상처 치료도 필요하다니까.”

윈드메이커의 말에 방청객석에서 키득키득 웃음이 흘러나왔다. 일부 방청객들은 그런 윈드메이커를 비난하듯 수군대기도 했으나, 방청객석의 대부분은 그의 팬으로 뒤덮인 상태였다. 소수의 목소리는 다수의 비웃음 소리에 녹아들어 금방 사라졌다.

MC는 진행 카드를 확인하고 마이크에 입을 가져갔다.

“네, 시청자 여러분! 현재 점수는 4 대 0이네요. 마지막 남은 흑염의 프린세스, 과연 그녀는 윈드메이커의 연승 행진을 막아 낼 수 있을까요?”

공중에 카메라가 올라가고, 스튜디오 뒤편에 배치된 LED에 윈드메이커의 얼굴이 잡혔다.

드르륵.

은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무리하지 마. 저 자식, 인정사정없는 녀석인 것 같은데.”

“이쪽 말이 맞아. 어차피 이기려고 나온 것도 아니고.”

“다치지 않는 선에서만 적당히 연기하고 돌아와.”

컨셉 헌터들은 뒤에서 소곤소곤 은하를 격려했다. 한 발짝 발걸음을 내디딘 은하가 스르륵 고개를 돌렸다.

“걱정 마세요.”

붉은 입술이 희미한 곡선을 그렸다. 걱정스러운 눈길을 하고 있던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저벅저벅 걸어 윈드메이커에 앞에 선 은하는 오른쪽 소매를 묵묵히 걷었다.

“어우, 살벌하네.”

윈드메이커가 어깨를 으쓱했다. 은하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의 맞은편에 앉아 팔꿈치를 탁자 위에 가져갔다.

“……내가 컨셉 헌터 같아?”

그에게만 들릴 만큼 나직한 목소리로 은하가 물었다. 윈드메이커의 눈썹이 움찔, 떨리는 순간 스튜디오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격양된 MC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자신감 있는 모습! 과연 흑염의 프린세스, 그녀는 윈드메이커를 쓰러뜨릴 수 있…….”

콰앙!

스튜디오에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두 동강 난 테이블이 쩌억 갈라져 바닥 위에 쿵 쓰러졌다.

그 반동으로 공중에 매달린 조명 기구가 덜커덕 흔들릴 정도였다.

순간 스튜디오가 적막에 휩싸였다. 지금까지 그러했듯, 이번에도 아주 짧은 찰나에 승부가 끝난 듯이 보였다.

“다음.”

다만, 결과만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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