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21)화 (21/306)

#21

줄곧 그런 생각을 해 왔다.

1997년.

만일 그때도 헌터가 있었더라면,

만일 그때 내가 각성했었더라면,

엄마가 죽지 않아도 됐을까.

엄마에게 대학 합격서를 보여 드릴 수 있었을까.

──엄마는, 기뻐하셨을까.

마치 끝이 없는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은하는 습관처럼 왼쪽 팔목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혼자서 많이 무서웠겠구나.”

멈칫.

소원 팔찌를 쓰다듬던 손이 멈추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꼬마를 달래는 뫼비우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혹시 사탕 좋아하니?”

그는 주머니에서 딸기맛 사탕을 꺼내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는 훌쩍이면서도 사탕을 손에 꼭 쥐었다.

“아저씨들이 꼭 엄마를 찾아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저, 정말요……?”

“그럼.”

다정하게 웃은 뫼비우스는 아이의 젖은 눈가를 닦아 주었다. 뺨에 묻은 흙을 털어 주고,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묶어 주기도 했다.

“이름이 뭐야?”

“예리……. 안예리.”

“귀여운 이름이구나. 예리의 엄마는 무슨 옷을 입고 있어?”

“빨간색 원피스요.”

“그래? 엄마랑 커플룩을 입고 왔구나.”

“네에.”

마치 이런 일을 많이 겪었다는 듯, 그는 무척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아이를 다루었다.

불안에 젖어 있던 아이의 얼굴이 점차 안심으로 물들자, 뫼비우스는 아이를 곁의 헌터에게 맡겼다.

“아이를 데리고 본대로 돌아가세요. 이쪽으로 수색조를 보내 주고요. 두 명… 아니, 세 명이 좋겠군요.”

“예, 리더.”

아이는 어느새 헌터의 품속에 폭삭 안겨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뫼비우스는 아이가 통로를 지나 사라질 때까지 함께 손을 흔들어 주었다.

“…….”

내벽에 기댄 은하는 가만히 그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안심한 듯 말갛게 웃는 아이의 미소가, 진득하게 눈꺼풀에 달라붙어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

1998년 2월.

징병되어 훈련소에 들어온 지 한 달이 됐을 무렵이었다.

아직 헌터 시스템이 완전히 구축되지 않았을 시절이었다. 소탕이 미뤄진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탈출하는 일이 잦았고, 그중 약체들을 생포하여 훈련용 몬스터로 쓰는 일도 허다했다.

“와……. 대단하다.”

누군가 멍한 목소리로 감탄사를 흘렸다.

“혼자서 대체 몇 마리를 죽인 거야……?”

거센 불길 속에서 뚜벅뚜벅, 은하가 걸어 나왔다. 그 손에 들린 것은 몬스터의 잘린 목이었다.

비위가 약한 훈련생들은 그 모습을 시야에 담은 순간 먹은 것들을 모조리 토해 냈다.

몬스터 혈액에서는 특유의 역한 냄새가 났다. 그 고약한 피를 온몸 가득 묻히고 나타난 은하는, 훈련장 가운데 우두커니 섰다.

“미쳤나 봐.”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해.”

감탄이 비난으로 바뀌는 순간은 계절이 바뀌는 것보다 빨랐다.

은하는 몬스터의 목을 공처럼 걷어찼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목을 지켜보던 은하가 천천히 발을 들어 올렸다.

퍽!

퍽! 퍽!

이미 잘려 버린 목을 가차 없이 밟고 찌그러트렸다. 눈알이 튀어나오고 깨진 머리에서 정체불명의 액체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퍽! 퍽! 퍽!

그러나 은하는 멈추지 않았다. 그 괴상망측한 모습을 지켜보던 훈련생들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슬금슬금 은하에게서 멀어졌다.

결국 훈련장에 남은 것은 은하와,

“멈춰라.”

훈련소장뿐이었다.

그는 은하가 밟고 있던 몬스터의 목을 맨손으로 잡았다.

“주세요.”

텅 비어 버린 동공만큼이나 공허한 은하의 목소리에 훈련소장은 들고 있던 몬스터의 목을 멀리 던져 버리곤 말했다.

“그만하면 됐다.”

“아니, 아직이에요.”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저 멀리 날아간 몬스터의 목을 향해 은하가 발걸음을 내디뎠다.

“헌터의 행동 강령.”

훈련소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은하는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로 돌았다.

“……하나, 고유 능력이 양날의 검임을 인지하고 법규를 준수하라. 둘, 명예와 신의를 지키며 국민들을 수호하라.”

메마른 목소리는 기계적으로 헌터 강령을 읊었다. 은하의 입술에 들러붙은 피딱지를 살피던 훈련소장이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헌터 강령에 몬스터를 섬멸하라는 내용이 왜 없는지, 혹시 알겠나?”

“…….”

은하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새까만 시선은 여전히 몬스터의 목에 고정된 채였다.

“몬스터를 잡아 죽이는 일보다, 그 두 가지 사항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지.”

“…….”

“차은하. 이곳에 있는 모두가 가족을 잃었다. 나 역시 딸을 잃었고.”

은하의 시선이 몬스터에게서 그에게로 천천히 옮겨져 왔다. 공허한 동공에 자신과 닮은 얼굴을 한 그가 담긴다.

이런다고 네 엄마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 말은 하지 않길 바랐다. 이미 지긋지긋하게 들었고,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으니.

그는 두 손으로 은하의 양어깨를 단단히 쥐었다. 어딘가 닮은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네가 살리지 못한 사람보다, 네가 앞으로 살릴 사람이 훨씬 많겠지.”

눈이 뻑뻑해질 정도로 거센 모래바람 사이에서, 그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게 네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은하는 두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

“부르셨습니까, 리더.”

건장한 헌터 세 명이 나타났다. 손전등과 무기, 밧줄 등 필요한 장비를 꼼꼼하게 챙겨 온 그들은 수색조를 지원한 헌터들인 듯했다.

“아, 생각보다 빨리 왔군요. 이야기는 들었습니까?”

“네, 아이의 엄마가 실종됐다고.”

“그래요. 그럼 돌아갑시다.”

“네, 리더. ……예?”

세 명의 헌터가 엉거주춤 제자리에 섰다. 앞서가던 뫼비우스가 그들을 향해 뒤돌아보았다.

“왜 그러죠?”

“그… 수색 작업은 어떻게…….”

“아아, 수색 작업이요.”

곰곰이 생각하듯 톡톡 한쪽 뺨을 두드린 뫼비우스가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게이트 중추까지 들어갔지만 예상 이상의 몬스터 무리의 등장으로 인해 강제 중단되었다. 실종자의 인상착의와 일치하는 생존자 혹은 옷가지는 전혀 없었다.”

뫼비우스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술이 희미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렇죠?”

그 미소와 마주한 헌터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똑.

천장에서 물방울이 낙하하는 소리가 적막한 내부를 조용히 울렸다.

‘10명을 구하든 1명을 구하든 우리에게 떨어지는 수당은 같아. 뭐 하러 전열 흩트리며 위험한 짓을 해.’

그래, 생각해 보면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게이트 내부에서 일반인들이 발견된 경우, 리더는 단말기를 통해 지원군을 부른다.

즉, 앉아서 일반인들만 달래고 있으면 편하게 게이트 소탕을 마치고 제 몫을 챙겨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설령 나중에 내막이 밝혀지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들에게는 리더의 명을 따른 죄밖에 없으니 말이다.

이윽고 그들 중 가장 덩치가 큰 헌터가 뫼비우스 앞에 섰다.

“알겠습니다.”

잠자코 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맘 편한 일이리라.

“자, 돌아갑시다.”

“네, 리더.”

뫼비우스가 통로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나머지 세 헌터가 그를 따르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왁, 씨X. 깜짝이야!”

한 헌터가 욕설을 뱉으며 펄쩍 뛰었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은 그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늘에 가려져 있던 검은 옷의 여자가 서슬 퍼런 안광을 뿜고 있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게이트를 뒤덮은 어둠과 구분되지 않을 만큼 새까만 머리카락. 검은 드레스를 입은 채 끝이 뾰족한 양산을 식칼 쥐듯 든 그녀.

워낙 인상적인 비주얼이라 모를 수가 없었다. F급 컨셉 헌터, 흑염의 프린세스였다.

“뭐, 뭐야? 심장마비 걸릴 뻔했네!”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오소소 소름이 돋을 정도로 깊은 흑안이 그들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안 가?”

그는 통로 바깥을 향해 턱짓했다. 그러나 은하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다가, 이내 시선을 휙 거두었다.

또각, 또각.

그리고 그들의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 방향이 아닌데? 어딜 가려는 거야?”

한 헌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니, 붙잡으려고 했다. 은하는 그의 손길을 가볍게 피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수색 작업 해야죠.”

“뭐? 방금 리더 말 못 들었어?”

“들었습니다. 게이트 중추까지 수색 작업을 했다고요. 그렇다면 조금 더 깊은 곳까지 제가 보고 오죠.”

그 순간 뫼비우스를 포함한 네 헌터는 눈치챘다. 저 여자, 혼자 갈 생각이 분명했다.

‘단단히 미쳤군.’

알고 보니 저 여자는 초보라거나 미숙자가 아니었다. 그냥 미친 여자다.

“헌터의 사망률이 높다는 것도 다 예전 이야기긴 합니다만…….”

복잡한 한숨을 내쉰 뫼비우스가 앞머리를 흩트렸다.

“잘 모르는 것 같아 말씀드리는데, 게이트 안에서 헌터가 사망 또는 큰 부상을 입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뿐입니다. 첫째,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한 경우. 둘째, 난이도에 맞지 않는 게이트에 겁 없이 입장한 경우.”

영웅 놀이를 하고 싶어 하는 헌터는 그녀 말고도 많았다. 뫼비우스는 그들의 끝이 어땠는지, 똑똑히 봐 왔다.

“그래서요?”

은하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힐끔 던지며 응답했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그들과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태평한 태도에 오히려 헛웃음이 터질 지경이었다. 뫼비우스는 겁을 상실한 듯한 초보 헌터를 위해 문제점을 하나하나 짚어 주기로 했다.

“게이트 내부에 아이의 엄마가 있을 거란 확신을 하고 있나 본데,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책임을 물어야 할 겁니다.”

“…….”

“책임자의 명령에 불복종한 죄는 상당히 클 텐데요. 길드에 가해지는 피해도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감당할 수 있습니까?”

“…….”

은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 현장을 지켜보고 있던 헌터 중 하나가 결국 참지 못하고 은하 앞을 떡하니 가로막았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지금 리더의 말을 무시하는 건가? 게이트 경험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헌터의 위계질서에 대해서도 무지하군.”

그는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은 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은하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문제다. 각성자의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난 현대에서는 미디어에 보여지는 모습만 믿고 개나 소나 헌터가 되겠다고 난리였다. 그 꼴이 역겨워서 견딜 수 없었다.

특히 이렇게 치렁치렁 드레스를 입고 게이트에 들어온 컨셉 헌터는 더더욱 그의 비위를 상하게 만들었다.

“너, 몇 기야?”

그가 공격적으로 물었다. 그는 2028년 10월에 훈련소를 졸업한 123기였다. 벌써 3년 전이란 소리였다.

뫼비우스에게 향해 있던 새까만 동공이 천천히 움직여 그에게 꽂혔다.

징병 제도도 사라졌고 각성자에게 헌터가 강요되지 않는 세상이라는 것은 이제 은하도 잘 알고 있었다.

현대의 헌터 훈련소는 껍데기만 남았을 뿐이었다. 보다 나은 취업을 위하여 4년제 대학에 진학하는 것처럼, 현대 헌터들에게 훈련소란 단지 그런 곳에 불과했다. 가면 좋고, 안 가도 그만인.

그런데도 아직 위계질서니 뭐니 운운하는 헌터가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안 들려? 몇 기냐고.”

그의 물음에 은하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새까만 두 눈과 마주치는 순간, 그는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지는 감각이 일었다.

피가 맺힌 듯 새빨간 입술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게 움직였다.

“나?”

어둠에 녹은 목소리는 멀리 가지 않았다. 그저 바로 앞에 있는 그의 귓가에만 슬쩍 닿을 뿐이었다.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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