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시우는 아침 일찍부터 은하의 방을 찾았다. 서로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다.
은하는 우선 그가 어떻게 언노운 게이트에 진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시우의 말에 따르면, 그저 우연이라고 했다.
“제가 진입한 건 B급 게이트였습니다. 똑똑히 초록색 균열을 보았죠.”
“그래?”
2001년 3월, 당시 은하가 들어갔던 게이트는 C급 게이트였다.
은하가 갇혀 있던 언노운 게이트는 평범한 게이트로 입구를 위장한 타입이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가장 가능성이 높겠다.
“그렇다면 나온 건? 어떻게 나왔지?”
“출구로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시우를 바라보며 은하는 생각에 잠겼다.
그와의 전투 당시, 은하는 다섯 가지 아이템을 모두 손에 넣었다. 그 순간 탈출구가 열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가만히 턱을 쓰다듬던 은하가 고개를 들었다.
“어째서 날 흑염의 프린세스라고 불렀고?”
“그야 그렇게 대놓고 코스프레를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코스프레라니?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흑염의 프린세스’는 헌터들 사이에 괴담처럼 전해지는 이야기였다.
‘괴담…… 이라고.’
묘한 눈빛으로 검은 양산을 주시하는 은하 곁에서, 시우는 스르륵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문득 가까이 배치된 유리 테이블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위로는 거의 손을 대지 않은 듯한 아침 식사와, 그 옆으로 펼쳐진 헌터 명부가 보였다.
“명부, 확인하신 모양이네요.”
시우의 말에 생각에 잠겨 있던 은하 역시 명부에 시선을 옮겼다.
“……다 죽었더군. 한 명을 제외하고는.”
높낮이가 없는 음성. 아무런 동요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처럼, 그녀의 표정은 그저 평온했다. 얼굴이 깊이 침잠된 것은 오히려 시우 쪽이었다.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아무 말도 않는 은하의 옆모습을 살피던 시우가 다시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선배가 원하신다면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그 한 명. 연락처나 사는 곳 정도는 금방 알아낼 수 있을 테니.”
바람을 넣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시우에게는, 늑대 길드에게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동료를 만나게 되면, 그녀의 정체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겠지.
“아니.”
그러나 은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아 있다는 걸 알았으니 됐어.”
이준을 만나면 무척이나 반가울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혼란스럽기도 할 테다.
‘30년이 흘렀으니 백이준은 54세…… 겠지.’
은하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20대 금발 청년으로 남아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저 스친 상처라는 은하의 말에도 응급 키트를 쥐고 뛰어오던, 키우던 강아지 이야기를 하며 포근한 표정을 짓던, 피 비린내 나는 게이트 속에서도 늘 내일에 대해 말하던.
소박하고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
은하는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며 느릿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30년 만의 재회는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백이준은 여린 사람이었다.
그때 그 일은, 마음 약한 그에게 작지 않은 트라우마를 남겼을 것이다. 굳이 그의 눈앞에 나타나서 그의 상처를 들추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30년 전의 일이 되었다면, 더더욱.
“그렇다면 달리 원하시는 건 없으십니까?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 이미 충분해.”
“그러지 마시고 뭐든 말씀하십시오. 필요한 물건은요? 드시고 싶은 거나 만나고 싶은 사람, 뭐든 좋습니다.”
괜찮다는데도 자꾸만 무엇인가 제공해 주고자 하는 것이 조금 불편했다. 이전부터 그랬다. 은하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생각했다.
“……왜?”
“네?”
동공의 경계조차 확연치 않을 정도로 새까만 눈동자가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당연한 의문이었다. 시우는 아무런 조건도, 대가도, 기한도 없이 귀빈에 가까운 대접을 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생각 외로 아주 짧고 깔끔한 것이었다.
“선배가 1세대 헌터이기 때문입니다.”
1세대 헌터.
말 그대로 이 격변의 시대의 태동기를 겪은 초대 헌터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그게 왜?”
은하는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물론입니다.”
시우는 즉답했다.
“1세대 헌터의 대부분은 순직 또는 실종, 그도 아니면 의식만 남은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열악하고 끔찍한 시절을 견디고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당신들은 추앙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시우의 이야기를 들은 은하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그렇듯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우연히 각성하여 스무 살의 나이에 징병되었다. 그 후 몬스터에게 복수심과 분노를 표출했다. 문자 그대로 미친 듯이. 그것뿐이었다.
“현대의 헌터들은 정말 형편없습니다. S급 헌터로 측정된 저마저도, 선배에게 질 뻔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선배가 정신을 잃지 않았더라면 속수무책으로 당했겠죠.”
“그건 그래.”
깊게 생각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은하를 보며 시우는 작게 헛기침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오만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그와 다시 맞붙게 된다 해도 은하는 그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 애초에 컨디션만 좋았다면, 그리고 그가 얼음뿐만 아니라 물도 다룰 수 있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더라면 지려야 질 수 없는 싸움이었으니 말이다.
“현 S급 헌터의 전투력을 웃도는 실력에, 언노운 게이트의 생존자. 선배의 존재가 매스컴에 알려지면 아마 전국적으로 큰 이슈가 될 겁니다.”
게이트, 그리고 몬스터.
인류가 가진 과학의 힘으로도 그것들의 본질과 원인을 밝혀낼 순 없었다.
특히 언노운 게이트의 경우 이름처럼 수수께끼에 휩싸인 곳이었다. 그곳은 다른 게이트와는 달리 공략법이나 룰이 일정하지 않았고 난이도나 출몰 지역 역시 정해진 바가 없었다.
언노운 게이트에서 30년을 생존한 은하의 존재는 게이트 연구학자들에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잘 모르겠어.”
이제는 은하 본인도 현실을 받아들였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꿈보다도 현실감이 떨어지는 현실이었다. 은하가 아는 세상은, 서울은, 이제 없었다.
텅 빈 인형처럼 오도카니 자리에 앉아 있는 은하를 바라보던 시우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선배만 괜찮으시다면 한 가지 제안을 해도 되겠습니까?”
“……제안?”
“네. 줄곧 생각 중이던 일입니다만.”
어딘가 지쳐 보이는 은하를 바라보며 시우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은 조금 더 쉬시는 것이 좋을 듯싶네요. 언제든 좋으니 제 이야길 들어 볼 생각이 들면 말씀해 주세요.”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고 싶었지만, 졸지에 30년 뒤의 세상에 나온 그녀의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사람을 호출하셔도 됩니다.”
달칵.
텅 빈 방에 홀로 남은 은하는 버릇처럼 왼쪽 팔목을 매만졌다. 낡은 소원 팔찌의 감촉은 언제나 마법처럼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던데, 30년이면 강산이 세 번 변한 기간이었다.
방에 홀로 남은 은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세상은 변했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도 변했다. 마치 생생한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
은하가 알던 동네는 없었고,
은하가 알던 사람도 없었고,
은하가 알던 은하도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이곳, 2031년이라는 현대에서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어떤 생활을 하며, 어떤 꿈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
언젠가 한 번, 이와 같은 고민을 했을 때가 있었던 것 같다.
아마 고등학교 2학년 정도였을 것이다. 담임 선생님에게 받은 ‘진로 희망서’를 제출하기 전, 은하는 그것을 어머니에게 보였다.
‘은하야, 너…….’
진로 희망서를 확인한 어머니는 놀란 얼굴로 은하를 바라보았다.
‘엄마, 나 대학 안 갈래. 그냥, 적당한 곳에 취업해서 돈 벌고 싶어.’
‘그럴 필요 없어. 은하야, 네가 대학을 포기할 정도로 엄만 힘들지 않아.’
‘엄마, 그래도─.’
‘잘 들어. 엄마는 말이지. 은하가 네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