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10)화 (10/306)

#10

“왜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거지?”

광현은 초조하게 손목시계를 응시했다. 자신만만하게 한 시간 안에 돌아오겠다던 시우가 여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냥 퇴근해 버려?’

이미 퇴근 시간을 훌쩍 넘겼다. 지금쯤 딸이 아빠를 목 놓아 부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수도 없이 갈등하던 광현은 결국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럼 협회장님께 드릴 말씀이 없지.’

헌터 협회장은 시우를 눈독 들이고 있었다.

신시우는 S급 헌터였다. 그것도 그 귀하다는 자연계열.

더욱 주목할 만한 점은, 그가 얼음뿐만이 아니라 물까지도 다룰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의 능력은 전투뿐만 아니라 화재 진압이나 피난민 구출 시에도 무궁무진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

‘협회장님께서 욕심내실 만해.’

하지만 과연 그가 제안에 응해 줄까? 웬만한 감언에는 눈썹 하나 꿈틀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는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기를 꺼려 하고 있었다. 그것이 본인의 의지인지, 늑대의 의지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누가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그동안 미루고 있던 튜토리얼 과정을 오늘에서야 밟게는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헌터 활동에 대해 뜻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도대체 어떤 수를 써야 시우를 협회로 꼬드길 수 있을까. 해답 없는 고민을 30분 정도 반복했을 때쯤.

딸랑, 유리종이 울렸다.

“아니, 신 헌터님!”

우당탕!

그가 앉아 있던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방금 전까지 썩어 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광현은 만면의 미소를 장착하고 냉큼 문을 열었다.

그런데.

시우를 본 광현의 얼굴이 돌연 굳었다.

“응?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아뇨, 뭐…….”

시우가 말끝을 흐렸다.

그가 입고 있는 후드 티는 마치 불똥이라도 튄 듯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을린 신발,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 검은 재가 묻은 뺨. 카페를 나서던 때와는 사뭇 다른 시우의 모습에 광현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S급이 B급 게이트에서 고전을 했다고?’

말도 안 된다. 차라리 돌아오는 길에 화재 현장을 맞닥뜨렸다는 것이 더 현실성 있겠다.

“여기요.”

시우가 불쑥 보라색 광물, 게이트 핵을 내밀었다. 아, 우여곡절이 있긴 했어도 튜토리얼은 확실히 완수한 모양이다.

왜 저런 꼴이 됐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찌 됐든 B급 게이트를 홀로 소탕하고 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그가 정말 S급 헌터라는 증거였다.

“굉장하십니다. 우선 이쪽에 앉으시죠. 많이 바쁘실 테니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 응급처치 같은 거 할 줄 알아요?”

“네, 응급처치─.”

우뚝, 광현이 멈춰 섰다.

“예? 응급처치요? 어디 다치시기라도……?”

“나 말고.”

시우는 휙 엄지를 들어 자신의 등 뒤를 가리켰다.

“이분이요.”

그제야 광현은 시우가 무언가를 업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커다란 그의 등에 가려진, 왜소한 체구의 젊은 여자였다.

“이쪽은…… 헉.”

광현은 헛숨을 들이켰다.

까만 천에 애벌레처럼 둘둘 싸인 그녀는 무척 창백한 안색이었다. 검은 소매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손목이 이상하리만치 창백하고 앙상했다.

“상태를 좀 확인해 주세요. 사정상 병원을 갈 수는 없어서요.”

그리 말하는 시우는 조금 초조해 보였다.

헌터 및 게이트 관련 업무를 해내는 협회 사람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사건 사고를 해결할 수 있도록 응급처치 및 기초 의학 지식은 필수로 요구됐다. 그걸 알고서, 시우는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광현 입장에서도 그가 하는 부탁은 들어주어서 나쁠 것이 없었다. 당장 수술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잠깐 보는 정도라면, 뭐.

광현이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시우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아, 조심하시고요. 지금 그녀가 깨어나면 아마 나도 못 말릴 테니.”

“……예?”

광현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잘못 들은 걸까? S급 헌터인 시우가 못 말릴 수준이라니…….

광현은 천천히 그녀를 살펴보았다.

저토록 새까만 머리 색을 가진 사람은 꽤 오랜만에 본다. 게이트나 계약한 신수, 초능력 등의 영향으로 현대인들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오색찬란한 머리 색과 눈 색을 가지기 시작했으니까.

시우의 태도나 범상치 않은 차림새로 미루어 보았을 때 아무래도 각성자 같은데. 저렇게 순도 높은 흑발이라니.

희한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 드레스. 그리고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손에 꼭 쥐고 있는 저건…… 양산이잖아.’

과하다 싶을 정도로 풍성한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는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새까만 색이었다.

코스프레일까? 그런 것치고는 묘하게 디테일이 살아 있었다. 조금 해진 리본이라든지, 핏자국이 얼핏 묻은 소매라든지.

“음. 열이 심한 것 외에 특별한 외상은 없는 것 같긴 한데요. 단순히 피곤이 극에 달한 건 아닌지,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어디 많이 안 좋은 건 아니고요?”

“예. 열이 내리면 아마 곧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합니다. 뭐, 의사가 아닌 이상 확답할 수는 없겠지만 제 소견은 그렇습니다.”

“그래요. 고맙습니다.”

기분 탓일까? 일순 시우의 얼굴이 안도로 물든 듯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자, 잠깐만요, 신 헌터님.”

광현은 후다닥 시우의 앞길을 막았다.

“아직 드릴 말씀이 남아 있습니다.”

“협회에 들어오라는 권유라면 거절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전 이미 몸을 담고 있는 길드도 있고요.”

“하지만 신 헌터님께서는 늑대 길드와…….”

“거절하겠습니다.”

단호하게 말꼬리를 자른 시우가 광현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는 성가시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은 얼굴로 나지막이 말했다.

“튜토리얼이 끝나면 이후 활동은 제 자유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그럼 이건 어떻겠습니까? 우선 내일…… 아니, 언제든 시간 되실 때 협회에 방문을─.”

“비켜 주시죠.”

광현의 말꼬리를 나직이 잘라 낸 시우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것보다 지금 우선시해야 할 사항이 있어서요.”

더 이상 그를 막아설 패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광현은 눈앞에서 S급 헌터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쉽지 않군, 정말.”

광현은 유리창에 달라붙어 점차 작아지는 시우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러던 중, 그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저 여자, 괴담 속 흑염의 프린세스의 외견이랑 닮았잖아.’

피로 물든 검은 드레스.

흑장미 문양의 양산.

가시가 돋은 구두.

치렁치렁할 정도로 긴 머리카락.

피로 얼룩진 피부.

모든 것이 딱 들어맞았다.

‘설마…… 아니겠지.’

광현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그의 뇌리에 시우의 경고가 스치듯 지나간다.

‘지금 그녀가 깨어나면 아마 나도 못 말릴 테니.’

광현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그의 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저 여자, 무언가 있다.

***

좋은 냄새가 났다.

은하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누군가 이마 쪽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두통이 일었다. 이 지독한 두통은 아직까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은하는 자신이 맡은 냄새가 이불의 섬유 유연제 향이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아직 정신이 멍했다. 부스럭부스럭 상체를 일으키자, 아직은 흐릿한 시야로 하얀 상자가 보였다.

‘이건.’

상자 안에 정성스레 개어 둔 그것은 은하의 낡은 군복이었다. 이게 왜……? 의문을 가지는 순간, 은하 곁에 호리호리한 그림자가 졌다.

“어머, 일어나셨어요? 도련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방을 정리하고 있던 젊은 여자였다.

‘……방?’

그제야 은하의 시야에 주변 환경이 또렷하게 들어왔다.

폭신한 침대,

나무 테이블,

하얀 커튼,

그리고…… 햇빛.

멍한 눈이 초점을 찾고, 새까만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우당탕!

은하가 침대에서 떨어졌다.

“괘, 괜찮으세요?”

여자가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은하는 그 손을 맞잡는 일 없이, 넋이 나간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게이트가 아니야.’

탈출…… 했다는 건가?

대체 어떻게?

은하의 기억은 푸른 눈의 헌터와의 전투를 마지막으로 뚝 끊겨 있었다.

혼란스런 머릿속으로,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가 파고 들어왔다.

“깨어나셨나 보군.”

“아, 도련님.”

“수고했어. 나가 봐.”

은하가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의 헌터. 그였다.

“몸은 좀 어떠신가요?”

말투와 얼굴로만 보아서는, 마치 진심으로 그녀의 몸 상태를 걱정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팟!

은하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빠르게 도약하여 침대 가장자리에 섰다. 그녀의 적대감을 증명하듯 양어깨에서 검은 불꽃이 화르륵 타올랐다.

“…….”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남자는 곤란한 얼굴을 하더니, 전투태세를 취하기보다는 두 손을 들어 항복 자세를 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놀라게 만들었다면 죄송합니다.”

존댓말. 은하의 미간이 좁아졌다. 태도뿐만 아니라 말투까지 바뀐 남자의 앞에서 은하는 굳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전투 당시와는 확연하게 달라진 그의 태도를 쉽게 납득하기는 힘들었다.

“미음을 준비하라 일러두겠습니다. 드실 수 있겠습니까?”

두 사람 사이에 은근한 침묵이 흘렀다. 은하는 여전히 불꽃을 거두지 않은 채,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깃든 적대감을 시우라고 모를 리 없었다.

시우는 은하와의 거리를 섣불리 좁히지 않은 채,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경계하지 말아 주세요.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더라면 진즉에 했을 겁니다.”

은하는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확인했다. 확실히, 몸에 힘이 없고 두통이 심한 것만 제외하면 별다른 외상이나 구속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치료를 받은 듯한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죽일 듯 공격할 때는 언제고. 무슨 꿍꿍이지?”

“누구든 충분히 오해를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 않을까요?”

게이트에서 출현하는 인간형 몬스터는 적지 않았다. 말까지 하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그것 또한 전례가 있었다. 게다가.

“보통 인간에게서 그렇게 진한 피 냄새는 나지 않으니까요.”

“아직도 내가 몬스터라고 생각하는군.”

“말씀드렸잖아요? 그렇게 생각했다면 잠든 사이에 이미 죽였을 거라고.”

피곤에 찌든 은하는 거의 이틀 내내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사이 그녀의 목을 비틀어 버리는 일은 어린아이의 손가락을 부러뜨리는 일보다 쉬웠다.

하지만 시우는 그러지 않았다.

은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은하 입장에서도,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어떻게 게이트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어떻게 자신을 데리고 그곳을 빠져나갈 수 있었는지, 그리고…….

‘나를 흑염의 프린세스라고 불렀어.’

어째서 은하도 몰랐던 그 칭호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도.

“…….”

그녀 곁에서 타오르던 검은 불꽃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물론 완전히 경계를 늦춘 것은 아니었다.

눈매를 날카롭게 세운 은하가 시선을 들었다. 시우는 조금 떨어진 곳에 정자세로 앉아 있었다. 마치 상관을 대하는 듯한 깍듯한 자세였다.

“감사합니다.”

대화할 마음이 조금 생긴 듯이 보이는 은하 앞에서, 그가 안도의 미소를 보였다. 은하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이 녀석, 대체 뭐야?

한편 시우는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미루어 봤을 때, 그녀는 높은 확률로 인간이라고. 그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그녀가 죽지 않았는데도 게이트 출구가 열렸다. 그 말은 즉, 그녀가 게이트의 보스가 아니었다는 소리였다.
  2. 시우는 은하가 정신을 잃은 뒤 곧장 게이트를 나서지 않고 주변을 확인했다. 그 결과,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움막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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