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유명 쇼핑센터.
‘이런 드레스를 입고 다니면 싫어도 눈에 띌 수밖에 없을 테니까.’
집을 나선 은하가 꺼낸 말이었다.
물론 전투 시에는 싫어도 드레스를 입는 편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마저 이 차림을 고수하는 것은 관둬도 될 터.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참이었다. 달리 외출복이 없었으니까.
그래서였다. 갑작스레 쇼핑을 온 까닭은 말이다.
은하는 즐비한 쇼윈도를 지나치며 적당한 옷을 찾아다녔다. 시우는 그런 은하의 뒤를 군말 없이 조용히 뒤따랐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누군가와 이렇게 한가로이 쇼핑을 했던 것이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아마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이전의 일일 테다.
시우가 안내한 쇼핑센터는 VIP들만 쇼핑이 가능한 전용 공간이었다. 덕분에 사람들 눈을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이만 돌아갈까?”
쇼핑백 하나를 손에 든 채 은하가 힐끔 고개를 돌렸다.
“벌써 끝입니까?”
“응. 한 벌이면 충분해.”
은하가 구입한 것이라곤 긴 청바지와 아무런 로고도 없는 민무늬 반팔 티셔츠 한 장이 전부였다.
문득, 시우의 푸른 시선이 스르륵 아래로 떨어졌다. 은하가 신고 있는 구두를 향해서였다.
“……이왕 나온 김에 구두도 둘러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구두?”
우뚝 발걸음을 멈춘 은하가 제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걷기 편한 운동화를 구매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은하는 주섬주섬 소매를 뒤적였다.
이윽고 꺼내 든 것은 펭귄 모양의 동전 지갑. 제휘가 선물해 준 것이었다. 비쩍 야윈 펭귄의 부리를 열어 보았다. 그리고 금방 탁, 다시 닫는다.
“괜찮아. 다음에 사도 돼.”
두 차례의 게이트 소탕으로 꽤 짭짤한 수익을 얻은 은하였지만, 대부분의 돈을 계좌에 묶어 둔 탓에 가지고 있는 현금이 많지 않았다. 체크 카드나 신용 카드는 가지고 있지도 않고. 쇼핑에 돈을 펑펑 쓸 여유 따위 없다는 소리였다.
펭귄 동전 지갑을 집어넣는 은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시우가 낮은 웃음을 흘리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모처럼의 쇼핑이니 그 정도는 제가 사 드리겠습니다.”
스윽. 은하가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한다.
“……됐어.”
시우는 이미 은하에게 계약금 이상의 것들을 제공하고 있었다. 최신 모델 휴대전화나 최고급 오피스텔. 그가 붙여 준 유능한 매니저는 스케줄 관리뿐만 아니라 집 청소나 분리수거까지 도맡아 해 주고 있는 마당에 이 이상의 요구를 할 정도로 양심이 없진 않았다.
그런 은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시우는 조금 탐탁지 않은 듯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제가 구두 한 켤레 사 주지 못할 사람으로 보입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렇죠?”
시우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저 꽤 부잡니다. 나중에 따로 청구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시고 동전은 저금통에나 넣어 두시죠.”
“…….”
혹시 보았던 걸까.
펭귄 입속에 오도카니 자리한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를.
하긴, 미쳐 날뛰는 현대 물가를 생각한다면 이 돈으로는 구두는커녕 양말 한 켤레조차 사지 못할 것이다.
‘코인이라면 많은데.’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으니 아마 30만 코인이 그대로 인벤토리에 남아 있을 것이다.
“30만 코인으로는 무얼 할 수 있지?”
길을 걷던 은하가 문득 시우에게 물었다. 그는 헌터다. 그것도 꽤 높은 등급의. 그라면 분명 코인의 쓰임새와 가치에 대해 알고 있을 터.
“……30만 코인이 있습니까?”
돌연, 몇 걸음 앞서 걷던 시우가 짐짓 놀란 눈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코인이란 신수에게 후원받는 화폐. 즉, 코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곧 신수와 계약했다는 의미가 되었다.
“아니. 그냥 묻는 거야.”
은하는 시치미를 뚝 뗐다. 은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시우가 이내 시선을 거두고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코인을 일반적인 재화로 계산하기는 힘들지만…….”
그의 푸른 시선이 허공을 도르륵 굴러갔다. 톡톡, 검지로 팔뚝을 몇 번 두드린 그가 입을 열었다.
“굳이 따지자면 한 300억 정도?”
“……뭐?”
“아, 물론 달러가 아니라 원화로요.”
놀란 얼굴로 걸음을 멈춘 은하의 눈앞에 노란 메시지창이 팝업됐다.
띠링!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뿌듯한 미소를 짓습니다. 보았느냐, 나님의 재력을 똑똑히 보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